제 코가 석 자입니다만
지안 지음 / 처음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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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세상 이야기, 사랑 이야기, [제 코가 석 자입니다만]

 

왠지 모르게 새 에세이는 읽을 때마다 새 친구를 사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저자, 그러니까 상대가 털어놓는 이야기를 내게 허락된 시간과 장소에서 조용히 읽어나가면, 그렇게 무척이나 담담하게 우리의 관계가 시작되는 셈이다. [제 코가 석 자입니다만]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보통 사람, 보통 어른인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에 세상을 향한 시선을 섞어 담백하게 털어내는 책이다.

 

앞서 새 친구라고 표현했지만 글에 적힌 단서로 보아 나보다 언니일 그녀의 이야기는 몇 걸음 앞서 나간 인생 선배의 느낌으로도 다가온다. 이 에세이를 읽으며 크게 느껴지는 색은 담담함, 간결함, 그리고 강함이다. 문체의 영향도 있겠지만 사물과 세상을 대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렇게 느껴지고 그런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세상과 자신, 주변의 이야기를 조금씩 섞은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3사랑할 시간도 필요합니다의 글들이 유독 마음에 닿아온다. 몇 번을 하고 누구를 만나도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고 언제나 조금은 서툴러 보이는 나의 연애의 실패 요인은 어쩌면 자신을 향한 조바심과 조금 더 무르익어야 했던 준비 안 된 어른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하고 저자의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은 지금도 잔잔하지만 뚜렷이 남아 있는 저자의 말은 아마 3장 그 어느 에피소드에 등장했을, ‘어른이 자신의 삶을 사는 와중에 조금 남는 기운으로 나누는 것이 연애고 사랑이다’, ‘나쁜 연애는 있지만 몹쓸 과거는 없다라는 문장들이다. 그리고 또 있다. 좀 전에 다 읽었으니 이것은 정말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마지막 글에서 저자는 미래가 아주 조금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 썼다. 실은 나 역시 항상 그렇게 느끼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 말은 200페이지가 넘는 책장을 넘기는 동안만은 나와 가장 가까웠던, 그런 그녀가 했던 말 중에 특히 반갑고, 지금에 작은 위안이 되는 단단한 말이기도 했다.

 

집콕생활이 늘어 전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던 지인P의 말을 떠올린다. 그의 말처럼 자기계발을 위해 학습서를 펼쳐 들고 교양을 쌓기 위해 미뤄둔 인문서, 실용서를 호기롭게 읽기 시작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럴 때 언택트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낯선 누군가가 내밀어준 인연의 끈 같은 에세이도 참 즐거운 시간을 선물해준다. 술술 읽히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그녀만의 작은 철학이 담긴 이 책과 함께한 나의 며칠도 그랬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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