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나 (Malèna, 2000, 94분)

 레나토-주세페 술파로 / 말레나-모니카 벨루치

 주세페 토르나토레 ( Giuseppe Tornatore) - 1956년 5월 27일생

스타메이커(1995)/ 시네마천국(1988)의 바로 그 감독!

- 영화 예술/매체를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면서 그에 대한 자의식, 오마주, 패러디를 보여줌
- 소년의 첫 경험. 성애의 욕망. 성장의 통과의례가 늘 나온다.



0>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 빽빽하게 들어찬 흙벽집들. 가난한 이탈리아의 마을



 1> 무솔리니가 집권하는 파시스트 정권의 이탈리아, 그 중 시칠리아.
연합군과의 전쟁 선포- 열광하는 국민들- 그리고 13살의 레나토가 새 자전거를 산 날
-레나토의 친구들은 돋보기로 개미를 태워죽이는 장난을 하다 레나토를 맞는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태로 걸어가는 말레나의 등장.
2> 말레나에게 반해 성적 흥분을 느끼는 성장기의 레나토. 낮에는 말레나 집 맞은편 길에서, 밤에는 말레나의 집 안을 훔쳐보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
3>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혼자 여기에 있으면 그건 죄라고.” 이발관에서 남자들이 하는 말이다. 니노는 결혼 후 병든 아버지와 말레나를 데리고 왔다. 즉 말레나는 이방인이었던 것.
4> “마 라모레 노” 음악을 들으며 혼자 남편의 사진을 안고 춤을 추는 말레나. 음반을 사서 들으며 말레나와 함께 있는 것을 상상하는 레나토.
5> 말레나의 잦은 외출- 직장을 구하고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6> <타잔>, 서부극, <클레오파트라>, <글래디에디터> 등 온갖 영화 속 주인공으로 자신과 말레나를 대입해 상상하는 레나토.
7> 말레나의 남편 니노의 전사 소식- 대놓고 험담하는 마을 사람들



8> 장례행렬에 성모마리아처럼 꾸민 말레나
9> 말레나에 대한 음담패설과 험담이 극에 달아, 라틴어선생인 아버지가 말레나와 인연을 끊고, 더욱 고립된 말레나.
10> 대위와 치과의사가 말레나를 두고 싸우는 일이 발생해 재판을 받게 된 말레나.
11> 재판에서 변호사가 하는 말. “죄가 있다면 바로 그건 그녀의 아름다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질투할 정도로!” “오랫동안 미망인으로 살아온 이 젊은 여인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보호가 과연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12> 재판은 이겼지만 변호사는 변호료로 말레나의 육체를 요구한다.
13> 극장에서 창녀인 지나 옆에 앉아 사정에 이르며 자신을 영화속 무솔리니와 동일시
14> 어머니의 반대로 변호사는 말레나와 결혼하지 못하고 그녀를 버리게 된다.
15> 공식적으로 가족에 의해 긴바지를 입게 된 레나토. 긴 바지를 보고 이발사는 작은 의자를 내려놓고 큰 의자로 안내하며 선생님 호칭을 쓴다.
16> 빵과 설탕을 구하기 위해 몸을 팔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말레나
17> 설상가상으로 공습에서 말레나 아버지가 죽게 된다.
남편과 아버지, 여자를 보호하는 울타리로서의 남자를 모두 잃고 완전히 혼자가 된 말레나
18>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욕정을 표출한다.
19> 의식처럼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말레나.


20> 빨강머리로 염색하고 창녀처럼 입고 광장에 나선 말레나. 생계를 위해 창녀를 선택.
21> 독일인에게 몸을 파는 말레나와 그것을 욕하는 마을 사람들
22> 아버지는 레나토를 창녀촌으로 데려가고 동정을 떼게 한다. 말레나와 닮은 여자를 선택.
23> 연합군이 집권당이 되어 거리로 들어오고, 무솔리니의 사진이 떨어지고, 무조건 환호하는.


24> 동맹군에서 연합군으로 체제가 바뀌는 상황을 틈타 말레나를 끌어내 집단 학살, 린치를 가하며 머리칼까지 자르는 등 임의의 처벌을 내리는 마을 여자들. 그저 분위기에 휩싸여 좋아하던 레나토는 흥분하고 격양된 사람들의 무자비하고 끔찍한 박해를 무력하게 지켜본다.
25> 집을 두고 메시나행 기차에 몸을 실어 마을을 떠나는 말레나
26> 팔 한 쪽을 잃고 인도에 잡혀있다 돌아온 말레나의 남편, 니노.
27> 사람들은 파시스트 정권에서 징집되어 싸우다 돌아온 그를 학대하고 무시한다.
28> 니노에게 편지로 진실을 말하는 레나토
29> 아내를 찾아 떠나는 니노.
30> 1년 뒤 변함없는 마을. 치과의사는 여전히 마을 여자에게 추파를 보내고, 변호사는 여전히 마마보이다. 레나토만이 좀 더 자라 여자친구가 생겼다.
- 팔짱을 끼고 나타난 말레나와 니노. 모두들 숨죽이고 소곤대며 그들을 본다.
31> 시장을 보러나온 말레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마을 여자들. 린치를 가했던.
-말레나는 그들을 돌아보며 천천히, 인사에 답한다. “본존느” 이 인사는 그들 간의 화해이지만 정당한 사과와 용서를 통한 화해가 아닌, 지난 일을 덮어두겠다는 무언의 동의다. 이에 화답하면서 말레나는 마을 여자들과의 친분관계를 약속받고, 마을 여자들은 그들의 집단 폭력의 자책감을 잊게 되는 것이다.
32> “나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도망이라도 치듯, 욕망, 순수, 그리고 그녀로부터. ... 내가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내게 기억할 거냐고 묻지 않았던 단 한 사람 말레나” 

 ※ 해석 가능태
1) 레나토- 성장담
“영화 관람은 어떤 측면에서는 관음증 환자들의 집단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관객에게 정단한 응시의 권리를 주고 내밀한 타인의 삶을 정당하게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장르인 셈이다. 아무래도 관음증의 최종결과는 자아/타자/집단이 이루는 관계 혹은 삶과 현실에 대한 통찰이어야 되지 않을까. <말레나>는 이러한 통찰에 접근해가는 한 아이의 모습을 통해, 영화의 관음적 태도가 겨냥하는 바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소년은 이해해나가기 시작한다. 말레나의 진실과 아픔과 진정한 모습을, 그리고 거친 삶에 내재된 인간의 배신과 비겁함을.” (김남석, p283-4)
2) 말레나(니노) VS 마을 사람- 희생양 매커니즘과 회귀


  르네 지라르는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동력은 질서나 이성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말한다. 일정한 기간이 경과된 사회 내부에는 폭력 성향이 팽만하게 되고, 이 성향을 무마하는 해법도 폭력이라는 것이다.

“정체불명의 장애물과 같은 두려운 재앙과 싸우던 사회의 다수 계층들은 박해의 매커니즘을 통해서 그 집단의 욕구 불만과 불안을 희생양에게 쏟음으로써 대리 만족을 하게 된다. 이때 희생양들은 집단 전체와 잘 통합되지 않는 소수파이기 때문에 집단은 이들을 박해하는 데 쉽게 단결될 수 있는 것이다.” (󰡔희생양󰡕, p70)


* ‘희생양’이라는 개념은 희생양의 무고함과 함께 희생양에 대한 집단 폭력의 집중과 이 집중의 집단적 결과, 박해자들의 죄의식, 박해자들이 그들의 진정한 체계인 단순하지 않은 환상 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희생양󰡕, p70, 73)


* 희생양 메커니즘의 네 가지 전형
① 사회 문화적 위기, 전면적인 무차별화에 대한 묘사 → 전쟁 중. 민심이 흉흉. 집권당의 변화
② ‘무차별화’의 범죄 → 배신과 간통이라는 범죄가 횡행
③ 범죄 용의자들이 희생양으로 선택될 징후나 무차별화의 역설적인 지표
→ “성공과 실패, 아름다움과 추함, 악과 선, 호감과 거부감을 유발하는 힘과 같은 극단적인 성질들도 결국에는 모두 집단의 분노를 자극한다.” (󰡔희생양󰡕, p35)
말레나는 너무나 아름답다는 이질적 특성을 지닌 말레나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
여성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남편, 남성들을 들뜨게 한다는 ‘죄’가 있다.
결혼에 의해 그 마을에 들어온 이방인이라는 위치.
아버지와 남편이 모두 죽어 마을 사람들과 연결된 고리 혹은 친분이 전혀 없는 고립 상태.
(그 절박한 이유와는 관계없이) 창녀라는 직업으로 전락한 죄.
④ 처형 : 위기의 책임을 희생양에게 씌워서 폭력을 가하거나 적어도 공동체에서 추방


* 신화에서는 사회상황의 위기가 전적으로 희생양 탓이라고 연결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다. 희생양을 처벌하는 행위는 집단 욕망을 해소하는 일일뿐 실제적인 문제해결과는 전혀 연관없다.
* 신화에서는 희생양에 의해 없어지든지 위태롭게 된 질서는 희생양에 의해 다시 재건되거나 새롭게 만들어진다. 즉, 위반자가 그가 위반한 그 질서의 회복자로 바뀌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원초적’ 성스러움의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말레나>의 결말처럼 현실(혹은 그와 가까운 리얼리티에 기반한 묘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희생자의 위치는 회복자로 상승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박해자들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마을 여자들이 말레나를 받아들이고 그녀 역시 자신을 욕보이고 구타한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은 성스러움이 아니라 현실의 불합리, 치욕, 여전한 약자로서의 치욕적 위치, 역사에 대한 봉합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박해자들의 가증스러움과 교활함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3) 메타 영화
‘영화’ 자체에 대한 자의식적 접근이 배제되었는데도, <말레나>에서 영화에 대한 물음을 상기하게 되는 이유는 레나토의 ‘바라봄의 행위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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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8-04-06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근데 이 영화에 13번 장면이 있었던가요? 극장에서 창녀 지나 옆에 앉아 자신을 무솔리니와 동일시. 레나토가 극장에서 하드보일드 형사물을 보며 말레나를 헤픈 년이라고 뺨 때리는 거 빼곤 극장 장면은 없었던 걸로 전 기억하거든요.

K 2008-04-0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의 편집본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잘못 기억하신 걸지도...^^

심술 2008-04-07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긴 제가 갖고 있는 디비디는 편집이 좀 많이 된 거라서요. 제 디비디로는 13번에 나와야 할 장면이 레나토가 교실에서 말레나에게 연애편지를 쓰다가 선생님한테 들켜서 교실 밖으로 쫓겨나간 뒤 무솔리니 흉상을 밀어 깨뜨리는 것이더군요. 다른 편집본에선 극장에서 무솔리니와 동일시하는 걸로 돼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왕가위 감독, My Blueberry Nights, 2007, 94분

엘리자베스 (노라 존스)/ 제레미 (주드 로)/ 레슬리 (나탈리 포트먼)/ 수린 (레이첼 와이즈)/ 어니 (데이빗 스트라탄)



실연당하고 제레미의 식당을 찾은 엘리자베스.

제레미는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고, 자신이 보고 들었던 이별 스토리들을 얘기해주고 팔리지 않고 남은 블루베리파이까지 준다(아님 판건가?). 코피터진 채 울다가 블루베리파이를 먹고, 아이스크림을 입술에 묻힌 채 바에 엎어져 잠이 든 엘레자베스에게 키스하는 제레미. 몰래 미소지으며 키스의 감촉을 음미하던 엘리자베스는 문득 떠난다.



그리고 그녀의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는 제레미.

자동차를 사겠다고 알바를 하는 베스는 가끔 제레미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을 잊지 말고 기다려라는 거지. 그리고 자신은 두 사건을 겪으며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고 성숙한다. 하나는 모두 사랑과 구속을 구분하지 못해 소중한 사람이 죽은 뒤에야 후회하는 주린의 이야기. 하나는 레슬리와의 짧은 여행을 통해 자신을 똑바로 보게 된다는 뭐 그런 이야기. 로드무비의 전형적인 기능이랄까. 돌아온 베스와 기다린 제레미와 정리된 주변 상황과 진한 키스. 뭐 그렇고 그런 사랑 얘기.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란 상처를 위로받던 시간이라고나 할까. 아님 마음을 추스리던 시간, 혹은 상처 위에 새살이 돋듯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려하던 시간 정도로 해석된다.

평론가들의 불만섞인 20자평이 인상적이었다.

-그 감성 어디 가랴만 이젠 연륜을 보고 싶다...... 박평식

-왕가위의 영어 숙제...... 이동진

헐리웃에 가면 다들 이렇게 '더' 낭만적이고 순해지는 건가...

여전히 디테일은 빠진 감성의 극치, 순정 만화 주인공 같은 표정...

특히나 이 영화는 네온사인을 떠올리게 했다.

가까이에서 보면 식상하고 상투적이고 퇴폐적이기까지 하지만

어느정도 멀리서 보면, 더불어 비까지 내리는 날엔 더 없이 예쁘고 낭만적으로 보이는 네온사인 말이다.

첫 키스신을 잡은 각도와 표현법이 특이했던 것 빼고는 별로 인상적인 미장센은 없었지만,

순정만화 일러스트 같은 컷은 많았다.


"죽은 뒤 남는 건 내가 남들에게 새겨준 기억 뿐이다."

"남과 견주어 보며 조금씩 자신을 회복한다."

"길을 건너는 건 그리 어려울 게 없었다. 건너편에서 누가 기다려주느냐에 달렸을 뿐"

내레이션이 갈수록 싫지만, 이 영화의 요점은 모두 내레이션이다.

그렇게 주제를 주인공의 직접화법으로 전달하는 것도 정말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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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La Double vie de Veronique, The Double Life of Veronique, 1991, 98분


[베로니카]* 

 우리는 애초에 하나의 몸이었다. 아니, 몸짓이었나?

  나는 당신 손등에 잘못 그어진 흉터. 지난밤 꿈에 길게 칼자국 남긴 얼굴 가린 귀신. 당신의 잘 웃지 못하는 왼쪽 입꼬리. 저장도 안하는 참 못나온 쎌카. 당신이 태어날 때 처음 보고 놀란 그 환한 빛처럼, 나도 버튼이 잘못 눌린 복사기에 얼굴이 끼었을 때 태어났어요. 그 환한 빛 말이죠. 내가 어머! 하고 부끄럽게 비명을 질러보았는데요. 그 순간에도 나는 스무개, 서른개로 늘어나고 있더란 말이죠.

   우리는 죽은 쥐들과 귀신 들린 인형과 벌레들이 우글대는 베개 등등. 캄캄한 지구에서 신나게 달리기를 하는 중이죠. 시든 꽃을 들고 제일 먼저 당신에게 도착하면 신나서 팔짝팔짝 뛰어올라요. 잘못 도착한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방인이네요. 누군가 우리를 제자리에 돌려놓기 전에 최대한 수줍게 웃으면서 악수 청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어요.

   깜찍한 상상들 지겨워요. 우린 그냥 하나의 소문일 뿐인데요 뭘. 내가 나랑 또 나랑 나들이랑 손에 손잡고 귓속말로 내가 누구인지 수소문하는 동안 살비듬이 떨어져나가듯 내가 또 한움큼 세상에 나동그라졌어요. 꽉 잡아. 이런 말 할 새도 없었죠. 스무개 서른개씩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나를 왕창 흘리고 다녔어요.

   저기 사납게 쏟아지는 빗발울 보이나요. 저 신나게 튀어오르는 물의 분열증. 창밖을 서성이며 호시탐탐 안을 노려보는 형형색색의 눈동자들. 깨어지고 다시 손잡기놀이 하며 소리 지르고 웃고 울고 발악하는 한바탕 술래잡기. 수없이 얼굴 바꾸며 쏟아지고 지워지는 지구의 상상. 나였는데 다시 보니 당신이었고 또 그였으며 이젠 그녀였는데 알고 보니 다 나더라 아니 당신이더라 하는 물기 어린 말장난.

   저기 찌라시 같은 내가 보이네요. 그래요. 우리는 애초부터 과대광고였어요.

* 끄시슈또프 끼에슬롭스끼 감독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올해, 6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에 당선된 작품이다. 마침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배우 엄지원의 추천으로 이 영화가 상영된다길래 보러가려고 예매해뒀었는데 관람 하루 전날 우연히 이 시를 알게 됐다. 이 시의 우울하고 자학적인 느낌보다는 훨씬 관대하고 신비로운 영화였다. 

프랑스와 폴란드, 노르웨이가 합작해 만든 35mm 필름의 96분짜리 영화다. 지금이 비록 3월 14일이지만, 밤을 샌 나로서는 3우러 13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는 1996년 3월 13일에 사망했다. 나는 그의 사망 12주년 전야제로 그의 영화를 보았고, 그의 사망일에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 묘하다. 동유럽을 대표하는 모럴리스트이며  실존주의자인 폴란드생이라고 네이버가 설명해준다만, 그것보다도 영상미와 철학적 메시지가 인상깊어서 그의 다른 영화들도 함께 다운받고 있다. 모두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수작이다.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세가지 색-레드/박애>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1991년 깐느 여우주연상과 국제비평가상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그해에 개봉되었었다고 한다. 영화 상영 후 간단한 설명을 해주던 허문영씨는 당시 30살쯤이었다는데,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아름다운 이렌느 야곱에게 매혹되었다고. 당시에 봤던 프린트가 내가 본 프린트란다. 가끔 비내리는 듯한 스크래치와 울렁이는 화면, 촌스럽고 어색한 자막이 관람을 힘들게 했지만, 그말을 들으니 진귀한 골동품을 구경하는 듯 해서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씨네21기사를 옮겨오면, DVD엔 영화 제작 당시 그와 나눈 대화(53분)가 수록되어 있단다. “충치가 생기면 이가 아프듯 보편적인 감정은 모든 인간이 똑같이 느낀다, 배우가 내면을 충실히 드러낼 때에만 생동감있고 입체적인 인물이 완성된다, 나의 영화는 마음을 열고 봐야 한다” 등 연출과 연기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들려주던 그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주제가 ‘삶을 더욱 신중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의식 혹은 무의식 중에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데,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기 때문에 각자 책임감을 느끼며 행동하라는 뜻이다.

   원래 감독은 수십개의 다른 결말을 편집해 극장마다 다르게 상영하려는 착상을 했으나 제작비문제로 거절당했다고 한다. 만약 그 계획이 성사되었다면 영화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되지 않았을까. 뭔가 신화적이고 동화적인 분위기를 원했다는 그의 영화적 느낌과도 일맥상통하는 계획이라 맘에 쏙든다. 언젠가는 그런 시도를 하는 영화도 있지 않을까. 디지털시대이니 말이다.

   철저히 계산적으로 찍고, 촬영한 필름을 거의 버리는 경우가 없었다니 그의 천재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무래도 즉흥적인 홍상수식 연출보다 이런 계획적 촬영이 난 더 훌륭하다고 본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오렌지빛인데, 감독은 이런 색감을 얻어내기 위해서 오후 3시부터 해질녁까지만 촬영했다고 한다. 음악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대부분 찬송가 같은 건데, 

 
 감독과 주인공 이렌느 야곱



 

 

 

 

 

 

 

 

 

 

영화 전체를 요약하면서, 영화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였던 인형극 장면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폴란드의 베로니카와 프랑스의 베로니끄는 같은 날 태어나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똑같이 생긴 여성들이다. 오프닝 시퀀스가 인상적인데, 다섯 살 쯤 되어보이는 귀여운 여자 아이가 두 씬에 걸쳐 나온다. 아마도 베로니카와 베로니끄이리라. 처음엔 성탄 전야의 별을 바라보고, 다음 씬에선 새로 난 잎을 만져본다. 우주와 만물의 생의 신비를 발견하는 소녀들. 그들은 비슷한 점이 많다. 지팡이를 짚고가는 꼬부랑 할머니를 창 밖으로 보는 것, 작은 구슬을 가지고 있는 것, 손가락에 흉터가 있는 것, 반지로 눈 아래쪽을 긁는 것 등.    

 처음엔 폴란드가 배경이다. 소나기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찬송가를 부르는 이렌느 야곱이 등장한다. 환희에 찬 그 모습은 첫 씬부터 관객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녀는 이모집에 갔다가 시민들이 시위 중인 광장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인을 본다. 이후 선망하던 음악회의 소프라노로 뽑히지만 노래를 부르던 도중 (아마도 심장발작으로) 죽게 된다.

 자기와 똑같이 생기고 똑같은 삶을 사는 또다른 인물을 도플갱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들은 서로를 보면 죽게된다고 한다. 베로니카도 베로니끄를 보아서일까,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다. 고작 영화시작 29분 뒤다.

  그리고 프랑스의 베로니끄에게로 영화는 옮겨진다. 베로니끄는 갑작스런 슬픔을 느낀다. 국경너머 자신의 분신과 같은 이의 죽음을 느낀 사람같이.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인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인형극을 보다가 어떤 감명을 받는데, 그 인형극은 베로니카의 죽음을 연상케하는 것이었다. 이후 인형극사인 알렉상드르 파브리는 베로니끄에게 미스테리한 접근을 하는데, 베로니카가 죽을 때의 음악회 영상을 틀어주고, 자신의 동화에 등장한 소품들-구두끈, 버지니아 담배의 빈 갑 등을 배달시킨다. 결국은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기차역의 한 카페에서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고, 베로니끄는 어떤 이끄림에 그곳을 찾아간다. 파브리는 이틀 이상을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그런 일이 가능한지 알고 싶었단다. 낯선 사람의 신비로운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지... 그저 흔적을 찾아 이끌릴 수 있는지... 독특한 에피소드다. 동화작가는 아마도 그런 운명에 가까운 만남을 원했던 것 같다. 혹은 자신이 믿고 있는 운명을 확인해보고 싶었거나. 알 수 없는 이끌림과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서로 이해하는 사람.

베로니끄는 늘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다고 한다. 어디엔게 동시에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그리고 결국 자신의 사진에 찍힌 베로니카를 보게 된다. 예감이 맞았을 때, 이런 비정상적인 신비로운 일을 접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는 걸까. 베로니끄는 흐느껴우는데 그것은 절망일까 두려움일까 슬픔일까. 혹 삶이란 그렇게 신비롭고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여지는 어떤 것인가. 파브리는 인형은 잘 닳기 때문에 두 개씩 만든다고 한다. 베로니끄는 자기와 닮은 두 인형을 본다. 그리고 파브르가 읽어주는 새 글 '.....의 이중생활'은 베로니끄들의 이야기와 같다.



결국 감독은 베로니끄가 아버지의 집 마당에 있는 나무에 손을 대어보며 신비로운 것들에 대해 느끼는 것으로 영화를 끝맺는다. 삶은 신비로운 것이다.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영화에선 이해할 수 없는 몇 장면이 나온다. 인형극사는 어떤 존재일까? 그는 정말 어떤 신비로움을 상상하는 예술가와 같은 존재일 뿐일까? 그가 기다리고 있떤 카페에서 베로니끄는 불에 탄 자동차를 보는데, 그건 왜일까? 무엇을 의미할까? 그 차는 네 번이나 나온다.영화 속 차들이 모두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베로니끄의 차도 이처럼 생겨서 약간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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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灰 2008-03-15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에 관한 의미 있는 페이퍼라고 생각해요. 뽑아 놓은 컷이 인상적이군요.
 

[장 르느와르], 앙드레 바쟁 지음, 한나래

이 책의 훌륭함은 다른 백마디 말보다 트뤼포가 쓴 머리말의 마지막 2문장으로 족히 설명된다. "만일 앙드레 바쟁의 이 뛰어난 저서가 미완성이라면, 즉 그것은 <피크닉>이 그렇듯 미완성으로 간주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족하면 그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장 르느와르에 대한 가장 빼어난 초상을 제공하고 있노라고."

 

 

 

<피크닉(시골에서의 하루)> 1936, 40분, 흑백, 프랑스

 

<어느 하녀의 일기> 1946년, 86분, 흑백, 미국  

 

<해변의 여인> 1947, 71분, 흑백, 미국

 

<엘레나와 남자들> 1956, 95분, 컬러, 미국,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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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 2007, 121분

-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 사랑도 변해.

 <봄날은 간다>는 <미술관 옆 동물원>, <번지점프를 하다>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한국영화 베스트 리스트에 오르는 몇 안되는 러브스토리(사랑을 주제로 했다는 넓은 의미에서)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 통곡하며 뒤를 따르거나, <사랑과 영혼>에서처럼 귀신과도 기꺼이 사랑하는 변치않는 러브스토리가 진실한 사랑이라고 당연스레 주장하는 식상한 영화와는 달리 <봄날은 간다>는 사랑도 변한다는 냉정하리만큼 현실적인 주제를 담고 있지만 너무도 수수하고 애잔해서 인간세를 통달한 분위기마저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영화였다. 허진호는 멜로영화 전문(?!) 감독이지만 그의 영화를 두고 마냥 멜로영화라 부르기엔 어딘가 무례한 감이 있다.  

  <봄날은 간다>(2001)를 본지가 벌써 17년이 지났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백혈병에 걸려 죽은 어린시절 여자친구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일본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유명한 대사가 생각난다. 남자주인공 사쿠는 나레이션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 벌써 17년이나 살고 있다." 

  사쿠의 착찹함 못지않은 기분으로 허진호의 최신작을 봤다.

  중간중간 몇가지 프로젝트에 참가해 영화를 찍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접하지는 못하던 터였다. (아마도 조조로) 롯데시네마에서 대성선배랑 봤던 <외출>(2005)은 영화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배용준의 캐스팅과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질펀한 분위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애와 이별 앞에서 솔직하고 냉정하던 이영애는 너무도 인상적이었지만, 사랑받는 것과 사랑하는 것, 배신을 당하는 것과 배신하는 것 앞에서 무력하고 죄인같던 손예진은 조금도 신선하지 못했다. 연애하다 이별하는 커플이야기가 결혼 후 불륜을 저지르는 이야기로 설정상(관람등급상) 진일보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리고, <행복>(2007)은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를 환멸적으로 섞어놓은 것 같은 영화였다.  "자기 환멸에 대한 묘사는 부족하고, 사랑의 숭고함은 넘치는" 영화라는 허문영의 평 한 문장으로 전체 감상이 백프로 설명된다.(난 왜 이런 문장이 생각나지 않는거지ㅠ.ㅠ) 자기환멸은 영수(황정민)를, 숭고함은 은희(임수정)로 대변될 수 있다.

  영화에는 세 번의 암전이 나온다. 남자주인공 영수의 삶의 방향이 날카로운 선으로 꺽일 때마다 영화는, 연극에서 막을 나누듯 검은 화면(-)을 집어넣지만 도식적일 뿐이다. 서울에서의 영수 - '희망의 집'/은희와 동거 중인 영수 - 은희를 버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영수 - 병세가 악화돼 입원해 있다 은희의 임종을 맞이한 영수/다시 '희망의 집'으로 가는 영수. 첫 번째 암전만 좀 인상적이었다. 빈 검은 화면이 터널을 지나는 버스의 까만 유리창으로 변하는 장면. 그러나 보통 터널을 지날 땐 버스의 조명을 켠다는 생각을 하니 바로 어색하게 느껴졌다..

  은희가 영수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도 공감이 가지 않아 돌려보았을 정도다. 체조할 때 돕고, 라면이랑 술 먹는 것 걸리고, 반가워요 춤추고 등등 에피소드야 자잘하게 이어졌지만 나중에 기억에 남는 장면은 별로 없었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 가장 탁월한 점은 캐스팅이다. 술먹고 담배피고 방탕하게 살아서 간경변에 걸린 영수는 새까만 얼굴의 황정민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숨차거나 감기걸리면 죽을 수도 있지만 늘 긍정적이고 밝으면서도 강한 은희는 뻬쩍말라 하늘거리는 팔다리를 가진 임수정 이미지에 딱이다. 그 밖에 억지로 웃는 거 시키고 행복이란 단어를 달고다니는 다소 요상한 억양의 요양원 원장으로 나온 신신애도 괜찮았다.

# 명대사 1) 은희 (섹스하기 직전)  "영수씨 나 숨차면 죽을 수도 있어요"       2)수연 "그냥 술마시고 얘기해. 너 그런 짓 잘하잖아."

# 인상적인 장면 1) 샛노란 장판 위에 그야말로 시골틱한 털실 옷을 입고 얼굴을 붙이고 누운 영수와 은희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은 장면은 색감과 분위기가 한 장의 일러스트를 생각나게 했다. 2) 수의를 입고 죽어있는 은희의 손발을 묶고 눈, 입 등을 싸는 수시과정을 바라보며 우는 영수. 샷-리버스 샷으로 찍지 않고 영안실 안쪽에서 바깥과 연결된 유리창을 찍은 화면. 영수의 얼굴 위로 장례절차가 비쳤고, 자기가 은희를 죽인 것 같은 황정민의 우는 연기는 훌륭했다. 

# 그 외 생각난 것 1) 요즘 공효진의 배역 스타일. <가족의 탄생>과 <M>은 모두 이 영화처럼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자존심 강한 역이었다. 얼굴 때문인가 이미지가 늘 딱부러지면서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에 머무르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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