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La Double vie de Veronique, The Double Life of Veronique, 1991, 98분
[베로니카]*
우리는 애초에 하나의 몸이었다. 아니, 몸짓이었나?
나는 당신 손등에 잘못 그어진 흉터. 지난밤 꿈에 길게 칼자국 남긴 얼굴 가린 귀신. 당신의 잘 웃지 못하는 왼쪽 입꼬리. 저장도 안하는 참 못나온 쎌카. 당신이 태어날 때 처음 보고 놀란 그 환한 빛처럼, 나도 버튼이 잘못 눌린 복사기에 얼굴이 끼었을 때 태어났어요. 그 환한 빛 말이죠. 내가 어머! 하고 부끄럽게 비명을 질러보았는데요. 그 순간에도 나는 스무개, 서른개로 늘어나고 있더란 말이죠.
우리는 죽은 쥐들과 귀신 들린 인형과 벌레들이 우글대는 베개 등등. 캄캄한 지구에서 신나게 달리기를 하는 중이죠. 시든 꽃을 들고 제일 먼저 당신에게 도착하면 신나서 팔짝팔짝 뛰어올라요. 잘못 도착한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방인이네요. 누군가 우리를 제자리에 돌려놓기 전에 최대한 수줍게 웃으면서 악수 청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어요.
깜찍한 상상들 지겨워요. 우린 그냥 하나의 소문일 뿐인데요 뭘. 내가 나랑 또 나랑 나들이랑 손에 손잡고 귓속말로 내가 누구인지 수소문하는 동안 살비듬이 떨어져나가듯 내가 또 한움큼 세상에 나동그라졌어요. 꽉 잡아. 이런 말 할 새도 없었죠. 스무개 서른개씩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나를 왕창 흘리고 다녔어요.
저기 사납게 쏟아지는 빗발울 보이나요. 저 신나게 튀어오르는 물의 분열증. 창밖을 서성이며 호시탐탐 안을 노려보는 형형색색의 눈동자들. 깨어지고 다시 손잡기놀이 하며 소리 지르고 웃고 울고 발악하는 한바탕 술래잡기. 수없이 얼굴 바꾸며 쏟아지고 지워지는 지구의 상상. 나였는데 다시 보니 당신이었고 또 그였으며 이젠 그녀였는데 알고 보니 다 나더라 아니 당신이더라 하는 물기 어린 말장난.
저기 찌라시 같은 내가 보이네요. 그래요. 우리는 애초부터 과대광고였어요.
* 끄시슈또프 끼에슬롭스끼 감독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올해, 6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에 당선된 작품이다. 마침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배우 엄지원의 추천으로 이 영화가 상영된다길래 보러가려고 예매해뒀었는데 관람 하루 전날 우연히 이 시를 알게 됐다. 이 시의 우울하고 자학적인 느낌보다는 훨씬 관대하고 신비로운 영화였다.
프랑스와 폴란드, 노르웨이가 합작해 만든 35mm 필름의 96분짜리 영화다. 지금이 비록 3월 14일이지만, 밤을 샌 나로서는 3우러 13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는 1996년 3월 13일에 사망했다. 나는 그의 사망 12주년 전야제로 그의 영화를 보았고, 그의 사망일에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 묘하다. 동유럽을 대표하는 모럴리스트이며 실존주의자인 폴란드생이라고 네이버가 설명해준다만, 그것보다도 영상미와 철학적 메시지가 인상깊어서 그의 다른 영화들도 함께 다운받고 있다. 모두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수작이다.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세가지 색-레드/박애>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1991년 깐느 여우주연상과 국제비평가상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그해에 개봉되었었다고 한다. 영화 상영 후 간단한 설명을 해주던 허문영씨는 당시 30살쯤이었다는데,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아름다운 이렌느 야곱에게 매혹되었다고. 당시에 봤던 프린트가 내가 본 프린트란다. 가끔 비내리는 듯한 스크래치와 울렁이는 화면, 촌스럽고 어색한 자막이 관람을 힘들게 했지만, 그말을 들으니 진귀한 골동품을 구경하는 듯 해서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씨네21
기사를 옮겨오면, DVD엔 영화 제작 당시 그와 나눈 대화(53분)가 수록되어 있단다. “충치가 생기면 이가 아프듯 보편적인 감정은 모든 인간이 똑같이 느낀다, 배우가 내면을 충실히 드러낼 때에만 생동감있고 입체적인 인물이 완성된다, 나의 영화는 마음을 열고 봐야 한다” 등 연출과 연기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들려주던 그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주제가 ‘삶을 더욱 신중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의식 혹은 무의식 중에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데,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기 때문에 각자 책임감을 느끼며 행동하라는 뜻이다.
원래 감독은 수십개의 다른 결말을 편집해 극장마다 다르게 상영하려는 착상을 했으나 제작비문제로 거절당했다고 한다. 만약 그 계획이 성사되었다면 영화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되지 않았을까. 뭔가 신화적이고 동화적인 분위기를 원했다는 그의 영화적 느낌과도 일맥상통하는 계획이라 맘에 쏙든다. 언젠가는 그런 시도를 하는 영화도 있지 않을까. 디지털시대이니 말이다.
철저히 계산적으로 찍고, 촬영한 필름을 거의 버리는 경우가 없었다니 그의 천재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무래도 즉흥적인 홍상수식 연출보다 이런 계획적 촬영이 난 더 훌륭하다고 본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오렌지빛인데, 감독은 이런 색감을 얻어내기 위해서 오후 3시부터 해질녁까지만 촬영했다고 한다. 음악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대부분 찬송가 같은 건데,

감독과 주인공 이렌느 야곱

영화 전체를 요약하면서, 영화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였던 인형극 장면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폴란드의 베로니카와 프랑스의 베로니끄는 같은 날 태어나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똑같이 생긴 여성들이다. 오프닝 시퀀스가 인상적인데, 다섯 살 쯤 되어보이는 귀여운 여자 아이가 두 씬에 걸쳐 나온다. 아마도 베로니카와 베로니끄이리라. 처음엔 성탄 전야의 별을 바라보고, 다음 씬에선 새로 난 잎을 만져본다. 우주와 만물의 생의 신비를 발견하는 소녀들. 그들은 비슷한 점이 많다. 지팡이를 짚고가는 꼬부랑 할머니를 창 밖으로 보는 것, 작은 구슬을 가지고 있는 것, 손가락에 흉터가 있는 것, 반지로 눈 아래쪽을 긁는 것 등.
처음엔 폴란드가 배경이다. 소나기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찬송가를 부르는 이렌느 야곱이 등장한다. 환희에 찬 그 모습은 첫 씬부터 관객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녀는 이모집에 갔다가 시민들이 시위 중인 광장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인을 본다. 이후 선망하던 음악회의 소프라노로 뽑히지만 노래를 부르던 도중 (아마도 심장발작으로) 죽게 된다.
자기와 똑같이 생기고 똑같은 삶을 사는 또다른 인물을 도플갱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들은 서로를 보면 죽게된다고 한다. 베로니카도 베로니끄를 보아서일까,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다. 고작 영화시작 29분 뒤다.
그리고 프랑스의 베로니끄에게로 영화는 옮겨진다. 베로니끄는 갑작스런 슬픔을 느낀다. 국경너머 자신의 분신과 같은 이의 죽음을 느낀 사람같이.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인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인형극을 보다가 어떤 감명을 받는데, 그 인형극은 베로니카의 죽음을 연상케하는 것이었다. 이후 인형극사인 알렉상드르 파브리는 베로니끄에게 미스테리한 접근을 하는데, 베로니카가 죽을 때의 음악회 영상을 틀어주고, 자신의 동화에 등장한 소품들-구두끈, 버지니아 담배의 빈 갑 등을 배달시킨다. 결국은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기차역의 한 카페에서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고, 베로니끄는 어떤 이끄림에 그곳을 찾아간다. 파브리는 이틀 이상을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그런 일이 가능한지 알고 싶었단다. 낯선 사람의 신비로운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지... 그저 흔적을 찾아 이끌릴 수 있는지... 독특한 에피소드다. 동화작가는 아마도 그런 운명에 가까운 만남을 원했던 것 같다. 혹은 자신이 믿고 있는 운명을 확인해보고 싶었거나. 알 수 없는 이끌림과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서로 이해하는 사람.
베로니끄는 늘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다고 한다. 어디엔게 동시에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그리고 결국 자신의 사진에 찍힌 베로니카를 보게 된다. 예감이 맞았을 때, 이런 비정상적인 신비로운 일을 접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는 걸까. 베로니끄는 흐느껴우는데 그것은 절망일까 두려움일까 슬픔일까. 혹 삶이란 그렇게 신비롭고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여지는 어떤 것인가. 파브리는 인형은 잘 닳기 때문에 두 개씩 만든다고 한다. 베로니끄는 자기와 닮은 두 인형을 본다. 그리고 파브르가 읽어주는 새 글 '.....의 이중생활'은 베로니끄들의 이야기와 같다.

결국 감독은 베로니끄가 아버지의 집 마당에 있는 나무에 손을 대어보며 신비로운 것들에 대해 느끼는 것으로 영화를 끝맺는다. 삶은 신비로운 것이다.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영화에선 이해할 수 없는 몇 장면이 나온다. 인형극사는 어떤 존재일까? 그는 정말 어떤 신비로움을 상상하는 예술가와 같은 존재일 뿐일까? 그가 기다리고 있떤 카페에서 베로니끄는 불에 탄 자동차를 보는데, 그건 왜일까? 무엇을 의미할까? 그 차는 네 번이나 나온다.영화 속 차들이 모두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베로니끄의 차도 이처럼 생겨서 약간 섬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