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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책은 제국주의에 관한 책이다.그러니까 이 책은 우리들로 하여금 제국주의에 관하여 사색하기를 강요한다.그렇담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아주 넓은 의미에서의 제국주의 역사는 선사시대의 벽화만큼이나 오래도록 거슬러 올라가 그 뿌리를 틀고 있다.최초로 돌도끼를 만든 위대한 선조가.그것을 딱딱한 열매를 꺠기위해 만들었는지.아니면 무적의 멧돼지 어금니와 대항하기 위해서 만들었는지.아니면 어여쁜 마누라를 줄줄이 거느린 옆집 녀석의 대갈통을 겨냥했는지는 알수 없다.그 이유가 무엇이든 적자생존에 법칙에 적응한 인류와 도구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의한 자연지배로이어지고 유한한 자연의 대한 무한한 욕망추구는 제국주의를 향해 갈수밖에 없었다.(난 성악설을 믿는다).우리가 딛고 서있는 이 국가라는 존재또한 제국주의의 안정적인 형태의 결과물이라 볼수 있을것이며.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제국주의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이 책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불분명한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제국주의에 대한 우화이다.아마도 존 쿳시는 자신의 소설에서 공간과 시간을 지워버리므로써 제국주의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그가 바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은.거칠게 요약하자면.밖으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존재할수도 있는 거대한 적을 가상으로 상정함으로써 침략을 정당화하고.안으로는 그 가상의 적을 최대한 물질화시키고 공포화 시킴으로써 자신의 존재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이다.나는 이책이 차라리 분명한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쓰여졌다면 좋아을거라는 생각을 해본다.이 이야기는 분명 어느 한시대의 제국주의의 초상이다.그시대가 돌도끼 시절이든.팍스로마나 이전이든 그 이후든.혹은 중세말의 자본가의 등장이든.산업혁명이후이든.세계대전이든 베트남전쟁이든 중동전쟁이든 어느 한구석과 닮아있다.이건 본질도 아니고.보편성과도 무관하다.제국주의는 에셔의 그림에서 무한히 자기증식하는 도마뱀처럼 때로는 조화롭게 통일하며 때로는 교활하게 산재하며 세계속으로 스며든다.어느 시절 어느 공간에서도 제국주의는 같은모습을 한적이 없다.제국주의는 모든 사회와 문화에 최첨단에 있는 얼리어탭터이며 그 후방을 든든히 지키는 힘쎈 파수꾼이다.이제 야만인을 기다리는 멍청한 제국주위따위는 없다.존 쿳시는 거대한 도마뱀의 꼬리를 잘라 그 단면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책이 이룬 문학적성취나 존 쿳시의 지식인으로써의 깊은 성찰에 딴지를 걸거나 혀를 내밀며 폄하하고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어쩌면 내가 이책의 핵심을 잘못짚었을수도 있다.존 쿠시는 단지 제국주의라는 기다란 장대를 통해 야만인여자와의 애증어린 이야기를 성찰하므로써 인간과 인간사이의 깊은 심연의 바다를 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문명인 간의 소통도 불가능한 이시대에 이책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것이냐? 하는.......모르겠다.이책이 이제 갓 세상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이들에게 훌륭한 초석이 되어줄지도....그런 사람이 내 주위에 있다면 난 이책대신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선물하거나.레닌의 "제국주의론"을 손에 쥐어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