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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special 앙겔라 메르켈 ㅣ who? special
오영석 지음, 툰쟁이 그림, 경기초등사회과교육연구회 감수 / 다산어린이 / 2018년 2월
평점 :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는 앙겔라 메르켈에 대한 관심이 무척 많을거에요. 여성 지도자로서 성공, 분단국의 통일, 서로 다른 이념과 가치관을 가진 당과의 화합, 원전 발전소 폐기 등 우리나라와 공통점이 많은 이슈들을 지혜롭게 해결한 그녀의 리더십이 부러울 뿐입니다. 과연 그의 인생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길래 이처럼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2006년부터 2017년까지 12년동안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11번이나 선정되었는지 아이와 함께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독일은 되고 우리나라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일지요?
1954년 서독 함부르크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인 카스너와 헤를린트 사이에 태어난 앙겔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동, 서독으로 나뉜 후 동독에서 종교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수 없었던 목회자인 아버지 카스너와 함께 동독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공산주의 사회로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동독에서의 카스너의 사역은 늘 어려움에 부딪히고 장애아들이 다니던 학교가 폐교되자 장애아들을 교회가 돌보게 되면서 카스너의 교회는 장애아들로 가득차게 되지요. 카스너는 설교를 하고, 장애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다양한 수업을 시작하고, 수업이 끝난 장애아들은 부모님들이 데려러 오기 전까지 교회에서 놀면서 앙겔라는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됩니다. 장애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위기에서 자란 앙겔라는 사람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시선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걷어 내게 됩니다.
동독 정부 정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사회주의 안에서 사역을 하는 카스너에게 비판이 따르고 목회일에 매진하느라 집에 들어오는 일이 점점 줄어든 카스너는 앙겔라에게 점점 엄격해집니다. 아버지의 정을 그리워하는 앙겔라에게 어머니는 대화를 자주 나누며 안정을 찾도록 도와주고 점차 앙겔라는 부모님께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독립적인 성향을 띠게 되지요.
동독과 서독 국경을 넘는 일은 어려웠지만 편지 교류는 할 수 있었기에 어머니는 앙겔라를 위해 서독에 있는 친정에 편지를 보내며 교류를 했어요. 앙겔라는 외할머니가 보낸 서독식 옷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고 아버지의 정을 모르고 자란 대신 독립심을 무한히 키운 덕에 방학이 되면 무엇을 할지 혼자 계획하고 혼자 실행에 옮기곤 했어요. 열세 살의 앙겔라는 혼자 동베를린에 있는 할머니를 만나러 가고, 매일 혼자 외출을 하며 베를린을 혼자서 구석구석 탐사하듯이 돌아다녔어요. 러시아어 경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아버지의 직업을 숨긴 앙겔라는 동독 대표로 선발되어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러시아어 대회에 참가하고 강대국 소련의 위상을 받아들이고 동경하게 되지만 체코 프라하에서의 대규모 시위를 진압하는 소련의 모습을 보며 사회주의 국가의 맹주였던 소련이 자신의 뜻에 반하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동독인이지만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았던 앙겔라의 마음 속에 사회주의 부조리와 자유에 대한 갈망이 동시에 싹트게 되지요.
고등학교 졸업반,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베트남 인민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문화 행사를 기획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앙겔라는 문화 행사의 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무엇이든 혼자 결정하고 계획하면서 독립심이 남달랐던 앙겔라는 어느 새 친구들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고, 우리만의 추억이 담긴 행사를 친구들과 함께 만들려는 시도는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로 지적되어 강력한 처벌을 받을 위기에 처하지만 부모님들의 탄원서 제출로 가벼운 징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카를 마르크스 대학 물리학과에 진학한 앙겔라는 1975년 서독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겠다는 동독 정부의 발표에 학생 시위에도 참여하지만 시위가 진압을 당하고 실패하자 결국 동독의 사회에 순응하는 길을 택하게 되지요.
23세의 나이에 결혼한 앙겔라는 4년만에 이혼하고 동독 학술아카데미 산하 물리화학연구소에서 일하게 됩니다. 12년 동안 연구에 매진하여 선임연구원이 된 앙겔라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토로이카 정책에 따른 변화에 동독과 서독사이에 1986년 문화 협정이 체결되고 동독 곳곳에서 서독과의 통일을 촉구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동독의 지도자 크렌츠는 서독 방문을 조만간 자유롭게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동독인들은 서독과의 교류를 막고 있던 베를린 장벽을 부수기 시작하는 변화에도 들뜨지 않고 여전히 신중했지만 폴란드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독일의 통일에 대하여 통일 독일에 관심을 가지고 대비하기 위해 정보를 찾아나섭니다. 민주변혁의 전당대회를 보러 간 앙겔라는 통일 독일의 시대를 위해 자신도 당과 함께 하기로 결심하고 그의 유능하고 신속한 일처리 능력을 인정받아 민주변혁의 대변인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됩니다. 개인의 삶을 추구하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한 민주변혁 대변인의 일을 시작으로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평범한 연구원이었던 그는 정치에 뛰어들게 되지만, 1990년 동독의 마지막 선거에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감과 달리 패배의 좌절에 빠지게 되지요.
앙겔라는 민주변혁의 참패 후 뜻밖에 정부 요직에 진출한 기회를 얻게 되고 정부 부대변인의 자격으로 내각회의를 지켜보게 되지요. 서독의 주도로 2 + 4 조약이 체결된 후 통일은 급물살을 띄게 되고 독일 통일을 발표하는 그 역사적인 순간 앙겔라 메르켈이 있게 됩니다. 독일 전체를 대상으로 한 선거가 시작되고 서독이 주도한 통일이었고 동독 지역에도 서독 출신의 정치인이 후보로 나오기 시작하자 동독을 아는 사람이 동독에서 당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앙겔라는 동독의 슈트랄쥔트를겐그림멘 선거구에 출마하고 당선되어 의원이 되고 그를 눈여겨 본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에 의해 여성 청소년 장관에 임명되지요. 앙겔라는 여성 청소년부 기강을 잡고 낙태 문제, 취업에 있어 양성평등법, 3세 이상의 유치원 교육 보장, 청소년 보호법, 여성실업 등 많은 문제를 해결하며 일약 정치권의 샛별로 떠오릅니다.

1994년 환경부 장관이 된 앙겔라는 2주간의 난상토론 끝에 유엔 기후 정상 회의에서 온실가스를 줄여야 한다는 베를린 협약을 채택하고 이 일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며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당 사무총장까지 올라간 앙겔라는 자신의 은인인 콜 비자금 비리를 옹호하지 않고 비판하며 옳고 그름의 문제를 단호히 하고 그의 행동은 독일 국민의 시각을 바꾸어 2004년 4월 기민당의 당수가 되고 2005년 9월 독일 총선에서 승리하며 독일 최초 여성 총리에 오릅니다. 야당을 포용하는 대연정으로 총리직을 시작하고 16개의 장관직 중 6개를 야당에 맡기며 국론을 통일하지요.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금융 위기에 앙겔라는 유럽 금융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회의를 주도하고 독일을 유로존의 리더로 만듭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쓰나미에 의한 원자력 발전소 방사능 유출 사고에 원자력 발전을 옹호하던 그는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할 것을 선언하고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 줄을 서서 계산하는 등 누구보다 친근한 이웃이기도 한 그는 독일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연거푸 세 번 총리에 당선되지요. 또한 2015년 3월, 일본을 방문해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따금하게 질책하는 올바른 역사관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여야를 구분하지 않고 좋은 정책은 모두 수용하며, 안전을 위해 자신이 옹호하던 의견도 내려놓고 원전을 모두 없애겠다고 약속하며, 지난 과거의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일본을 꾸짖는 올바른 역사관을 지닌 앙겔라의 일생을 살펴보며 오늘 국민을 대변한다고 말만 앞세우는 정치인들이 한번쯤은 앙겔라의 일생을 통해 반성과 새로운 다짐을 해봐야하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생기는군요. 우리 아이에게도 항상 나만이 옳고 남은 다른게 아닌 틀리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모든 것에 유연한 대처를 하는 사고를 하도록 가르치고 싶네요. 그의 일생을 따라가보면서 오늘날 우리나라가 대처한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가 풀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풀려고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드는 현실이 슬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