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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한국사 나라를 빛낸 청백리 ㅣ Why? 한국사 37
박성일 글.그림, 문철영 감수 / 예림당 / 201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받아 든 큰 아이가 청백리가 무엇인지 물어봅니다. 막연하게나마 청렴결백한 관리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설명하면서 청백리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 조상들중 청백리를 본받을만한 분들은 누가 있는지 저 또한 궁금해지네요.
청백리란 넓게는 청렴결백한 관리, 좁게는 조선 시대에 국가가 뽑아 표창한 청렴하고 근면한 관리 및 그 제도를 뜻한다고 하네요. 중국 한나라에서 유래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군요. 앞선 정권의 적폐와 그와 관련된 사리사욕을 탐한 사람들의 비참한 최후를 보면서 청백리 정신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구성한 사람이면 누구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정신이며 나부터 행동을 바르게 해야 사회가 발전한다는 마음가짐이 왜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 최원직이 남긴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견금여석의 정신을 실천한 최영 장군은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를 향하던중 태풍을 만나 잠시 쉬어가게 된 후풍도에서 어려운 백성들을 살피는 것 또한 관리의 의무라 생각하고 백성들에게 그물 만드는 법과 고기 잡는 법 등을 알려 주어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조카사위의 판결도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사헌부에서 판결하도록 하고,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되는 것도 거절한 강직한 신하였어요. 요동 정벌을 찬성한 죄로 참형에 처해지는 상황에서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지 않았으니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거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했던 그는 진정한 고려의 충신이었어요.
가난한 살림속에서도 녹봉을 받은 날 아이들에게 붓과 음식을 사서 나누어준 유관은 청렴하다는 소문을 듣고 들른 태종이 밤사이 몰래 울타리를 세워줄 정도로 낡은 집에서 살았어요. 비 새는 방에서 우산을 쓸 정도로 가난하면서도 남에게 베푸는 정신을 실천하였고, 임금 앞에서도 당당하게 생각을 말하는 올곧음으로 태종의 사랑을 받았고, 수레나 말을 타지 않고 몸소 호미를 들고 직접 밭을 가꿀 정도로 소탈한 삶을 살았어요.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든 제자로 받아들여 많은 사람들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청렴하게 살라는 말을 남기고 검소하게 장례를 치를 것을 당부하고 세상을 떠났어요. 그의 죽음에 세종은 비 오는 날 흰옷으로 갈아입은 채 백관을 거느리고 나아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의식을 치렀다고 하니 얼마나 그를 총애했는지 알 수 있어요.
18년이나 영의정을 지내며 조선 초기에 나라의 기틀을 다진 조선 최고의 명재상 황희는 자기주장만 내세우며 다투기보다는 역지사지의 자세로 서로의 입장을 생각하는 마음을 실천했고,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공물을 줄이고 관아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며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하였어요. 백성들은 그의 정성과 고마움을 기억하고자 황희가 쉬던 장소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소공대라고 지었어요. 딸이 혼수를 마련할 돈이 없어 임금이 도와주기까지 하고 하인도 양반과 마찬가지로 하늘이 낸 사람이라며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존중하려고 애쓴 그는 조선의 최고 명재상이자 청백리로 손꼽히기에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려 때부터 한라산 꼭대기의 백록담 북쪽에 제단을 꾸려 지낸 한라산 산신제는 백성들이 산을 오르다가 얼어 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등 사고가 잦았어요. 제주 목사 이약동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단을 한라산 중턱으로 옮겨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줄여주었지요. 또한 백성들을 생각해 사냥을 금지했고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고 선물을 주려 하자 거절했어요. 제주를 떠나는 날 관아의 물건은 모두 두고 간다며 말채찍도 제주 관아에 걸어 두고 떠났고 이 말채찍은 청백리의 상징처럼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고 세월이 흘러 채찍이 닿아 없어지자, 제주 백성들은 바위에 채찍 모양을 새기고 '괘편암'이라고 불렀다네요.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인 서거정이 그를 기려 칭송하는 시를 짓고 그가 세상을 떠나가 성종이 크게 슬퍼하고 조회를 멈추었다고 하니 그의 청렴함을 우리 후손들이 배워 실천해야겠어요.
불교를 멀리하고 언로을 열고 사치하지 말라고 충언을 한 허종의 담대함에 감탄한 세조는 그를 신임하고, 허종은 상중에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아 승리를 이끌었으며, 거만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원접사로 그의 능력을 명나라 사신에게까지 인정받았어요. 동생 허침은 연산군의 스승으로 연산군을 바른길로 이끌고자 최선을 다했고 억울하게 연산군의 눈 밖에 난 신하들을 구해주었어요. 사사로운 부탁을 하는 사람들을 물리치기 위해 하인에게 대문을 지키게 한 허종, 연산군에게 바른말을 아끼지 않았던 허침 두 형제는 모두 청백리에 정승까지 지낸 대단한 형제였어요.
과거에 세번이나 낙방한 양관은 무과에 합격하고 낮은 벼슬자리에도 소탈하고 청렴하며 부하들과 허물없이 지냈어요. 덕천 군수시절엔 신분에 상관없이 항상 법과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을 판결했고 고을 세력가들이 양관이 뇌물을 받는다고 모함하는 상소에 나루터에서 어사의 짐수색까지 받았지만 상소는 누명을 씌우려는 음모로 밝혀지고 성종은 나루터에서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지방 수령들을 임명할 때 꼭 이 그림을 보여 주며 양관을 본받으라 타일렀다는군요.

간관으로서 책임을 다하다가 연산군의 화를 사 유배를 간 이연보는 중종 반정으로 풀려나 조정으로 돌아왔어요. 부모님을 곁에서 모시기 위해 스스로 외직으로 나간 그는 부정한 관리들을 소주처럼 독하고 매섭게 벌했으며 지방관으로 가는 곳마다 공사를 엄격히 구별하고 백성을 잘 보살펴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았어요. 고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여는 자리엔 때때옷을 입고 어르신을 공경하는 마음의 진실함을 보여주었고 지극한 효심을 인정받아 세상을 떠난 뒤 효절공이란 시호를 얻기까지 했어요. 40년 넘게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늘 청렴하고 검소하게 산 청백리인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자연을 즐기며 많은 시를 지었답니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직접 약을 달이고 대변의 맛을 보며 정성껏 간호한 박수량은 암행어사를 통해 청렴함을 확인한 명종이 집을 하사하기도 하고, 아들이 한성에 집을 지으려 하자 꾸짖었으며, 이기의 비리를 조사하라는 명종의 명을 받들어 상소를 올려 임구령을 파직하고 이기의 죄를 밝혀냈어요.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들은 박수량을 '권력을 탐하지 않는 청백한 명신'이라고 평가했어요. 박수량이 세상을 떠난 뒤 일꾼을 쓸 돈이 없어 가족들이 고향까지 상여를 메고 갔다는 소식을 듣고 명종은 부의를 내려 장사를 치르게 했으며 평소 청렴한 박수량을 깊이 아끼던 마음으로 비문없는 백비를 세우게 했어요. 고작 몇 마디 말로 그의 진실되고 훌륭한 삶을 담기는 어려웠던 거에요. 그는 법도에 벗어난 일은 절대 하지 않았고, 40년 가까이 벼슬을 하며 재상까지 지냈지만 집 한 칸도 마련하지 않은 올곧은 관리였어요.
우의정 김안로가 자신의 아들을 전랑에 앉히려고 권력을 이용하려고 하자 이를 간과하지 않은 홍섬은 김안로와 허항의 모함으로 국문을 받고 유배를 갑니다. 판서에 올라 초헌을 타고 벽제 소리를 울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버지 홍언필의 가르침 덕분에 몸가짐을 조심하고 권력을 이용하지 않는 청렴한 관리가 되었지요. 손님이 찾아와도 옷차림이 허름해 못 알아볼 정도였던 홍섬은 조정회의에 아버지 홍언필과 함께 참석할 때 곡좌의 예를 갖추었고 어머니의 시묘를 모실때 그를 걱정한 임금이 고기를 내렸으나 채식만 하며 시묘를 마치고 몸이 크게 약해져 82세에 세상을 떠났어요. 조선왕조실록에 홍섬을 '조정에서 50년이나 벼슬을 하였는데 청렴하고 신중한 자세로 나랏일을 돌봐 칭송받을 만한 점이 많았다.'고 평가한 것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청백리 정신을 잘 실천했는지 알 수가 있겠어요.
명종때 청백리로 뽑히고 표리까지 받은 김취문은 청렴하고 백성을 위하는 올곧은 마음이 도적까지 감동시킬 정도였어요. 나주 목사로 재임시 승려 보우의 유배길에 윤원형의 부탁에도 법대로 고을을 떠나는 순간까지 옥에 가둘 정도로 됨됨이가 뛰어났어요.
역사상식에서는 청백리는 어떻게 뽑히고, 청백리 제도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대표적인 청백리는 누구인지 살펴볼 수 있었어요. 목민심서에도 소개될 정도로 모범적인 관리였던 이명준, 이제신 청백리 부자 이야기, 장님 행세로 세조의 부름에도 절개를 지킨 기건, 부정과 뇌물을 끔찍이 싫어한 장필무 이야기, 헌옷을 10년 입은 오억령, 비단 방석을 불태운 이시백 이야기를 통해 조선 청백리의 꿋꿋한 기상과 절개를 본받을 수 있었고, 훌륭한 관리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책을 다 읽고 난 후 알맹이 문제풀이의 새록새록 떠올려요를 통해 나라를 빛낸 청백리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었고, 차근차근 확인해요와 꼼꼼하게 풀어봐요를 통해 다양한 문제와 서술형 문제를 답해보면서 책 속 내용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어요.
아이와 함께 이 책을 읽으며 남의 것을 사사로이 욕심내지 않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고,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청백리 정신은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보다는 사회와 나라을 위해 일하는 정신으로 이어져 사회가 발전하는 기틀이 됨을 알 수 있었어요. 지난 정권의 적폐와 부조리, 비리, 개인의 욕심을 챙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과거의 청백리 정신이 오늘날에도 얼마나 필요한 정신이며 계승하고 본받고 실천해야 하는 덕목임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우리나라에도 더 많은 청백리가 나와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지길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