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진흥왕 Who 한국사 삼국 시대
툰쟁이 그림, 최향숙 글, 최인수 정보글, 경기초등사회과교육연구회.방민호 감수 / 다산어린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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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삼국시대에 지역적으로 동남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였던, 중국 문명을 가장 늦게 받아들이고 전성기를 가장 늦게 이루었던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것은 아마도 진흥왕의 초석 다지기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나이에 왕에 올라 귀족들의 견제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위해 인생 전체를 걸었던 그의 일생을 아이와 함께 살펴보면서 통일신라는 한순간에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네요. 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 5세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전성기처럼 6세기 달라진 신라를 이끌었던 진흥왕과 함께 한 신라의 전성기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질수 있었어요.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신라시대, 법흥왕의 외손자인 삼맥종은 골품제도 덕분에 태자가 될 수 있었어요. 어릴적부터 강력한 왕권으로 신라를 이끌어야한다는 꿈을 키워준 어머니 지소 부인덕에 놀이조차도 지지 않으려는 승부욕을 보였고 할아버지를 따라 법회에 자주 참여하며 불교를 공인한 이유가 왕으로 태어나고 싶은 귀족들이 왕에게 충성을 다하면 왕의 힘은 더욱 강해질거라는 의도라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도 하지요. 평생의 조언자가 될 이사부를 스승으로 모시며 군사 교육을 배우고  왕의 역할에 대해 하나씩 깨달을 수 있었어요. 나랏일을 의논하는 자리에 항상 같이 한 삼맥종은 왕이라고 해서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고 나랏일이 시행되기 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으고, 설득하는 과정이 있어야 함을 깨달으며 내용 하나하나를 마음에 새겨둡니다. 540년 나라의 기반을 완성한 신라 제23대 법흥왕이 세상을 떠나며 태자인 삼맥종에게 신라를 최고의 나라로 만들어야한다는 유지를 남깁니다.

 

진흥황이 신라의 전성기를 이루기 전 제17대 내물 마립간은 신라의 기반을 닦았고 제22대 지증왕은 신라의 체계를 잡았어요.

 

일곱살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으로 즉위한 삼맥종은 지소 부인의 수렴청정의 도움을 받습니다. 어린 삼맥종을 얕보고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려는 귀족들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지요. 지소 태후로부터 왕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우고 이사부와 함께 본격적으로 왕권 강화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정치는 칼과 창이 아닌 명분과 논리로 싸우는 전쟁임을 알아차린 진흥왕은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임명하고 한반도 남동쪽 한 귀퉁이의 작은 나라인 신라가 강대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강을 정복하는 것뿐임을 깨닫게 되지요.

 

지증왕의 노력으로 나라의 체계가 잡힌 신라는 제23대 법흥왕에 의해 발전을 가져왔어요. 법흥왕은 병부를 설립하고 율령을 반포하였고, 신분에 다른 관리들의 복식을 지정하고 금관가야를 정벌하여 영토 확장에 힘쓰고, 불교를 공인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왕이 곧 부처'라는 호국 불교 사상을 심어 주어 왕권을 강화했어요.

 

법흥왕이 신라에 심은 불교는 진흥왕 때에 그 싹을 틔웠어요. 신라가 어떻게 건국되었고, 이 자리에까지 왔는지를 기록해 펴내 그 책이 널리 익히면 백성들은 왕실을 존경하게 되고, 선대왕의 업적과 실정을 참고해 나랏일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 진흥왕은 거칠부를 통해 신라의 역사을 담은 책 <<국사>>를 편찬하여 신라인의 자긍심을 심어주었어요. 신라의 귀족 자제들이 청소년 때부터 함께 모여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효와 충을 배우고 산과 들을 다니며 무예를 익히는 등 나라에 필요한 인재로 성장하게 해주는 화랑도에 진흥왕도 함께 하며 그들과 우정을 쌓아나가지요. 고구려가 백제를 기습하자 백제가 신라에 지원병을 요청하고 지원병 요청을 반대하는 귀족들을 설득시키고 화랑들과 어울리며 자기 군대를 키워나가는 모습을 보며 점점 귀족들도 진흥왕을 온전한 왕으로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처음 불교가 들어왔을 때 신라 귀족들은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 교리를 부담스러워했지만, 윤회 사상을 통해 자신의 신분에 정당성을 실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왕족과 귀족들은 자신들이 전생에 쌓은 선행 때문에 현생에 복을 누리고 있다며 오히려 불교를 반기게 되었어요. 층마다 신라를 괴롭히는 외적을 정하여 물리치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쌓은 탑인 황룡사 9층탑을 보면 불교의 나라 신라의 면모를 들여다 볼 수 있어요.

 

진흥왕 11년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 전쟁이 한창일 때, 지쳐있는 두 나라를 기습하여 금현성과 도살성을 동시에 점령한 진흥왕에게 지소 태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진흥왕은 자신의 통치 이념을 밝히는 연호를 '개국'으로 정합니다.  친정을 시작한 진흥왕은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새로 얻은 영토를 둘러보고자 순행에 나서고, 순행에서 돌아와 고구려 제24대 양원왕에게 밀서를 보내 백제를 견제하지 않도록 안심시키고 김무력 장군으로 하여금 한성을 기습하여 한강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제 한강을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쉬워졌고 한강 주변의 평야 지대를 통해 막대한 곡식과 백성을 얻게 되었어요.

아무리 위대한 진흥왕이라 할지라도 신라의 전성기를 혼자의 힘으로는 이루어 낼 수 없었을 거에요. 진흥왕을 대신해 수렴청정한 지소 태후, 다방면에서 진흥왕을 보살핀 이사부, 안정된 정치를 이끈 거칠부, 백제의 공격에 맞선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 김무력,  고구려 왕산악, 조선의 박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의 반열에 오른 가야금을 만든 우륵까지 많은 조력자들이 있었어요.  

 

한성을 잃은 백제 제26대 성왕은 분노했고, 이듬해인 554년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합니다. 백제군이 도살성, 관산성을 동시에 공격해 함락해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진흥왕은 성왕이 복수를 위해 관산성을 기점으로 금성으로 돌진한 뒤 자신의 목을 베려한다는 의도를 간파하고 김무력 장군에게 관산성을 되찾으라는 서찰을 내립니다. 관산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매복하고 백제 성왕의 무리가 오기만을 기다린 김무력 장군은 성왕의 목숨을 거두고, 왕을 잃고 전의를 상실한 백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지요. 북한산에 올라 순수비를 세워 한강 유역이 신라의 땅임을 알리고 어디로든 뻗어 나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했으니 지금부터 신라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릴것을 맹세합니다.

 

일본은 삼국 중 특히 백제와 가깝게 지내 일본의 문화 발전에 백제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지만 고구려는 승려 혜자와 담징이 불교와 유학 등을 전파했고, 신라는 배와 도자기 만드는 기술, 둑 쌓는 기술 등을 알려 주었어요., 이렇듯 활발하게 삼국의 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은 '아스카 문화'를 완성합니다.

 

신라는 왕을 잃고 혼란에 빠진 백제와 유목 민족과의 전투에 바쁜 고구려의 상황을 이용해 북쪽으로 영토를 넓혔어요. 진흥왕은 나라가 커진 만큼 이를 잘 통치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 왕의 보살핌이 전역에 퍼지도록 했어요. 대가야의 도설지가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이사부에게 대가야의 정벌을 부탁합니다. 신하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한 진흥왕의 결단으로 대가야는 신라에 무릎을 꿇고 말지요. 포로로 잡힌 가야 백성들을 풀어 주고 토지를 나눠 주며 그들의 마음을 다독인 진흥왕은 가야 지방부터 시작하여 옛 고구려 영토였던 황초령까지 오랜 순행을 하다 병이 나기도 하지만 순행을 통해 정복지의 백성들까지 끌어안는 모습을 보이며 스스로 진정한 신라의 백성임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어요. 신라 영토중 최북단인 마운령까지 들르며 무사히 순행을 마친 진흥왕은 자신이 다녀간 사실과 그곳이 신라의 영토임을 알리기 위해 북한산 순수비를 세웠듯 황초령과 마운령에도 순수비를 세웠어요. 그리고 자신이 이룬 업적을 평가하는 동시에 신라을 더욱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를 담아 연호를 '태창'이라 새로 지었습니다.

 

신라의 발전과 통일에 큰 역할을 한 화랑도는 삼국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고 대표적인 화랑으로 사다함, 관창, 김유신, 태종 무열왕 김춘추 등이 있어요. 하지만 삼국 통일 후 화랑 출신인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키고, 제31대 신문왕이 난을 진압한 뒤 살펴보니 많은 화랑이 김흠돌의 편을 들어 반란에 참여한것을 알고 해체해 버립니다.

 

바쁜 중에도 틈틈이 잠행에 나서 백성의 삶을 살피던 진흥왕은 나라의 발전만을 생각했던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백성들이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마음, 영토를 넓히겠다는 마음, 그리하여 오래도록 기억될 왕이 되겠다는 마음이 자신을 괴롭히는 집착임을 깨닫게 되지요. 그 이후 진흥왕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불필요한 전투를 삼가고 백제를 구제한다는 의미를 담아 연호를 '홍제'라 바꾸고 백성의 삶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태자 동륜의 죽음을 겪으며 흥륜사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모든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는 왕이야말로 부처님이 바라는 모습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진흥왕은 부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왕으로서의 화려하고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흥륜사에서 생활하며 승려들과 똑같이 참선과 예불을 올리고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나랏일과 백성을 돌봄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어요. 576년 황룡사의 불상이 눈물을 흘리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진흥왕은 새벽 예불을 올리던 모습 그대로 세상을 떠납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지만 부단한 노력 끝에 어린 왕이라고 무시하는 귀족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고, 불교를 통해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정복 전쟁을 통해 신라 건국 이래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화랑도를 통해 키워낸 인재들로 하여금 삼국 통일에 이바지하게 했던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 신라의 삼국 통일은 바로 진흥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진흥왕의 삶과 업적을 통해 신라 전성기와 영토 확장에 대해 공부한 아이와 함께 어린이 역사 탐색을 살펴봅니다.

한국사 퀴즈와 함께 진흥왕에 대한 문제를 풀어보고​ 당시 상황을 논술로 정리하며 깊이 생각해보고 체험학습을 통해 이번 5월 아이와 함께 했던 경주 여행을 되새겨볼 수 있었어요. 인물 상관도를 통해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어서 복잡한 가계도를 이해할 수 있었고, 한국사. 세계사 연표를 통해 역사적 사건을 정리해 볼 수 있었어요.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진흥왕을 공부하며 역사적 사건은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서로 연결되는 무수히 많은 사건과 인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 신라의 삼국 통일은 바로 진흥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 또한 다시 한번 알게 되는 시간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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