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 닮고 싶은 창의융합 인재 10
심재규 지음, 김현정 그림, 와이즈만 영재교육연구소 감수, 손영운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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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타임>지는 1999년에 지난 100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아인슈타인을 선정했어요. 그의 상대성 이론이 20세기 많은 과학 기술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며, 그의 이론으로 탄생한 원자폭탄에 의한 비극을 경험한 아인슈타인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고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지식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문제에 대해 여러 사람과 토론하면서 키워진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위대한 이론을 완성한 그를 살펴보며 암기식 교육에 몰두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과 우리 교육의 현실에 대하여 반성하는 기회를 가져보게 됩니다.

 

나침반으로 시작된 그의  꿈이 제1차, 2차 대전중 유대인이라는 차별속에서도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고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중 그의 이론이 만들어 낸 원자폭탄의 폐해를 바라보며 핵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아인슈타인의 일생을 한눈으로 살펴보며 일제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의 어려움속에 있었던 우리나라의 아픔이 가슴 아파오는군요.

 

어린시절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내기 일쑤였고, 세 살이 되어도 말을 거의 하지 않는 등 부모님의 걱정거리였어요. 여섯 살이 되자 어머니는 화를 잘 내는 아인슈타인의 마음이 차분해지길 바라며 바이올린을 가르쳤지만 매일 똑같은 것을 반복해야 하는 게 지겨운 그는 바이올린 레슨을 그만 두었고, 말을 능숙하게 하지 못해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어요. 온종일 혼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혼자 생각에 빠져 있곤 하던 아인슈타인은 어머니의 모차르트 소나타 피아노 연주를 듣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스스로 연습하기 시작하며 음악이 평생의 친구가 되었고, 열병에 누워 있을때 아버지가 선물해준 나침반의 움직임에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을 하고 평생 상대성 이론을 연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발전기를 만드는 발명가였던 야코프 삼촌을 통해 수학의 이치와 진리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알기 시작했고, 21살의 의대생 막스 탈무트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 과학과 이론, 수학, 철학 등을 공부하고 여러 관련 책을 읽으며 인문학적 사고방식과 남다른 창의성까지 기를 수 있었어요. 이것은 나중에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는 데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어요.
초등학교 3년동안 유대인이라는 따돌림을 받고 수학과 과학을 제외한 다른 수업 시간에 늘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이 학생은 장차 어떤 일을 해도 성공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됨.'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어머니의 격려로 무사히 마칠수 있었어요. 독일의 중학교, 고등학교을 합친 과정인 김나지움에 입학하였지만 딱딱하고 엄격한 분위기, 자유로운 토론보다는 암기만을 강요하는 방식에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던 아인슈타인은 퇴학 처분을 받고 사업 실패로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 있는 가족 품으로 돌아갑니다.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취리히 공과대학 입학시험을 치렀지만 수학, 물리학의 최고 점수에도 식물학과 프랑스 어의 저조한 성적으로 입학시험에 떨어졌어요.
아인슈타인의 수학과 물리학 점수에 매우 인상 깊었던 취리히 공과대학 베버 교수의 추천으로 아라우 주립학교에서 1년간 부족한 과목을 공부하게 된 아인슈타인은 천국같은 1년의 시간을 보내며 인류의 과학사에 한 획을 긋는 매우 중요한 상상을 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아라우 주립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인슈타인은 빛에 대해 여러 상상을 하길 좋아했어요. 호기심은 상상으로 발전했고, 상상은 다시 질문으로 이어지고 질문은 더욱 발전해 또 다른 질문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요. 마침내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한 아인슈타인은 기대했던 베버 교수의 물리학 수업이 최신 과학 이론을 다루지 않자 전자기파 등 빛과 관련된 내용을 혼자 공부하게 되고 실험도 교수가 가르쳐 준 방법 외에 자신이 생각한 방법으로 실험을 진행했어요.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아인슈타인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교수들은 졸업후 그를 조교 신청에도 탈락하게 합니다.
친구 그로스만의 아버지 소개로 스위스 베른의 특허청에 근무하게 된 아인슈타인은 하비히트, 소로빈과 일주일에 한 번씩 '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모임을 통해 책을 읽고 그 내용에 대해 토론을 하며 신선한 자극을 받고 과학과 물리학뿐만 아니라 인간 세계의 근본 원리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어요.
아버지의 죽음, 대학 친구 밀레바와의 결혼 등 인생의 슬픔과 기쁨을 모두 경험하며 바쁘게 지내던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빛에 대해 품었던 오랜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에 열중하게 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빛' 외에도 '시간과 공간'이었어요. 그의 '생각하는 힘', '상상의 힘'은 1905년 9월 25일 '특수 상대성 이론'이라는 이론을 논문에 발표했어요. 시간과 공간이 관찰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는 이론으로 이 논문 제출후에도 새로운 생각을 하고 질문하며 E = mc 2 이라는 방정식도 발표했어요. 그의 논문에 과학자들의 칭찬도 반론도 없었지만 세계 최고의 대학인 베를린 대학의 유명 물리학 교수 막스 플랑크 편지를 통해 사람들은 특수 상대성 이론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속도가 변하는 경우가 훨씬 많기 대문에 속도가 변하는 일반적인 경우까지 설명할 수 잇는 이론을 발견하고 싶었어요.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 불렀어요.
아들러의 양보로 취리히 공과대학의 교수가 된 아인슈타인은 더 많은 연구 시간을 가지기 위해 프라하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마침내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방정식을 만드는데 성공했어요. 그리고 1911년 6월, 자신이 만든 방정식을 이용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어요. 태양의 중력 때문에 태양 근처를 지나는 빛이 휘어질거라고 예측했어요.

 

1911년 완성했다고 생각했던 방정식에는 많은 오류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학적인 지식을 총동원했음에도 커다란 벽에 부딪힌 거에요. 1912년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다시 교수로 돌아와 달라는 제의가 들어오자 자신의 일반 상대성 이론 연구를 도와줄 든든한 친구 수학과 교수 마르셀 그로스만이 있었기에 수락했어요. 아인슈타인이 알고 있는 수학 지식으로는 휘어진 공간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어요. 그로스만은 아인슈타인에게 휘어진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한 수학 이론인 '리만 기하학'을 알려 주었고 이때부터 새로운 수학 이론을 맹렬히 공부했어요.
자신의 특수 상대성 이론을 처음 알아보고 편지를 보냈던 물리학자인 막스 플랑크 교수와 화학자 발터 네른스트는 과학계에서 명성이 날로 높아지는 아인슈타인을 독일로 데려가려고 찾아왔어요. 1914년 1월 베를린 대학교로 돌아온 아인슈타인은 드디어 1916년 11월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초>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어요. 이 논문에서 중력은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이 아니라, 공간이 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공간이 휘기 때문에 물체의 운동이 일어난다고 설명했어요. 또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는 방정식을 이용해서 태양 근처에서 별빛이 휘어지는 각도를 다시 계산했어요. 예전에 계산했을때는 0.83초였지만 이번에 완성한 방정식으로 계산해 보니 1.7초가 나왔어요.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새로운 연구 결과를 과학자들에게 알렸어요.
상대성 이론을 검증하기 위한 관측 여행은 1919년 5월 에딩턴의 탐험대에 의해 이루어졌어요. 1919년 11월 6일 영국 런던에서 왕립학회와 왕립천문학회의 합동 회의가 소집되었어요. 관측 여행의 사진을 판독한 결과 빛이 꺾인 정도는 아인슈타인이 논문에서 밝힌 그대로였다는것을 발표했어요. 드디어 아인슈타인은 250년 동안 진리로 여겨졌던 뉴턴의 이론을 밀어내고 새로운 세계를 활짝 열었어요.
진리를 사랑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은 1924년 드 브로이가 파리 대학에 <양자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3페이지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자 심사 위원들의 반대의견에도 극찬하며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논문이 세상에 나올수 있도록 하였고, 인도 사람이라고 무시하면서 탈락시키려 했던 인도 출신 물리학자 사티엔드라 보스의 물체가 절대 온도인 '0'에 가까울 때 생기는 일에 대해서 예측한 논문도 독일의 <<물리학 저널>>에 싣도록 도와주었어요.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인 시절 독일의 군사 행동에 찬성하고 지지하는 '93인 선언'에 동참하지 않았으며 니콜라이가 쓴 '유럽인들에게 호소함'에 동참하고1915년 3월 '새 조국 연맹'이라는 전쟁에 반대하는 모임에도 참석했어요. 평화를 위한 이런 노력에도 유럽은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었어요. 독일이 속한 동맹국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자 1919년 6월 28일 독일에 유독 가혹하고 굴욕적이며 불공평한 내용으로 가득해 또 다른 분노와 전쟁을 유발하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참전국 간의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자 아인슈타인은 각 나라의 대통령들에게 탄원서를 보냈어요.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았고 독일 국민들의 분노는 아인슈타인에게 향했어요.
히틀러는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것은 독일에 있는 유대인 때문이라고 선동했어요.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아인슈타인은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어요. '평화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결코 평화를 지킬 수 없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마침내 독일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미국에서 강연중이던 아인슈타인은 독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어요. 이제는 전쟁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독일의 과학자 오토 한과 리제 마이트너가 '에너지가 질량과 같다'는 공식을 이용하여 엄청난 파괴력의 폭탄을 만들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이 위협적인 폭탄을 만들지 못하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편지를 보내고 이에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원자 폭탄'을 만드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과학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요.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었어요.
물리학자가 된 것에 회의를 느낀 아인슈타인은 전쟁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발 벗고 나섰어요. 원자 폭탄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핵전쟁과 평화>라는 책을 쓰고 '핵 과학자 비상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세계 정부를 만들어 원자 폭탄을 안전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또한 원자 폭탄보다 더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수소 폭탄 개발을 막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어요.

 

아인슈타인에게 바이올린은 자신을 위로해 주는 좋은 친구이자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동료와도 같았어요. 어린 시절부터 힘들고 어려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바이올린을 켜며 마음을 다잡았고 음악으로부터 영감까지 얻었어요. "상대성 이론은 직관적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그 직관을 떠오르게 한 것이 바로 음악이지요. 나의 새로운 발견은 음악적 깨달음에 따른 결과였습니다."라고 말한 그가 노년이 되어 손가락 힘이 약해져 바이올린을 더는 연주할 수 없게 된 것은 크나큰 고통이었을거에요.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어려운 이론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 이론을 통해 밝혀지고 있는 우주의 정체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일상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울뿐이네요. 내비게이션, 디지털 카메라, 레이저 등 어느 것 하나 그를 제외하고 설명할수 없네요. 

 

 

아인슈타인이 남긴 말을 되새기며 중력과 전기력 등 자연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힘을 하나로 통합하여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인 '통일장 이론'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하였지만 끝내 이 숙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병상에 공책과 안경, 필기도구만 남기고 조용히 세상을 떠난 그가 남긴 마지막 숙제를 위해 지금도 계속 연구하고 있는 후대 과학자들을 바라보며 그가 얼마나 과학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떠났는지 알게 되었어요.

이 책을 읽는 모든 아이들이 아인슈타인처럼 무한한 상상력과 사고력, 그리고 인류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까지 가지길 바래봅니다. 그의 인류애는 과학이라는 차가운 지성에만 빠져있는 요즈음 전문 지식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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