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 닮고 싶은 창의융합 인재 9
김형진 지음, 민재회 그림, 와이즈만 영재교육연구소 감수, 손영운 기획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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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우주관에 대한 논쟁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과학혁명을 완성한 뉴턴은 우리에게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유명합니다. 당시대의 지성들에게조차 그의 업적에 천재라는 찬사를 받았던 그이지만 그도 역시 우리들의 삶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어요. 머리가 좋고, 부자이고, 운이 좋아 우리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인물로 여기지만 행복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외로움과 상처로 마음의 문을 꼭꼭 닫고 지냈던 그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도 역시 고난을 이겨내고 엄청난 독서와 학습을 통해 쌓은 지식과 상상력을 발휘해 창의융합 인재로 거듭났음을 알 수 있는 기회였네요. 그의 창의융합 인재상을 함께 살펴보도록 해요.

 

1642년 영국 링커셔 울스소프에서 태어나 1727년 켄싱턴 집에서 사망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는 그의 일생동안 그가 살던 영국에서는 영국 내란, 왕정복고, 페스트 유행, 명예혁명, 7년 전쟁이 있었네요. 사회적 혼란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연구의 꽃을 피워 집대성한 그의 노고가 대단해보입니다. 1697년 김석문이 <역학도해>에서 지동설에 근거한 우주론을 최초로 소개했다고 하니 영, 정조 시대를 통해 우리도 과학적 부흥과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이루지 못함에 아쉬울 따름이네요.

 

어린시절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재혼한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외롭게 자란 뉴턴은 밖에서 아이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조용히 사색에 잠겨 물건을 만들고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 이때 생긴 상상력은 방대한 독서를 통한 지식과 결합하여 그의 업적의 기초가 되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발상을 할 수 있게 하였지요. 양아버지 스미스 목사로부터 물려받은 300여 권의 책, 집을 떠나 학교에 다닐적 그랜섬의 울프람 도서관은 그의 독서 습관을 통해 지식과 상상력을 키울수 있는 최고의 도우미였지요. 그가 하숙 생활을 했던 그랜섬의 클라크 씨 집에서 만난 존 베이트의 <자연과 예술의 신비>는  책을 읽는데 그치지 않고, 책에 나온 내용을 실험으로 확인해보거나 실생활에 응용해 보게 하였어요.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통해 무시를 당하는 건 성적이 좋지 않아서라고 생각한 뉴턴은 밤낮으로 공부하여 일등 학생이 되었고 약재상  클라크씨를 도와 수습생으로 일하며 배운 화학 경험은 나중에 이론과 실험을 융합시키는 능력으로 이어졌어요. 학자라는 불확실한 길보다는 자신이 가진 농지와 가축들을 물려주는 것이 자식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어머니와의 갈등속에서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다양한 독서 경험, 폭넓은 인문학 지식을 갖추며 위대한 과학자가 되기 위한 토대가 될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나갑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와 같은 자연 철학자들의 이론에 관심을 가지며 당시 진리로 받아들여졌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을 실험으로 직접 책의 내용을 확인해가면서 새로운 생각을 정립해나갑니다. 실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습관은 땅으로 떨어지는 사과로부터 만유인력의 법칙과 우주 모든 물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운동 법칙을 생각해 내게 되지요. 이러한 대단한 업적은 페스트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가 여러 가지 과학적 문제를 고민하던 시기에 이루어집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증명하며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져 오던 고대의 자연법칙을 완전히 새롭게 써 내려가게 됩니다.
뉴턴의 업적은 새로운 주제에 대해 연구를 시작할 때면 주제에 대한 폭넓은 독서를 통해 문제를 파악하고, 기존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고, 노트에 중요한 항목을 작성하고, 각 항목에 연관된 내용을 추가로 자세히 기록하고 자신이 읽은 책 내용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고, 이러한 의문을 늘 머릿속에 담아두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있어 가능한 성과였어요.
만유인력의 법칙과 함께 물체의 운동에 대해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칙을 정리하기 위해 노력하던중 당시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이론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맞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다 갈릴레이의 실험을 떠올려 관성의 법칙, 뉴턴의 운동 제 1법칙을 발견하고 또 다시 연구를 시작하여 가속도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 등 세 가지 운동 법칙을 수학적인 방법으로 밝혀냈어요.

 

천문학을 이해하기 위해 시작한 수학 공부는 많은 성과를 냅니다. 만유인력과 운동의 법칙을 정리한 <프린키피아>의 내용은 모두 수학적 증명을 토대로 구성되었으며 미분법을 개발한 수학자로 인정을 받아 오늘날에도 '세계 3대 수학자'로 불리우며,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과 거대한 별들의 움직임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는데도 수학을 이용했어요. 또한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힘의 근원을 이해하고자 연금술에도 관심을 가지는 등 과학뿐만 아니라 수학과 연금술까지 다양한 지식을 융합했어요.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와의 만남을 계기로 집필하게 된 <프린키피아>는 발간 즉시 학계와 대중의 관심을 동시에 받으며 대성공을 거두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은 적었어요. 수박 겉핥기식으로 수학을 아는 사람들에게 논쟁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어렵게 썼다는군요.
뉴턴이 '역학'과 '광학'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은 그의 뛰어난 수학 실력때문이에요. 수학적으로 증명된 이론에는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는 이유때문에 자신이 만든 법칙을 반드시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이런 수학 실력은 천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부터 시작되었어요.
기존의 수학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값을 구하기 위해 개발한 유율법은 험프리 바빙턴 교수의 충고에도 학계에 발표하지 않아 30년이 지난 1699년 독일의 수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의 미분법 개발 논문에 누가 최초의 미분법 개발자인지를 놓고 긴 논쟁의 시작거리가 되기도 했어요.
존 베이트의 <자연과 예술의 신비>라는 책에 나오는 염료와 치료법에 대한 설명을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연금술에 대한 관심의 싹을 조금씩 키운 뉴턴은 훗날 보일과 만나 연금술에 대한 지식을 교류하기도 하고 죽었을 때 가지고 있던 약 2,000권 책 중 169권이 연금술에 관한 책일 정도로 연금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실험과 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뉴턴이 연금술을 이용해 귀금속을 만들거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에 의아하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인류가 한때는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잊혀진 궁극의 진리'를 다시 알아낸다는 의미였어요. 연금술을 통해서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힘의 근원을 이해하고 통합하려는 시도를 한 뉴턴이 '이성 시대의 마지막 마법사'로 불리는 이유이지요.

 

뉴턴은 빛의 정체를 밝히려는 도전을 통해 광학이라는 새로운 지식을 창조했어요.
선배 과학자들이 쓴 빛에 대한 책을 읽고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던 뉴턴은 자신이 발견한 중력법칙을 지구와 달의 문제에 적용해 보면서 정확하지 않은 관측 자료 때문에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없자 잠시 중력 연구를 중단하고 광학으로 눈을 돌렸어요. 프리즘으로 빛의 본질을 파악하고 더 많은 것을 밝혀내려고 직접 태양을 바라보는 무모한 실험도 하지요.
아이작 배로 교수를 이어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 석좌 교수가 된 뉴턴은 수학과 광학을 결합한 강의를 시작합니다. 수업이 어렵다고 소문이 나 아주 적은 수의 학생들만 수강하는 수업이 되었지만 강의를 하면서 빛에 대한 연구를 계속 진행합니다. 당시 유행한 굴절 망원경의 성능에 실망한 뉴턴은 그레고리의 <광학의 발견>이라는 책에서 영감을 얻어 반사 망원경을 직접 제작하고 영국 왕립학회에서 주는 창의성 상을 받고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됩니다.
1704년 62세의 뉴턴은 젊은 시절의 치열하고도 광범위한 '빛의 성질'에 대한 연구를 정리하여 <광학>이라는 책을 발표합니다. 이를 통해 뉴턴은 드디어 이론가이자 실험가로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어요. 이듬해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도 수여받지요.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지식을 얻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고, 다가가고, 뛰어드는 무모함, 선입견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습성이 그를 위대한 과학자로 만들었어요.

 

뉴턴은 어릴적부터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있는 것을 즐기고 학문적 견해가 다른 사람과는 많은 갈등을 빚기도 했어요.
자신의 반사 망원경과 빛에 관한 새로운 이론에 비판하는 로버트 훅과 화해와 갈등을 반복하는 묘한 관계가 되었지만 '만약 내가 당신보다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라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연구가 더욱 깊은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자신의 연구 결과도 나올 수 없었다는 겸손한 마음까지도 나타내었어요.
언제나 확실한 실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쉽지 않았던 그였고, 한발 물러서서 타협하기보다는 자신의 실험을 믿고 끝까지 소신을 밀어붙이고 자신과 학문적 견해가 다른 사람과 많은 갈등을 겪었지만 자신의 연구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갈등도 마다치 않았어요. 하지만 뉴턴도 나이가 들면서 세상과 좀 더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을 알게 되었어요.
런던에서 하원의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조폐국에서 새로운 화폐를 만들며 화폐 발행 기록을 갱신해 나가고 화폐 위조범인 챌로너를 사형시키는 범죄 수사관의 역할도 합니다.
왕립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왕립학회를 튼튼한 재정을 가진 단체로 거듭나게 하고 역학, 수학, 광학, 천문학, 동물학, 화학, 식물학 분야에 해설자라는 자리를 만들어 각 모임을 주재하며 모든 모임에 참석하는 등 왕립학회의 체질을 완전히 바꾸었어요.
말년 조폐국 국장과 왕립학회 회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 뉴턴은 이제 지식을 두고 투쟁을 벌이는 대신 유순한 성격으로 변해 자신의 넉넉한 부유함을 가족들에게 베풀며 콘듀이트와 조카 캐서린의 돌봄속에 1727년 85세의 나이로 위대한 삶을 마감합니다.
웨스트민스트 사원에서 거행된 장례후 영국의 국왕과 위인들 곁에서 영원히 잠든 그는 자신은 선배 과학자들의 어깨 위에서 편안하게 연구를 발전시켰다고 자신을 낮추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뉴턴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진리라는 광대한 바다'를 더 멀리 바라볼 수 있게 되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대의 자연 철학자들이 사색과 직관을 통해 결론을 내리고 주장을 펼친 것과는 달리, 뉴턴은 정확한 수학적 증명과 정밀한 실험을 통해 모든 현상을 설명했고, 그가 죽은후에도 천왕성의 발견, 해왕성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살아 있는 과학'이 되었으며  상대성 이론의 등장으로 뉴턴의 법칙은 수정되어야 했고 원자와 같이 매우 작은 입자에 적용할 수 있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만들어야 했지만, 원자와 같이 매우 작은 입자를 다루는 경우나 물체의 속도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는 경우, 매우 강한 중력이 작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중요한 법칙이라는 사실에 놀라울뿐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천재로 알고 있는 뉴턴은 연구 외의 시간은 모두 낭비라고 생각할 정도로 성실함의 아이콘이었으며, <프린키피아>을 읽은 키욤 드 로피탈이 감탄한 천재성, 신이 우리에게 보낸 사람이라고 극찬한 영국 고전주의 대표 시인 알렉산더 포프, 자연을 펼쳐진 책처럼 받아들이고 그것을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아이라고 말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평가처럼 뉴턴은 분명 모든 것을 갖춘 천재였을지라도 방대한 독서와 학습을 통해 쌓은 지식과 상상력이 밑바탕이 되고 실험 정신을 바탕으로 한 과학 기술 창조력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그의 위대함이 높게 평가되지는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학사에 우뚝 선 거인 뉴턴, 그도 역시 우리의 삶과 완전히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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