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닮고 싶은 창의융합 인재 7
김세라 지음, 와이즈만 영재교육연구소 감수, 손영운 기획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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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도 목표를 위해  90년의 인생동안 매일 매일을 피나는 노력과 열정을 보인 인물은 아마 없을거에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올 정도의 고통의 시간도 견뎌내고, 결코 거절할 수 없는 교황의 부탁이나 간섭에도 꿋꿋이 자신의 작품을 위해 정진하는 모습을 보며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에게 어떤 특별함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르네상스의 황금기와 함께 한 미켈란젤로의 90년 인생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연산군의 폭정, 삼포왜란, 을사사화, 임꺽정의 난 등 발전보다는 안으로 곯아가는 시기였지만, 세계사적으로는 바다를 정복하며 식민지를 개척해나가는 대항해 시대가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많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똑같이 그린 모사화나 멋지게 그린 단순한 그림이나 조각을 보면 단발적인 감흥이나 기교의 훌륭함은 느낄수 있지만 깊은 감동이나 여운을 느끼지는 못할거에요.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빼어난 기교와 깊은 감동을 받을수 있는건 어릴적부터 부지런히 쌓았던 다양한 지식과 풍부한 교양이 창조력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일거에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인 화가가 되는것을 반대했던 몰락한 귀족인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을수 없었어요.

열세 살에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작업실에 도제로 들어간 미켈란젤로는 그림보다는 조각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열네 살때 조각가 베르톨도 디 지오반니의 제자가 되어 메디치가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파우누스의 두상을 보고 그의 재능을 발견한 로렌초는 그를 양자로 삼아 친자식처럼 대해 주었고 메디치 궁전의 많은 방문객들을 만날 기회를 제공하며 그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칠 문학적 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지요. 든든한 후원자인 로렌초가 세상을 떠난 후 잠시의 방황을 하지만 열일곱 살의 미켈란젤로는 훌륭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제대로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아우구스투스회 수도원장님을 설득해 구호소에 위탁된 시신을 해부할 수 있었고 예술가라면 자연 과학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자연 과학, 특히 천문학에도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미켈란젤로가 인간 내면의 다양성을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노력한 결과일거에요.

 

미켈란젤로를 떠올리면 항상 머리에 떠오르는 피렌체 공화정의 상징물이 된 <다비드>는 다른 예술가들의 다윗과 다른 새로운 다윗이지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그의 도전 정신의 결과물일거에요.

로렌초가 죽은 후 로마로 떠난 미켈란젤로는 1498년 프랑스 인 추기경으로부터 '피에타'를 주제로 조각을 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예수의 부활'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강조한 <피에타>를 만들고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고향을 잊을수 없어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고향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를 원하고 피렌체 대성당에 다비드 상을 제작하기 위해 가져온 40여 년간 방치됐던 대리석에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한 <다비드>를 완성하게 됩니다. 1504년 5월 18일 정오 정부청사 앞 광장에 설치된 <다비드>를 보고 사람들은 놀라워합니다. 가장 큰 규모로 조각된 나체상이자 최고의 걸작인 미켈란젤로 예술의 상징인 <다비드>는 그를 최고의 조각가로 인정받게 하지만 나체상이라는 자유로운 표현에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일반적인 다윗 조각상의 형식과 이미지를 파괴하고 새로운 다윗을 만든 그의 도전 정신은 그 가치를 인정받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미켈란젤로를 꼽는 이유는 이전 시대와 달리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내며 인본주의의 새로운 가치를 그림으로 표현한 창조 정신때문일거에요.

브라만테의 계략으로 시작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는 처음으로 시작하는 프레스코 작업이라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이 분야에 경험이 많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시작하지만 결국 그림을 망칠 수 없다는 생각에 친구들을 돌려보내게 되지요. 비계 위에서 4년의 세월을 보내며 몸에 이상이 올 정도의 고통도 있었지만 그림 전공자가 아닌 자신의 한계를 넘어 1512년 11월 1일 천장화 <천지창조>를 완성하게 됩니다. "이 벽화를 보기 전에는 한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을는지 제대로  감을 잡을 수가 없다."라고 한 단테의 말처럼 성서의 내용이 주제이지만 신이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된 그림인 <천지창조>는 그림으로 인간을 중심에 놓는 인본주의 정신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전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 위대한 작품으로 탄생했어요.

 

그림보다는 조각에 관심이 많은 미켈란젤로는 시작만 해 놓고 중단해야 했던 율리우스 2세의 묘 작업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최초의 웅장한 설계안과는 달리 <모세>, <반항하는 노예>, <죽어가는 노예>  등 석 점의 조각상만 완성하게 되지요. 비록 처음 계획과 달리 불리한 여건속에서 만들어낸 석 점의 조각상이지만 중년기의 걸작으로 꼽힐만큼 빼어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지요. 그것은 자신의 사상이나 이념, 가치관과 맞아떨어지는 형상을 돌덩어리 속에서 발견해 그 형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의 예술혼 때문이었을거에요.

 

어릴적부터 관심을 갖고 습득한 다양한 지식의 매체가 되어 발휘된 상상력의 결정판 <최후의 심판>은 바오로 3세가 무릎을 꿇고 "주여, 내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외칠 정도의 다양한 지식이 융합된 예술 작품입니다.

1534년 9월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온 미켈란젤로에게 교황 바오로 3세는 시스티나 성당에 벽화를 부탁합니다. 벽화의 주제는 '예수의 부활'이었어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 연옥, 천국의 여행 이야기를 살려서 예수가 부활해 인간을 구원하는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습니다. 60대의 중반의 나이, 비계에서 떨어져 낙상을 입는 등 어려움속에서 6년간의 작업 끝에 드디어 그림을 완성합니다. 벽화 완성을 독촉한 바오로 3세는 그림에 만족스러워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몸의 예수, 근엄한 심판자나 자비로운 구세주의 이미지와 동떨어진 수염이 없는 건장한 청년으로 표현된 예수, 날개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은 천사, 머리 뒤 후광도 없고 서로 입맞춤을 하는 성인들의 모습 등 신성함과 거리가 먼 그의 작품에 비판을 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를 감싸던 바오로 3세가 세상을 뜨자 불평불만은 더 커지고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는 예술가들의 아낌없는 박수와 벽화 베끼기에도 불구하고 그림속 나체를 가리려는 덧칠이 시도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의 상상력을 통해 최고의 아름다움이 펼쳐진 <최후의 심판>은 기독교 신앙이 없더라고 인간의 삶과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힘이 느껴지는건 다양한 지식의 밑거름이 된 예술의 창조력이 아닐지요.

 

그의 열정은 70대가 되어도 위축되지 않고 건축으로 확장되어 갑니다. 더욱 깊어진 신앙심은 대성당 공사를 하느님이 내게 주신 일이라 생각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하지요.

평생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에만 전념한 그는 작업복을 입고 장화를 신은 채 잠자리에 들기 일쑤였고 노쇠하고 시력이 나빠지고 죽음이 얼마남지 않는 몸상태에서도 조각상과 씨름하고 건축 현장에 찾아가는 등 식을줄 모르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어요.

성공한 아들을 보면서도 그림이나 조각은 고귀한 일이 아니라고 인정하지 않고 지나친 요구도 하고 상의없이 은행 예금을 빼 쓰기도 하는 아버지, 그의 창작활동의 고통을 이해하지도 가엾게 여기지도 않는 가족들에게 피땀 흘려 번 돈이었지만 모두 아낌없이 내놓고 가족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헌신적 가족 사랑의 정신을 실천한 그에게 뒤에서 내조하는 반려자나 가족이 있었더라면 어떤 더 훌륭한 예술 작품이 나왔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르네상스를 이끈 숙명의 라이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었기에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받으며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거에요. 그와 갈등을 빚기도한 율리우스 2세지만 그의 예술 세계를 알아주었기에 그의 작품 생활은 계속 발전할 수 있었을거에요.

모든 당시 사람들이 그를 두고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그의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을 알았다면 그의 일생은 외롭지 않았을거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천재 미술가로만 여겼던 미켈란젤로가 실제로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신의 재능을 극대화한 열정과 노력의 예술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가진 재능을 개발하고 실천하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어요. 주어진 재능에 만족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나아가는 도전 정신과 열정이야말로 이시대에 우리 아이에게 꼬옥 필요한 덕목이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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