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제퍼슨 닮고 싶은 창의융합 인재 5
송치중 지음, 윤희동 그림, 와이즈만 영재교육연구소 감수, 손영운 기획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와 함께 5번째로 만나볼 창의융합 인재는 토머스 제퍼슨입니다. 미국 독립 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한 미국 3대 대통령으로 알고 있는 그에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어떤 숨겨진 창의융합 능력이 있었는지 살펴보는것은 또 다른 재미일것 같네요. 아마도 지금까지 만나본 다른 창의융합 인재처럼 독서로 다양한 지식을 쌓고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정진했겠죠? 그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지도 알아보도록해요.

 

1743년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태어난 제퍼슨이 미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대통령으로 미국이 발전할수 있는 기초를 다지고 있을때 우리나라도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영, 정조의 부흥기였군요. 미국이 제퍼슨을 이어 지속적인 발전을 이룬것처럼 우리나라도 영, 정조에 이은 조선시대가 세도정치가 아닌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수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부럽기도 하고 반성도 하게 됩니다.

 

버지니아의 식민지에서 태어난 제퍼슨은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외딴곳 섀드웰에서 말을 타고 자연 속에서 뛰놀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웠고, 타카호로 이사한 후에는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울수 있었어요. 다섯 살 무렵 글을 배운 제퍼슨은 아버지 서재에 있는 50여 권의 책을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다양한 사람들의 세상살이를 배울수 있었어요. 또한, 버지니아와 주변 지역의 땅을 측정하고 지도를 만드느라 바쁜 아버지와 만날때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알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요. 책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고 느낀 제퍼슨은 더글라스 목사가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며 더 많은 책을 읽을수 있는 라틴 어, 프랑스 어, 그리스 어 등 의 언어를 배울수 있었고, 수업이 끝난 후에는 친구들과 자연을 벗삼으며 자연에서 얻은 모든 것을 공책에 기록하면서 나중에 좋은 글을 쓰는 데 뒷받침이 된 기록하는 습관을 익힐수 있었어요. 하지만 제퍼슨이 제일 믿고 의지하던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고 섀드웰의 가장이 되며 첫번째 시련을 겪습니다.

 

섀드웰의 가장으로 바쁜 생활을 하던 제퍼슨은 원하는 공부를 위해 윌리엄 앤 메리 대학으로 떠납니다. 깊은 인문학적 지식과 다양한 분야에 지식을 가지고 있는 스몰 교수를 만나 그를 멘토로 다양한 분야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학문 간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하게 되지요. 스몰 교수를 통해 변호사 조지 위드를 알게 되어 장래에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2년여 동안 열심히 공부한 결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제퍼슨은 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조지 위드를 스승으로 모시고 5 년간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흡수하며 변호사 시험에도 합격하게 되지요.

 

변호사가 된 제퍼슨은 말솜씨가 뛰어나지 않았지만 부족한 말솜씨를 차분한 성격과 노력, 그리고 논리 정연함으로 극복하여 변호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지요. 돈을 버는 것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참여하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자신이 원하고 만족하는 일을 하는 것에 더 행복해했어요. 고향 섀드웰에 불이 나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모든게 없어져 버렸지만 자신의 손으로 직접 새 집을 지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고 싶어 건축과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그 지식을 바탕으로 새 집을 직접 디자인하고 공사를 진행하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축물이 된 '몬티셀로'를 완성하고 마사와 결혼하여 변호사 생활을 지속하며 탄탄대로를 달리던 중 아쉬움을 느끼며 새로운 길을 택하게 됩니다. 바로 정치가의 길이지요. 식민지 버지니아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법안의 초안을 잡는 역할을 하며 글솜씨와 문장력을 인정받던 중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납니다. 대륙 회의에서 독립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궈 줄 독립 선언서를 제작하게 되고 제퍼슨은 존 애덤스, 벤저민 프랭클린, 로저 셔먼과 로버트 리빙스턴과 함께 독립 선언서 초안을 쓰게 되는 초안 작성자에 뽑히게 됩니다.

 

고향 버지니아를 위해 일하고 싶었던 제퍼슨은 버지니아의 하원 의원이 됩니다. 126개의 법안을 만들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하게 평가받는 법안인 종교 자유법을 포함하여 80 퍼센트 정도가 법률로 제정되었지요. 오랜 동료인 패트릭에 이어 제2대 버지니아 주지사에 취임한 제퍼슨은 가뭄과 영국군의 침입이라는 위기의 상황에서 버지니아를 지키지 못해 비난을 받게 되고 사랑하는 아내 미사의 죽음을 맞이하지만 미국 독립이라는 좋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제퍼슨은 연합 회의 의원으로 새 나라 미국의 기초를 다지게 되지요. 지금까지 유지되는 가장 중요한 법인 화페에 관한 것을 포함 30여 개의 중요한 법을 만들며 미국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비록 노예 제도 폐지 법안은 통과하지 못했지만 후일 노예 제도가 없어지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고 외교관이 되어 딸 팻시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4년간 외교 문제를 해결하며 다양한 유럽의 문화를 미국으로 전해주는 역할도 하게 됩니다. 1789년 가난하고 지식도 부족한 민중이 하나로 뭉쳐 왕과 귀족의 권력을 부수는 놀라운 광경을 직접 보면서 추후 미국이 공화정으로 정착되는 사회로 만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을때 국무장관에 임명되지만 강력한 연방 정부를 원하는 연방파의 반대로 각각의 주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제퍼슨의 주장은 가로막히고 지속되는 공화파와 연방파의 갈등 속에 장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위싱턴 대통령이 스스로 권력에서 물러난 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존 애덤스와의 경쟁에서 실패하여 제2대 부통령으로 정치계에 복귀하고 조지 워싱턴의 사망후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선 대통령으로 당선되지요. 대통령이 된 제퍼슨은 권위를 버리고 연방 정부의 힘을 줄여 나가고, 모든 국가의 일은 논의를 통해 진행하였으며 1,500만 달러로 프랑스로부터 미국 서부 땅을 사들여 미국의 영토를 2배로 늘려 미국 발전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합니다. 재선에도 성공하지만 미국의 백인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서편으로 나가게 하고 출항 금지법을 실행하여 거센 비판도 받았지만 조지 위싱턴처럼 2번까지만 대통령을 하고 내려와 후대 미국 대통령들에게 중요한 본보기가 됩니다.

 

정치에서 물러나 제퍼슨은 독서와 글쓰기를 하며 일상생활을 보내면서도 발명가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영국군의 침입으로 미국의 국회 의사당이 불에 타 의회 도서관에 보관된 귀중한 책들도 불타 없어져 버리자 자신이 가진 수많은 책을 의회 도서관에 기증합니다. 미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미국 시민이 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제퍼슨은 고향 버지니아에 버지니아 대학교를 세웁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정신이 건물에 배도록 고대 그리스, 로마 양식으로 짓고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 익히는 것을 위해 중앙에 도서관을 만들어 제퍼슨의 교육과 건축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버지니아 대학교는 몬티셀로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까지 하지요. 제퍼슨은 버지니아 대학교가 기존의 대학과 다르기를 원해 학생들이 원하는 강의를 선택해서 들을 수 있도록 선택 과목 제도를 만들고 교회와 종교의 영향을 안 받는 학교가 되기를 원해 예배당이 없는 학교를 설계했어요.

1826년 7월 4일 미국의 50번째 독립 기념일에 세상을 떠난 그의 묘비엔 자신의 일생에 했던 수많은 일 중에 가장 잘한 일 세 가지를 적고 있어요. 미국 독립을 위한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것, 미국 사회에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킨 것, 버지니아 대학교를 세운 일이었다구요.

 

그가 보여준 창의융합 인재상을 살펴봐요.

다른 창의융합 인재처럼 독서를 아주 좋아했어요. 다양한 책을 읽기 위해 그리스 어와 프랑스 어도 공부하고 책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으며, 책을 수집하기 좋아했고, 다양한 지식을 책을 통해서 습득한 그는 책을 통해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워나갔어요.

인디언이나 흑인 노예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부유한 가정의 재산이 너무 쉽게 대물림되는것에 대해서 문제 삼고, 미국이 국교가 없는 나라가 되는데 기여하는 등 바른 인성을 가졌구요.

독립 선언서에서 '어느 누구도 다른 삶에 강제로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며 이 모든 것이 당연하다면, 아메리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고 말한것처럼 미국의 독립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냈고 프랑스에서 외교관의 역할을 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미국에 전파하는 등 새로운 지식 창조에 노력했어요.

버지니아 대학을 설립하는데 로마, 그리스 양식을 이용하거나 도서관을 중앙에 배치하거나, 선택 과목 제도를 만들고 예배당이 없는 학교를 만들었던 것은 다양한 지식 융합의 산물이지요.

따로 과학을 배우지 않았지만 농사를 짓는데, 꽃을 가꾸는데, 독서를 하거나 편지를 쓸때 불편한 것을 직접 만들고 사용하는 등 독서를 통해 얻은 과학 지식을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데 이용한 것은 과학 기술 창조력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노력이 미국의 독립 뿐만아니라 흑인 노예 해방, 여성의 인권 회복​까지 이어져 오늘날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국가로 지속되는 것은 그가 살아온 삶이 새로운 가치 창​출을 이루었기 때문일거에요.


 

 

제퍼슨의 자기 관리 10계명은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들이 지켜도 큰 도움이 될 정도로 도움이 되는 지침서네요. 이처럼 자기 관리가 뛰어난 제퍼슨이었기에 오랜 시간동안 건강을 유지하며 많은 업적을 남길수 있었던것 같아요.

 

 

제퍼슨은 그의 멘토중 한분이었던 조지 위드가 그의 제자중 가장 자랑스러워 할 정도로 멘토를 뛰어넘은 책벌레였으며, 100여 년이 지나서야 노예 제도가 완전히 없어질 정도로 당시에 호응이 어려웠던 노예 제도에 문제를 제기한 첫 인물이기도 하며, 민주주의의 발상지였던 고대 그리스의 건축 양식을 본떠 버지니아 대학교를 건축하여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는 작업을 한 신고전주의에 공헌한 건축물의 설계자이기도 하고, 러시모어 산의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중 한 명으로 미국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는데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책을 통해 다양한 지식을 얻었던 그가 미국의 독립과 발전에 밑거름이 된 것은 그가 가진 창의융합 인재상을 자신이 아닌 이웃과 자신의 조국을 위해 사심없이 펼쳤기때문이 아닐지요. 아이와 함께 넓고 멀리 보고 나무보다는 숲을 바라보며 따라하기 보다는 새롭게 생각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보도록 하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