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정약용 Who 한국사 조선 시대
권용찬 지음, 이일호 그림, 방민호 외 감수 / 다산어린이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시대 앞서간 생각을 가진 임금과 신하가 같은 시대에 만나 멋진 세상을 만들었던적은 그리 많지 않은것 같아요. 훌륭한 임금이나 신하는 많았을지라도 함께 만나 이 세상을 멋지게 만들기 위해 힘쓴 교집합의 시대는 저의 짧은 역사지식으로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네요. 정조책에 이어 정약용 인물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시대의 백성들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조라는 임금과 정약용이라는 신하의 만남으로 한순간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잠시 상상해봅니다.

 

 

꼬마 천재 정약용은 아마도 수재라 불리던 아버지 정재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것 같아요. 사도세자의 죽음에 회의를 느끼고 고향으로 내려온 아버지로부부터 네 살 무렵부터 형들과 함께 글을 배우기 시작한 정약용은 일곱 살 때 시를 지어 사람들을 감탄시킬 정도로 그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후 슬픔을 잊기 위해 공부에 더욱 매진하게 되고 형수를 통해 서학을 접하면서 폭넓은 학문의 세계에 빠져들게 됩니다.

개혁 정치의 주역인 정조, 생활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성리학의 한계라는 시대적 배경속 어릴적부터 다양한 학문과 접하며 열린 생각을 한 정약용이야말로 시대가 원하는 진정한 인물이 될 준비가 된 위인이 아니었을까요.

 

정약용이 당시 다른 양반들처럼 성리학에만 집착하여 공부를 지속했다면 아마도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정약용은 없거나 다른 인물로 기억될거에요. 매형을 통해 만나게 된 실학의 대가인 이가환 선생을 통해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을 가기게 된 것은 아마도 큰 행운이었던것 같아요. 심신의 수양만을 강조하는 유학보다는 실제로 모든 백성이 잘 살수 있고 나라의 힘 또한 기르기 위해 필요한 실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세상에 나가 백성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치를 펼치기로 결심합니다. 순천 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순천에 내려간 정약용은 탐관오리의 횡포을 지켜보며 백성이 근본인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소과에 합격후 정조을 만나게 된 정약용은 현군의 자질을 가진 정조을 위해 현명한 신하가 되도록 정진하자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정조의 총애에 대하여 노론의 반감으로 번번이 대과에 실패한 정약용은 드디어 정조 13년 대과에 장원급제하고 초계문신들 앞에서 <논어>를 해설하고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일을 성공시키는 등 더욱 정조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를 질투하는 무리에 의해 충청도 해미로 유배되는 등 험난한 앞길을 맞이하게 되는군요. 아마도 정조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없었다면 정약용은 그의 뜻을 펼쳐보기도 전에 그 꿈을 접어야했을거에요. 개혁적 성향이 강한 군주인 정조을 통하여 어릴적부터 준비해온 실학사상의 현실적 구현이 가능했다고 생각하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조를 통해 활쏘기 훈련을 하면서 국방의 중요성에 대한 깨우침을 받은 정약용은 정조가 후일 국방과 관련된 중요한 일을 맡기리라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어릴적 자신의 멘토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죽음후 삼년상을 치르게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무르는 정약용에게 정조는 수원 화성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합니다. 정조가 보낸 <기기도설> 및 그동안 공부한 다양한 학문적 지식을 이용하여 수원 화성의 설계와 건설 도구, 필요한 인원, 자금, 재료, 규모, 공사 기간 등을 계획하게 됩니다. 드디어 채제공의 지휘하에 실학자 정약용의 설계를 바탕으로 정조 18년 2년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수원 화성이 완성됩니다. 이는 정조의 지원과 실학을 바탕으로 한 정약용의 천재적인 과학적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며 이를 계기로 조선의 건축 기술은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되지요.

수원 화성을 설립하는데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 등 각종 기구를 만들어 비용을 크게 절감하고, 과학적으로 개량한 수레를 이용해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고, 인부들에게 품삯을 지급하는 등 실학사상을 반영한 정약용의 활약이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수원 화성은 그 빛을 발하지 못했을거에요.

 

경기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된 정약용은 탐관오리의 횡포를 접하고 이들의 부정을 전해 엄중한 국법을 적용받게 합니다. 이때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 등의 원한을 사게 되고 한때 천주교에 접했던 사실을 통해 천주교도로 몰려 곡산 부사로 떠나게 됩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지방 수령으로서 마음가짐을 생각하는 계기를 가지게 되지요. 그후 지속적인 모함 상소를 통해 정조를 위해 사직을 하게 되지만 정조의 정성에 감동하여 다시 조정에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되지요.

암행어사로 경기도 지역을 돌며 지방의 형편을 살피고 탐관오리의 악행을 접하고, 지방 관리로 임명시 백성의 편이 되어 일하면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지방 수령의 마음가짐에 대해 고민은 더욱 단단해집니다.

 

 

다시 조정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 정약용에게 정조의 승하 소식이 들립니다. 정조를 떠나보내고 한참을 시름에 잠겨 있는 정약용을 찾아 온 형 정약전의 충고로 다시 조정에 돌아가려고 하지만 그의 든든한 후원자 정조가 없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이룰수가 없읍니다. 결국 순조 1년 '신유박해'에 연류되어 긴 유배의 시간을 떠나게 됩니다. 유배지에서 둘째 형 정약전의 죽음, 막내아들의 죽음의 슬픔을 겪는 등 힘들고 고통스런 삶을 보내던 중 그의 깊은 학식과 너그러운 성품을 알게 된 아전들의 부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지요.

유배지에서의 긴 세월은 그에겐 힘들고 괴로운 시기였겠지만 교육 활동 및 방대한 양의 저술 작업을 통하여 정조가 떠난 세상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게 됩니다.

 

둘째 형 정약전의 죽음을 접하고 실의에 빠진 약용이 다시 기운을 차린 것은 고을 백성들의 고민을 알게 된 후 였습니다. 지금까지 백성을 돕는 일만 생각하고 백성을 돕는 관리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후 정약용은 남은 유배 생활 동안 <목민심서>을 편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드디어 순조 18년 정약용의 필생의 역작이자 총 마흔여덟 권의 방대한 내용을 자랑하는 <목민심서>가 편찬되지요. 세상이 <목민심서>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정약용의 유배형도 풀립니다. 그의 나이 일흔다섯 살 무려 18년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정약용은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쓰다 혼례 60주년이 되던 날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실학에 관심이 많았던 정약용은 자신이 지닌 재능 대부분을 힘없고 가난한 백성을 위한 일에 사용하였으며 유배지의 고된 생활속에서도 백성들의 삶을 체험하기 위한 경험으로 여기며 실학을 현실에 반영하려고 노력한 그야말로 진정한 선비이자 진정한 학자가 아니었을지요. 항상 자신보다는 백성을 위해 살다 생을 다한 그 분의 인생과 자신의 영위를 위해 노력하는 지금의 정치인들이 비교되는건 저만의 생각일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강진 유적지의 경험은 있지만 그의 진정한 유적지엔 아직 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많이 생깁니다. 이 책을 통해 다산의 유적지를 살펴보고 꼬옥 아이와 함께 체험하고 그를 다시 한번 기억하며 그의 백성을 위한 마음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who? 정약용을 가지고 다산의 유적지에서 그를 만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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