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임진왜란을 낱낱이 기록하다 고전맛집 6
강창훈 지음, 이부록 그림 / 사계절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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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 200년 동안의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며 나라 전체를 흔들 만큼의 큰 외적의 침입이 있으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거에요. 하지만 미리 꼼꼼히 주변 정세를 살피고 대비에 만전을 가했다면 외적의 침입이 없었거나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불상사는 없었을거에요. 이런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비록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일지라도 유성룡을 통해 '징비록'이라는 책이 쓰여지고 그것을 통해 과거의 반성과 미래를 대비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을거에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굴욕의 병자호란을 맞이하고 징비록이 우리나라보다는 오히려 일본에서 우리나라를 배우려는 노력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에 '소 읽고 외양간 고치기'조차도 조선의 기득권 지배층에게는 시도되지 않은 오만함이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책장을 넘기며 아이와 함께 '징비록'속에 담긴 교훈을 되새겨 보도록해요.
 

 

'징비록'은 어떤 책인지 알아봅니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이 많이 읽던 <<시경>>에 나오는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앞으로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는 말에서 '잘못을 징계한다' '징''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 '비' 두 글자를 따서 책 제목을 지었어요. 임진왜란 당시 조정의 핵심 관료였던 유성룡이 임진왜란과 같은 국가적 재난은 언제든 또 일어날 수 있으므로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런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임진왜란때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자신이 관료로서 어떤 일을 했고, 다른 관료들은 어떻게 행동했는지, 전쟁 당시 백성들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들은 이야기뿐 아니라 직접 목격한 내용도 담아 자신의 반성과 함께 기록한 책입니다. '징비록'이 유성룡 한 사람이 쓴 반성의 기록이지만 실제로는 나라를 지켜야 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임금과 관료들 모두를 대표해서 쓴 책이라 할 수 있겠어요.

광해군 시절 정권을 잡은 북인이 기술한 <<선조실록>>이 마음에 들지 않은 서인이 인조 반정후 <<선조수정실록>>을 기록시 서인이 아닌 남인인 유성룡이 쓴 <<징비록>>을 대표적 자료로 인용하고 서인을 깎아내리는 것 같은 내용도 인용한 사실에 그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하게 됩니다. 
 

 

'징비록'을 쓴 유성룡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1542년 경상도 의성 외갓집에서 태어난 유성룡은 어린 시절 한양에 올라와 지금의 남산 한옥 마을 근처에서 살았으며 열일곱 살때 아버지 유중영이 의주로 부임시 동행하던 차에 우연히 발견한 책 보따리에서 <<양명집>>을 발견하고 그 책을 읽고 감동하게 됩니다. 스무 살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스물 세살에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년후 대과에 합격해 관직 생활을 시작하지요. 그후 47세에 형조 판서, 48세에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동인중 온건파인 남인의 영수 노릇을 하게 됩니다. 1591년 조선에 위기감이 감돌자 일본군의 침략을 염려하여 전국을 동분서주하며 경상도를 중심으로 성을 수리하고 권율, 이순신 등 장수들을 천거하고 임진왜란이 터진후 명군의 참전으로 한양을 되찾는 등 전세가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하자 민심을 수습하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 정책을 실시하지만 명나라와 일본의 협상 기간을 적절히 활용해 전란후 민심을 수습하려는 노력이 일본과 타협하려 했고 나라를 더럽혔다는 비난을 받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와 전쟁 기간에 자신이 한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 자세히 밝히기 위해 책을 쓰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징비록'이 탄생한 또 하나의 이유가 됩니다.
 

 

​이제 '징비록'을 들여다보기로 해요.

100년이 넘는 내전 끝에 최종 승자가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을 통일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시아 최강국 명나라를 차지하겠다는 꿈을 꿉니다. 조선을 통해 육로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조선에 사신을 보내지만 이제 전쟁은 그만하고 싶고 조선과의 교역만이 살 길인 대마도 도주는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고 통신사가 가져온 일본 국왕의 국서에 적힌 일본이 명나라를 정복하는 길에 조선이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는 충격적인 내용에 통신사의 의견을 묻게되고, 전쟁이 날거라는 정사 황윤길, 전쟁이 날 거라는 소문에 민심을 동요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부사 김성일의 상반된 의견에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동인 김성일의 의견에 따라 낙관적 전망을 하게 되는 어이없는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유성룡은 하삼도의 전쟁 대비에 신경을 쓰지만 여기저기서 불만이 쏟아지고 적을 막기 위해 성을 쌓고,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승진시키는 등 많은 노력을 하지만 모든 일이 유성룡의 뜻대로 되지도 않고, 그의 최소한의 대비는 부족함과 과오가 많았어요.

조총이라는 신무기와 조선을 침략하기 전 간첩을 보내 다양한 정보를 캐고 조선 지도를 확보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한 일본군에 양적으로, 질적으로 모두 뒤지며 전 국토는 유린을 당합니다. 유성룡이 '징비록'에 남긴 용궁 현감 우복룡, 이일 장군, 신립의 한심할 지경인 사례들을 보며 지금에 와서 후회한들 소용없지만 전세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버린 상황에 너무 안타깝기만 합니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유일한 희망인 신립의 패배 소식에 충격에 빠진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피란을 하게 됩니다. 주권이 왕에게 있는 조선시대에 200년 동안 이어 온 이씨 가문의 왕조를 보존하기 위해 자신을 보호해야 헀다고 하더라도 피란 행렬의 등 뒤에 도성 안이 환하게 밝아지며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치솟은 것을 보면 성난 백성의 민심이 짐작되는군요. 피란중 원수 김명원의 거짓 보고에 임란후 첫 승리 소식을 전한 신각을 처형한 사실, 아군을 죽이고도 오히려 상을 받은 우복룡, 적의 동향을 알리고도 처형을 당한 개량현 사람, 신립의 사례처럼 아군끼리 죽이는 상황은 안타까운 정도가 아니라 한심하기까지 합니다. 대동강 남쪽에 진을 친 일본군에게 작지 않은 공을 세우고도 물이 얕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왕성탄을 알려주게 되어 평양성이 함락되고, 김순량을 비롯한 일본군의 간첩들이 조선을 배신한 것을 보며 임진왜란 초기는 중심을 잡지 못한 선조 때문에 안에서의 위기 또한 밖으로의 위기를 더 악화시키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순신 장군이 있었어요. 옥포 해전의 승리를 시작으로 당포 해전의 거북선의 활약, 학익진을 이용한 한산도 해전의 승리로 일본군 장수들에게 '해전은 하지 마라'는 명령이 내릴 정도의 전세 반전이 일어납니다.

임금과 신하들이 피란을 가고, 사대부들마저 떠나 버린 뒤 마을에는 백성들만 남았지만, 백성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를 실행에 옮긴 사대부도 있었어요. 그들은 자기 재산을 다 털어서 군수품을 마련하고 백성들도 함께 했어요.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 전라도의 김천일, 고경명, 그의 아들인 고종후, 고인후가 있었지요. 또한 불교 승려인 영규, 휴정, 유정은 조선 왕조의 숭유 억불 정책으로 탄압을 받는 입장에서도 국난 극복에 힘을 모았어요. 의병들은 관군과 합세하여 함께 싸우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1차 진주성 전투에요. 이제 개전 초기 일본군에 압도되어 임금이 북쪽 국경까지 내몰리는 상황에서 서서히 회복세를 보이고 명군이 참전하는 변수가 등장하게 됩니다.
 

 

명군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를 생각하며 반응하지 않던 명나라는 '순망치한'을 주장하는 병부 상서 석성의 주장에 따라 파병을 결정합니다. 명나라 장수 조승훈이 이끄는 5000명의 명군은 평양성 탈환을 시도하다 무참히 깨지고 이제야 조선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고, 일본군이 얼마나 강한지 깨닫고 시간을 벌기 위해 일본군과 강화 협상을 합니다.  그사이 보바이의 난이 진압되고 큰 공을 세운 이여송은 4만 대군을 이끌로 조선으로 들어오지요. 평양성을 가볍게 탈환하지만 벽제관에서 일본군의 기습에 패해 개성으로 물러난 이여송의 대군은 더는 싸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보바이의 난을 진압한 뒤 곧바로 조선에 오느라 피로감이 컸고 전투에 패해 기세가 꺾이고, 계속 전투를 해서 자기 병사들을 더 잃는 것을 원치 않았을 수도 있지만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목적이 위기에 빠진 조선을 도와 일본군을 조선 땅에서 물아내기 위함이 아니라 일본군이 자기네 땅에 들어오는 것을 조선 땅에서 막는 것이기 때문일거에요. 본국으로부터 보급이 끊기고 명군에 밀려 한양까지 쫓겨 왔고, 행주산성에서의 패배로 자존심에 상처가 난 상황인 일본 또한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았어요. 드디어 강화 협상에 들어갑니다.

양측의 요구 조건이 차이가 나자 심유경과 고니시는 문서를 위조해 명 황제와 일본 태합을 속이는 사기극을 벌이지만 들통이 나고 강화 협상도 결렬되어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납니다.

고니시의 계략으로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의 신분이 되고 원균이 칠천량에서 참패를 당하고 죽자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됩니다. 12척의 배만으로 명량 해전에서 지형상 이점을 이용해 13 대 300의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한 이순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소식에 철수를 하는 일본군을 한놈도 살려 보내고 싶지 않은 생각에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을 설득해 일본 수군과 노량에서 맞붙었고 적선 200여 척을 불사른 대승이었지만 유탄에 맞아 사망하게 됩니다.

이 책을 아이와 함께 읽으며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국민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며,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주변 정세, 세계 정세를 파악하지 않은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비록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기'일지라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 않는 게으름과 어리석음에 비하면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었어요.

임진왜란이 끝나고 6년 뒤인 1604년에 집필을 마친 유성룡의 '징비록'이 32년 가까이 지난 1633년에야 출간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고, 그로부터 불과 3년 뒤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 임금의 삼전도 굴욕이 벌어진것을 보면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조차도 하지 않은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의 안이함과 무책임함에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역사를 배우는 목적중의 하나인 과거의 과오로부터 교훈을 얻고 미래에 대한 대비와 비전을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징비록'이라는 책을 통해 유성룡이 그 먼 옛날에도 후세에 전하고자 했다는 사실에, 오늘날 우리들의 가슴에 다시 한번 새겨주고자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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