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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인물 한국사 : 이순신 ㅣ Who? 인물 한국사 28
이수겸 지음, 스튜디오 청비 그림, 최인수 글, 방민호 외 감수 / 다산어린이 / 201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연초 6학년인 큰 아이, 2학년 둘째 아이와 함께 거제도와 통영을 다녀왔어요. 통영 이순신 공원을 방문하여 바다 풍경을 즐기며 멀리 보이는 한산도를 내려다보면서 아이들과 함께 한산도 대첩에 대하여 이야기 했었지요. 바다속에 펼쳐진 지형을 가르키며 학익진에 대하여 설명하니 2학년인 둘째는 완벽하게 이해를 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큰 아이는 왜 이곳에서 그런 병법을 사용했는지 쉽게 이해를 하더군요. 이번에 함께 읽게 된 이순신 책을 통해 2학년인 아이와 함께 그분의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1545년에 한양에서 태어난 이순신은 순임금처럼 훌륭한 임금을 모시는 훌륭한 신하가 되라는 뜻으로 순신이라 이름 지어지고 당파 싸움에 휘말려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아버지, 파직당한 할아버지의 명예를 되찾아 주길 바라는 부모님의 기대에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지만 공부보다는 활쏘기와 전쟁놀이에 더 흥미를 가집니다. 주변 지형을 활용한 전술을 이용해 전쟁놀이를 승리로 이끄는 이순신에게 동네 형인 유성룡은 병법서를 알려줍니다. 원님 행차에도 전쟁놀이의 진지이지만 전쟁에서 진지가 무너지는 것은 패전을 의미한다며 길을 돌아가도록 말하는 등 당돌함을 보이고 마을 어른들도 이젠 이순신의 전쟁놀이에 알아서 길을 돌아가게 되지요. 나이가 들며 전쟁놀이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순신은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단련은 멈추지 않았고 과거 급제를 위해 문과 공부에 더 전념하게 됩니다. 대대로 무인 집안인 방진의 사위가 된 이순신에게 방진은 무과 응시를 권유합니다. 이순신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며 줄곧 고민해 왔던,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게 되고 평생 문과 시험에 대비한 공부만 해 왔던 그는 무과 시험을 위해 몇 년을 다시 준비하게 되지요. 스물여덟 살 무과 시험 별과에 응시하지만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고 버드나무 가지로 응급 처치를 한 후 시험을 끝까지 치렀지만 말에서 떨어진 것이 감점되어 결국 불합격되고 말아요. 하지만 방진은 자신의 약점을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점을 내세우는 것도 입신의 한 방법이라며 군관을 뽑는 병과를 지원하게 하고 드디어 1576년 서른두 살의 나이로 무과 시험에 합격하게 됩니다.
이순신은 첫 번째 부임지인 함경도의 '동구비보'로 군사들을 재정비하고 해이해진 군기를 잡고 바쁜 와중에도 틈나는 대로 백성들을 돌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아 군사들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신망을 얻었고 재직하는 3년 동안 여진족에 대한 방어 태세도 철저히 갖추었어요.
한양으로 돌아와 '봉사'라는 직책으로 훈련원에서 인사에 관련된 일을 하였지만 어떠한 청탁에도 응하지 않는 강직하고 올곧은 성격 탓에 상부의 미움을 받고 오랫동안 진급하지 못한 채 변방으로 옮겨 다닙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유성룡은 이순신의 먼 친척인 이조 판서 이이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이순신은 인사권이 있는 이조 판서를 만나는 것은 사람들에게 괜한 오해를 산다며 거절하지요. 점차 떳떳하고 올바른 태도에 사람들은 그의 진심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자 곧장 아산으로 내려가 삼년상을 치른 이순신은 다시 국경 지역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3년 동안 국경 지역은 황폐해져 있었어요. 북병사 이일 장군에게 군사를 보내 주길 요청하지만 거절당하고 얼마 후 군사 충원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쳐들어온 여진족과의 힘겨운 전투에 성공하지만 전투의 결과는 참담했고 군사 충원을 거절한 일로 큰 벌을 받을까 두려워 이순신이 자신의 명을 어기고 독단으로 전투를 일으켜 군사를 잃었다고 거짓 징계를 올린 이일 장군으로 인해 첫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지요.
1589년 전라도 현감으로 부임하여 가족과 함께 하게 된 이순신은 일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걱정하는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 좌수사에 임명됩니다. 조선 수군의 실태 조사에 들어간 그는 유비무환의 마음으로 군사 훈련과 창고에 있는 무기 정비를 시작하고 수군의 핵심인 함선은 나대용의 도움으로 공격형 함선 거북선을 만들게 되지요.
임진왜란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순신은 군기를 확실히 잡아야 했기에 자신의 명을 어기는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군법으로 엄하게 다스렸어요.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부산이 함락되고 조선에 상륙한 왜군이 너무나 쉽게 조선의 성들을 차례로 점령하여 빠른 속도로 북상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출전 명령이 내려오자 드디어 5월 4일 24척의 판옥선과 어선 61척을 이끌고 부산 앞바다로 향합니다. 원균이 이끌고 온 4척의 배와 함께 옥포, 합포, 적진포 등에서 승리을 거두며 임진왜란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조선군의 첫 승리를 가져옵니다.
옥포 해전의 승리 후 일단 여수로 돌아간 이순신은 잠시도 쉬지 않고 다음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합니다. 원균의 부대가 왜군에게 쫓겨 노량으로 향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고 함대를 이끌고 노량으로 향한 이순신은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형태를 본뜬 학인진으로 견내량에 있던 왜선 70여 척 중 59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둡니다. 이 전투가 바로 '행주대첩', '진주성 대첩'과 함께 임진 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우는 '한산도 대첩'이지요.
또한 1592년 부산 절명도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는 왜군의 중심부로 쳐들어가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는 '부산포 해전'을 대승으로 이끌지만 아끼는 부하 정운을 잃는 슬픔을 겪기도 합니다.
왜장 가토가 가덕도로 향한다는 첩보에 선조가 출전을 명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첩보만 믿고 무리한 출전을 한다면 많은 병사의 희생이 따른다고 선조의 명을 거역한 죄로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되고 모진 고문후 백의종군하여 권율 장군 밑에서 일반 병사로 전투에 참여하는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됩니다. 옥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하는 아들이 걱정되어 직접 배를 타고 먼 길을 오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슬픔에 잠긴 그에게 선조는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남은 열두 척의 배로 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하여 왜선 133척에 맞서 왜선 31척을 격파하는 지형과 바다의 흐름을 이용한 완벽한 전략으로 '명량 해전'의 승리를 가져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죽음후 조정에서 왜군이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라고 하지만 이순신은 백성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며 1598년 재건한 조선 수군을 이끌고 노량 앞바다로 향합니다. 왜군 함대를 막아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며 왜선 200여 척이 침몰되는 승리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유탄에 맞은 이순신은 자신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전사하지요. 결국 싸움은 대승으로 끝나고 6년 7개월 동안 계속된 임진왜란이 끝났지만 그의 죽음에 백성들은 통곡하며 충신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가 누구를 위해 그토록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맹렬하게 싸웠는지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올곧은 성격 탓에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며 오직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싸운 그는 후에 '충무공'이라는 시호와 함께 그의 충심과 용맹함이 추대되고 세계 해군 사관 학교에서는 지금도 '한산도 대첩'에 대하여 가르치고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 해군 전략가들이 그의 전술과 삶, 성품을 높이 평가하며 칭송할 정도로 그는 온 세계의 사람들에게 길이 기억되고 있어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그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왜 그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존경받고 있는지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책을 읽으며 편하게 살 수 있는 유혹의 순간에도 자신보다는 백성과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그의 충성심,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던 그의 효심,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여건에 최선의 결과을 이끌었던 그의 지략과 용기,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왜란을 준비했던 그의 준비성에 박수를 보내게 됩니다. 오늘날 그의 일부분이라도 닮아보려고 노력하는 지도자들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건 무슨 이유때문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