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침묵은 술 병에도 있다. 꽉 차 있는데도 아무것도 안 하고 점잔 빼고 있는 것의 으뜸은 병甁이다. 이렇게 마시다보면 술병 속 침묵의 무게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바라본 것을 닮는다. 내가 죽을 때 바다를 닮은 얼굴이 되어있다면 좋겠으나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빈 술병이라도 닮기를 희망한다. 당신은 어떤가. 혹시 비씨카드나 돈의 얼굴을 하고 죽을 수도 있다고 상상해본 적 없으신가. p. 74

 


이곳에 오면 엔진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바람과 파도가 부드럽게 갈라지는 소리만 난다. 나는 물방울 행성의 얇은 껍질을 미끄러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원하는 자유는 이 정도이다. 하늘을 날기 원하는 것도 아니고 돌고래처럼 수심을 제집으로 삼자는 것도 아니다. 바다와 허공의 경계인 얇은 막, 수면이면 거처로 충분하다. p. 105

 

 

잔을 채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창 밖으로 눈이 더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렇게 되어야 해. 한잔 털어넣자 입안에서도 폭설이 내린다. 독한 쓸쓸함과 그 속의 미묘한 안온함이 제멋대로 뒤섞인, 누군가 떠나버린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누군가 곧 찾아올 것 같은, 약간은 소소하고 약간은 권태롭고 약간은 퇴폐적인 그 주점에서 술맛은 자신을 증명해냈다. p.139

 

 

작업이 정지된 조선소의 대형 크레인, 얌전히 묶여 있는 몇 척의 어선, 비어있는 물양장, 그 모든것을 어떤 흔적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폭설, 화염의 폭락같은, 흰 덩어리들의 주렴, 쏟아지는 저널, 그 풍경은 마지막 잔, 마지막 담배 한 개비, 마지막 섹스, 마지막 호흡 같은 거였다. 그래서 삶이 끝나는 순간이 이런 풍경을 배경으로 한다면 정말이지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끝이 좋으면 대부분 좋은 것이 되니까.  p. 154

 

 

  

페이지를 몇 번 씩 읽을 때마다 점점 더 깊은 감정이 생기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분명 어제 그은 밑줄 인데, 오늘 다시 읽으면 또다른 이유로 밑줄을 긋게 된다.

술을 못마시면서도 한잔 털어넣고 싶어진다.

누군가 내게  한창훈 선생님의 글은 꾸밈이 없어서 좋아졌다고, 이야기 했다.

그저 그 말을 들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샘이 났더랬다. 나 혼자만 알고 싶은 작가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 붙들고 공유하고 싶어지는 이 감정은 어찌 설명할 길이 없다.

누군가 이 새벽에 함께 술한잔 기울이자고 문을 두드린다면 문을 열어줄 용의가 있는데.하하.

오늘은 혼자서 병을 따 본다. 밑줄그은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를 안주 삼아서.

 비록 한잔밖에 못 마신다고 해도. 난 이미 글에 취해 있으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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