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1996년 6월
명동성당 부근

최루탄 내음 매캐하던
닭장차 구석

방독면 쓰고 완전무장 후
대기하던 그 찰나
눈물콧물 범벅 닦으며.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를
펼치지 않았더라면.

수없이 서울과 부산을 오가던
완행열차의 비루한 시간들 견디고.

100여 권이 넘는
그의 책들과 함께
그 무참한 세뭘을 건너오고

2020년
비 내리는 이 아침
이 책 펼칠 수 있었을까

만일 그 사월 오후에 
야구장에 가지 않았다면 
무라카미 씨는 지금 
소설가가 되었을까요

who knows? 그런 걸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만일 그날 오후에 야구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소설 쓰는 일 없이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뭐 특별한 불만이 없는 
인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 봄날 오후에 진구 야구장에 
가서 한적한 외야석에.

그 당시 진구 야구장은 
거의 비어 있었다.

누워 뒹굴며 데이브 힐튼이 
좌익수 쪽으로 멋진 2루타를 
치는 걸 보았고, 그래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라는 첫 소설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엑스트라오디너리 (심상치 않은)한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씨는 그와 비슷한 일이 
살면서 누구에게나 다 
일어난다고 생각하세요

난 잘 모르겠는데.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와 비슷한 일은 
많든 적든 누구에게나 
언젠가 일어난다고 생각해

그런 여러 가지 일이 딱하고 
제대로 결합하는 계시적인 순간이 
언젠가 올 거라고 생각하지

뭐 적어도 그런 일이 꼭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인생이 더 즐겁지 않을까.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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