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하는 지식을 추구하기 보단
알고 있는 것들
이미 알고 있음을 알아차림으로써
깨달음의 지혜로 추구하는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것은 왜 존재하는가
라는 의문을
이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눈 먼 사람에게
빛에 대해 설명해주기보다는
눈 먼 사람이 직접 눈 떠서
빛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철학이
필요한 수단이 아니라
충분한 방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https://image.aladin.co.kr/product/17942/89/cover150/k862534136_1.jpg)
미지의 것을 알기 위해서는 지금은 알지 못하는 일을 접할 필요가 있다. 지금 알지 못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절하면 알게 될 기회를 잃게 되고 알게 됨으로써 변화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잃고 만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사람 즉 타자와의 만남은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와의 해후가 가져다주는 가능성이다.
레비나스는 자칫 서로 이해하지 못해 적대적인 관계가 될 가능성이 있는 타자와의 해후에 있어 그의 철학의 핵심 개념인 얼굴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다. 다음과 같은 문단이 대표적이다.
인간에게 ‘사람을 죽이지 말지어다!‘ 하고 표현하는 ‘얼굴‘의 개념만은 자기만족을 느끼는 동안에도 혹은 우리의 능력을 시험하는 장애를 겪는 동안에도 회귀하지 않는다.
이는 현실적으로 죽이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지 죽일 수 있는 것은 타자의 얼굴을 응시하지 않는 경우뿐이다. 1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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