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몽테뉴, 사유의 힘 - 더 나은 삶보다 나다운 삶을 위한 인생문답
임재성 지음 / 필름(Feelm) / 2025년 8월
평점 :
또다시 만난 필름출판사의 도서, 이번엔 몽테뉴다. 나에겐 이런 사유와 관련된 독서가 가장 취약하다고 할 수 있는데 고등학교 시절 수우미양가에서 "가" 3종 세트였던 교과목이 수학, 가정, 윤리였기 때문이다. 열여덟 나이에 철학이 쉽다 하면 그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긴 하지만 아무튼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면 문제도 풀 수 없는 나에겐 생각과 철학과 사유에 관한 주제들은 어렵다 못해 버거웠다.
요새 들어 이런 책들이 해설과 함께 많이 나오고 있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도 있는 걸 보면 사람들은 지금 지나치게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 무언가 붙들 것이 필요한 듯하다. 나처럼.
야근이 이어지던 어느 날, 스트레스와 온갖 불편한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 차 잠을 이루지 못하던 시간,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이 책이 보여 읽기 시작했다. 심신이 피곤했지만 1장을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힘든 마음을 달래주는 처방전이었을까.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결정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판단하지 않아도 되고, 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냥 멈춰 서도 되고,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사실, 그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다.
지난주는 정말 최고 등급의 스트레스를 겪었다. 이만큼 진행된 이상 발을 뺄 수 없지만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 못하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 추구 또한 따를 예정이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고통은 더해갔다. 그때 내 결정은 그냥 흐르게 두는 것이었다. 잘 되게 하려는 마음이 더 망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해선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격한 풍랑 속에 나를 내려놓은 순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답은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화내면, 혹은 먼저 울면, 즉 먼저 감정을 드러내면 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참아봤다. 여러 상황에서 나는 참지 못한 순간 회사를 떠났다. 다른 보완장치를 마련했거나 아니거나 상관없이 나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 번 다 해놓은 밥그릇을 남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참고 견뎠더라면 나의 성과였고, 내가 받을 칭찬이었을 수도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남 좋은 일로 넘겨주고 말았다. 그 참지 못하는 분노라는 감정 때문에.
책을 읽다 보면 책이 상하는 것이 아까워 메모하거나 표시하지 못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책만큼은 정말 많이 표시해가며(접어가며) 읽었다.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될 때마다 다시 읽어보기 위하여.
p.86
누구나 감정에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 감정에 머무는 태도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화가 날 수 있지만 그 화가 나를 무너지게 둘 것인지, 아니면 나를 더 강하게 만들 계기로 심을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
p.96
버텨야만 하는 시간이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 그럴 땐 움직이기보다 멈추고, 말하기보다 조용히 견디는 일이 더 강한 선택이 된다. 견딘다는 것은 무기력함이 아니라 흔들리는 삶 앞에서도 나를 지키려는 가장 깊은 힘이다.
p.101
오늘 하루, 말없이 견디는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 침묵의 시간이 당신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그 고요 속에서 당신은 분명히 자라고 있다고. 몽테뉴처럼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p.112
그의 글은 완결을 추구하지 않았다. 흩어지고 충돌하는 사유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산만하게 보일지라도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문장이 아니라 정직한 고백이었다. 그렇게 글을 통해 그는 삶의 흔들림 속에서도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아갔다.
p.144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너무 빠르게 판단하며, 너무 쉽게 잊는다. 이런 우리에게 고전은 정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묵직한 질문 하나를 남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우리를 다시 자신에게로 이끈다. 삶은 예기치 않게 흔들리고 우리는 그 흔들림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그럴 때 한 줄의 문장이 나침반이 되어 다시 방향을 잡게 해줄 수 있다.
p.151
"말은 절반은 말하는 사람의 것이고, 절반은 듣는 사람의 것이다. 듣는 이는 말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p.166
더는 외우는 삶에 머물러선 안 된다.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 그 책 한 권을 깊이 살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넘치는 정보 속에서도 내 생각을 지키고, 유행하는 의견 앞에서도 내 판단을 세우는 힘. 그것이 오늘을 지탱하는 사유의 근력이다.
p.172
눈앞의 일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면서 마치 할 일이 부족한 것처럼 미래를 예측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호기심으로 가득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p.180
인간관계,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삶의 예기치 않은 일들 앞에서 흔들릴 때 진짜 문제는 대개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불안을 키운다. 그 시선이 두려움에 잠식되어 있거나, 자존감의 결핍에서 비롯되었거나 과거의 상처를 덧씌운 결과일 수 있다.
할 일도 많고 생각도 많은데 집에 있으면 그 생각에 파묻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일단 짐을 싸서 나왔고, 책을 읽었고, 서평을 쓴다. 찜질방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놀고, 남편은 뜨끈하게 몸을 지졌다. 적어도 나는 해야 할 일 중 세 가지는 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스스로에게 갇혀있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