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8
율리 체 지음, 이재금.이준서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든 책이든 보기 전에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작품들이 있다..

그게 실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 뜻밖의 수확으로 건져지는 경우도 있다..

나에겐 이 작품이 후자에 속했다..

책 뒷면에 적혀있는 정도의 줄거리만 알았을 땐 이 작품이 추리와 SF을 접목한 영리한 장르소설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첫페이지 프롤로그를 읽고 조금씩 그 생각을 거뒀고 본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땐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있는 건지 계속해서 의심하게 됐다..

 

책 중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느 산책하는 사람 앞에 잔잔한 호수가 있다.

호수 수면은 그에게 익숙한 세상은 반사하고 그 기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은폐한다.

커다란 나뭇가지가 수면 아래로 흘러가고 두 잔가지 끝만 각각 서로 다른 지점에서 물 밖으로 솟아 있다.

산책자는 그 잔가지들이 물 아래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걸 알고 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는 우연이 뭔지 이해한 것이다.

 

또는 이런 장면..

 

한 아이가 종이에 원 두 개를 그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대 두 원을 연결한다.

이 원들에게 그 아이의 손가락은 우연이다.

 

이처럼 우연은 우리 인생에 뜬금없이 비집고 들어오지만 우리는 그것을 꿰뚫어볼 여지가 없다..

형사 실프의 말처럼 우리는 그저 평평한 바탕 위에 있는 빨간색 작은 원에 불과하다..

 

삶에 존재하는 수많은 우연들과 그로 인해 생긴 예기치 못한 비극들..

우주와 만물의 기원, 시간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확고한 신념을 가진 두 비범한 물리학자들도 자신들의 인생을 침범한, 작지만 매우 사악한 우연과 그것이 가져온 결과에 대해선 어찌할 바를 모른다..

 

형사 실프는 범인을 굳이 범행현장으로 불러들여 내면의 심판자에게 그를 맡긴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우주와 삶과 만물을 연구해봐야 무슨 소용이랴..

자신들의 감정조차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결국 그들은 자신들 바로 곁에 있는 소중한 이들조차 떠나보낸다..

 

 

비록 다 읽긴 했지만 과연 제대로 읽은 건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전형적인 문과타입인 내겐 생소한 물리학개념들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옮긴이의 말에도 언급됐듯이 문장들이 조금 낯설었다..

은유와 사유들이 어려운 물리학 개념들과 뒤섞여 문장이 길어지고 난해해지는 탓일 테다..

하지만 그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물론 그런 난해한 문장들이 이 책을 더디게 읽게하고 완독한 후에도 책의 반도 이해 못한 것처럼 느끼게하는 주범이지만,

독특하고 풍요로운 은유들은 인물의 평범한 동작 하나, 단조로운 배경묘사 하나에도 생동감과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책의 구성과 표지도 꽤 마음에 들었다..

특히 깔끔한 흰색 바탕에 빨간색 사물함 문들이 나열돼있는 표지그림을 보며 수많은 평행우주들과 그중에서 우리들에게 유일하게 열려진 우주 하나를 무리하게 억지로 끼워맞춰 보았다..^^;

 

결과적으로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은 처음 기대했던 종류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 안에서 생각 못한 것들을 볼 수 있었던 독특한 작품이었다..

기대치를 조금 조정한다면 충분히 즐길 여지가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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