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의 복합성을 이해하고 우리가언제나 이미 복수의 실천 공동체에 영향받고 있으며 좋은 삶에 대한 경쟁적전망을 상연하는 복수의(또한 경쟁하는) 예전 안에 갇혀 있음을 인식하는 게중요하다. 현시대에서 살고 있는 예전적 동물에게 ‘순수함‘이란 없다. 나는 결코 하나의 전통이나 예전적 공동체 안에 갇혀 있지 않다. 비록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를 성화시키고 변화시키시는 일차적 공간인 교회 예배에 우선성을부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교회 예배에만 영향받지는 않으며 교회 예배가 하나님 나라의 ‘순수한 구체화인 것도 아니다. 나는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경쟁하는 여러 도제살이에 예속되어 있다.

나는 경쟁하는 욕망의 교육에동시적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리고 교회는 성례전적 기관으로서, 동시에 한백성으로서 ‘세상‘을 이루는 예전들의 연결망 안에 갇혀 있다. 따라서 예전적 (재)형성에 대한 강조는 인간을 예전적 동물, 그 사랑이 어떤 예전에 의해형성(왜곡된 습관의 피조물임을 인식하는 피조물의 인간론에 뿌리내리고 있다.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듯이 "모두가 예배한다." - P287

이는 정치신학자로서 목회자의 두 번째 기능, 건설적 기능과 연결된다. 지상도성 정치의 의례를 폭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천상의 시민권을 계발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시민권은 한 사람이 보유한 지위나 재산이 아니다. 소명과 부르심이다. 나는 캐나다 여권과캐나다 출생증명서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좋은 캐나다 시민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시민권은 권리일 뿐만 아니라 계발해야 할 덕이기도 하다. 정치신학자로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도성 시민들이 공민적 덕을 기르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 P330

둘째, 그럼에도 우리가 정치적 실현에 대한 피조물의 요청에 응답해야 할피조물로서의 소명을 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체들을 만들어 내는 문화적 일은 창조의 본성이 요구하는 바다. 십자가, 부활,
새 창조가 그 소명을 대체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갱신할 뿐이다. 특히, 약한이들을 보호하고 우리 가운데 있는 과부, 고아, 이방인들을 돌보는 정치체와정책, 체제와 제도를 만들어 가는 동시에 우리가 상업, 교육, 예술, 심지어 놀이에서 피조물로서 우리의 다양한 소명을 추구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을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소명으로 다시 바라보게 한다. 베른트 바넨베취가 주장하듯이, "비록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정치를 필요악으로 바라보려는 유혹을 받지만, 바르게 이해된 기독교 예배는 근본적으로 긍정적 태도만을 허용할 뿐이다. 모든 것을 말하고 행했을 때 필수적인 세속의일인 정치를 경멸해서는 안 되며, 사적 삶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필수 공간으로 보아야 한다. 정치의 목적은 신체적·사회적 필요를 지닌 인간을 돌보고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뒤섞인 공간(permixtum), 즉 우리의 공동의 삶이라는, 경쟁의 대상이지만 선한 공간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협력하며, 미약하더라도 지상 도성을 하나님의 도성을 향해 구부릴 수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한다. - P366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정치적 자세를 취할 때 핵심은 기다림이다. 우리는 왕국을 성취하지 않는다. 왕을 기다린다. 이것은 겁먹은 채로 기다리는 정적주의나 체념하여 냉담하게 기다리는 자세를 뜻하지 않는다. 『정의의 소명』(The Justice Calling)에서 베서니 행크 후앙(Bethany HankeHoang)과 크리스틴 디드 존슨은 하박국을 본보기로 삼는다. 불의를 슬퍼하며 하나님께 따지던 하박국은 그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면서 성루에 자리를 잡는다(합 2:1). 두 저자는 "우리가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무엇을 뜻하는가?"라고 묻는다. "우리 삶에서 성루는 무엇을 상징하며, 거기에 올라가는 데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행동을 요청하는 상황에서 기다림의 역할은 무엇인가? 기다림 자체도 행동일 수 있는가?"2" 적극적 기다림은 천상 도성의 시민들을 구별 짓는 특징으로, 세상을정세와 권세에 내주는 정적주의 및 은혜와 무관한 개선을 상상하는 행동주의 둘 다에 저항한다. 후앙과 존슨이 주장하듯이, "성루‘가 어디든지 우리가현실을 더 명확히 보기 위해 가는 곳"30이라면 나의 주장은 에클레시아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성루라는 것이다. 에클레시아의 형성적 훈련과 실천은 하나님이 우리의 지각을 성화하여" 우리가 현실을 더 명확히즉, 계시와 세상의 소망에 비추어볼 수 있게 하시는 방법이다. 에클레시아에서 우리의 사랑은 왕을 향해 재조정되고 다시 왕을 가리키며, 그다음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증언하도록 뒤섞인 공간(permixtum) 안으로 보냄받는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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