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 : 잃기일지 림LIM 젊은 작가 소설집 4
김서해 외 지음, 정우주 해설 / 열림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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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도 주제도 제각기 천차만별인 소설들을 한 권으로 읽어 볼 수 있어 즐거웠다.


처음 읽었을 때 내게 가장 와닿은 작품은 김서해 작가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이>였으나 곱씹을수록 각 작품에서 저마다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중 박소민 작가의 <지옥에 갈 수 없지만 지금은> 얘기를 하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겪은 솔은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마지막 자취를 쫓는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프랙탈 기하학이라는 낯선 수학 개념으로 복잡한 세상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반대란다, 선생은 말했다. 복잡한 구조가 자연에 있는 게 아니라, 자연이 너무 복잡해서, 이걸 설명하기 위해 만든 법칙이 프랙털이야. 수학은 세계 그 자체는 아니지만 세계를 근사한단다.’(60)


2032년, 동성혼이 법제화되었다는 소식으로 시작되는 <손가락이 미끄러지듯이>는 4대로 이루어진 대가족에서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젊은, 젊다고 하기에는 나이든 예순일곱의 낀세대 ‘나’의 혼란을 담고 있다. 결말에서 ‘나’는 자신의 윗세대이자 자신의 삶을 희생으로 이끈 오래된 신념과 ‘손가락이 미끄러지듯이’ 그러나 의도적으로 손을 놓는다.


손을 잡으면 연대의 이미지, 손을 놓으면 단절의 이미지라고 단순히 생각했던 나는 결국 누구의 손도 잡지 않고 끝나는 이 소설이 신선하게 느껴지면서도 이렇게 결말을 낸 이유가 궁금했다. 다른 손을 잡기 위한 놓음, 상대가 나를 포기할 때 한 번만 더 손을 잡고 대화를 시도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라는 작가의 답변이 기억에 남는다.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묶인 이 책에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어딘가로부터 미끄러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오랜 희생도 부정당하고 소중한 사람의 손도 놓치는 사람(<손가락이 미끄러지듯이>), 유일한 친구이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지옥에 갈 수 없지만 지금은), 생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리고 있는 것과 앞으로 잃어버릴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잃기일지>), ‘제대로 된 사랑’에 계속해서 실패하는 사람(<돼지 목에 사랑>), 자신을 ‘인간인 척하는 다른 종’처럼 느끼는 인간과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은 로봇(<심곡>). 그리고 이들은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테두리를 재구축하기 위해 시도한다.



*출판사에서 책을 지원받아 읽고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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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 (문고본)
과달루페 네텔 지음, 최이슬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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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24 올해의 책이 정해진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

서평단으로 선정돼 읽게 된 책이지만 서평단이 안 됐더라도 읽어야 했을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는 라우라라는 30대 여성의 입을 통해 전개된다. 모성은 '사회적 명령'일 뿐이며, 여성에게 출산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이고, 자식은 '언제나 자유를 제한하고 경제적 부담을 주는 존재'라는 단호한 입장의 라우라는 당혹스러운 소식을 듣는다. 같은 생각을 공유하던 친구 알리나가 이제는 임신하기를 원하며 이를 위해 애인과 피임하지 않은 지 1년이 넘었다는 것이다. 라우라는 이후 긴 노력 끝에 드디어 임신에 성공했다는 친구의 소식에 진심으로 기뻐하지만 여전히 아이를 갈망하는 여성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몇 주 전 이사 온 옆집 가족은 아이에 대한 라우라의 입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늘 지쳐 보이는 싱글맘 라우라와 언제나 화나 있는 아들 니콜라스. 니콜라스가 엄마에게 퍼붓는 욕설은 벽을 타고 라우라에게까지 흘러들어오고, 라우라는 이들이 이웃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멕시코의 페미니스트 여성 시인의 이름을 따 아이의 이름을 '이네스'로 지은 알리나는 의사로부터 예상치 못한 진단을 받는다. 아이의 뇌가 최근 두 달간 전혀 자라지 않았으며 모체와 분리되는 순간 죽게 된다는 것이다. 


만남과 동시에 이별하는 것이 모성에 대한 유일한 경험이 될 알리나와 그의 딸 이네스, 죽은 남편이 남기고 간 학대의 경험으로 괴로워하는 도리스와 그의 아들 니콜라스, 임신에 대한 단호한 신념으로 나팔관을 묶은 라우라와 그의 엄마 등 이 책은 여성 인물들을 통해 임신, 출산, 육아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을 보여준다. 


멕시코라는 장소의 생소함을 제외하면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들은 현시대 대한민국과 매우 유사하다. 결혼과 임신에 대한 젊은 여성들의 회의감, 이들이 이기적이라고 낙인 찍는 사회, 아이를 거부하는 딸과 어머니 간의 갈등, 육아하는 여성들의 '불치병 같은 피로감', 그리고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이자 자기 삶에 더욱 집중하는 한 방식으로서 '여성의 역할'을 거부해 온 연대자가 갑자기 다른 삶의 궤도에 올랐을 때 느낄 수 있는 실망감은 이 시대의 젊은 여성들이 흔히 겪거나 미리 상상하며 걱정하는 것들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국경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었다. 알리나는 모성을 여성들에게 바람직한 운명으로 수락한 반면, 나는 바로 그 모성을 피하기 위해 수술대에 올랐으니까. (33p)


이 책에는 자녀가 있는 여성들이 임신을 거부한 라우라에게 그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하는 장면이 두 번이나 나온다. 그러나 이들은 아이를 갖기로 했던 자신의 선택 역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내가 그동안 임신, 출산과 관련한 여성의 선택을 '잘못된'/'옳은' 선택이라는 두 가지 편협한 시선으로만 봐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 엄마의 고충을 보며 역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안도하는 것과 아이를 낳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있다며 아이 없는 여자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 이 두 입장에는 모두 그럴듯한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방식을 넘어 다른 방식으로 모성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소설 속 엄마들은 사회가 '자연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모성과 불화한다. 갓 태어난 아기가 죽기를 바라기도 하고 아이를 두려워하며 방치하기도 한다. 라우라는 사회적인 연결을 거부하며 고립되는 이들의 구체적인 삶을 알아가며 지속적인 관심과 돌봄을 제공한다. 이들이 다른 관계망에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러한 연결 속에서 삶과 조금씩 더 가까워진다. 이로써 분명해지는 것은 모성은 자연스러운 것도, 불행스러운 것도, 아이가 자라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도 아니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 속의 관계'(326p)라는 점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이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고 자신의 삶을 확장할 수 있다. 


-“뭐, 벌써 나한테는 많은 걸 가르쳐줬지. 그중 하나는 사랑은 가장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온다는 거랑, 또 모든 일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다는 거.” (311p)


읽기 전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고 어쩌면 끝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족할지언정 같은 자리에 손을 겹쳐 보는 것만으로도, 일부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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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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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 명의 성인이 거주하는 집에 단 한 명도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 없다니.'

주인공 수경은 부모님과 남편, 두 명의 조카들과 좁은 집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한때 집안의 경제적인 부분을 도맡았던 수경이지만, 어느 날 동료가 자신의 술잔에 수면제를 섞은 이후로 일을 그만두고 사람과의 만남을 일체 줄여왔다. 그러나 수경은 차츰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한다. 수경을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 둔 여숙,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날린 천식, 4년 전 주식으로 돈을 벌겠다며 일을 그만두었지만 이렇다할 성과 없이 마이너스만 기록하는 우재.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수경은 플랫폼을 통해 배달 일을 시작하고, 이를 시작으로 나머지 가족들 또한 차례로 플랫폼 노동에 뛰어든다. 헬프 미 시스터는 플랫폼 노동에 종사하는 가족의 이야기다. 


-이서수 작가의 소설을 읽다보면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인식하게 된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 다 힘들게 살아간다는 사실이 용기와 위로가 되는 시대. 그런 시대에서는 단점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열악한 노동이 유일한 도피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헬프 미 시스터』에서는 인물들이 어느 세대에 속하느냐에 따라 플랫폼이 갖는 의미는 달라진다. 이 책에는 각기 다른 세대에 속하는 여성 인물 여숙, 수경, 보라, 은지가 한 공간에 모여 각자 상념에 잠기는 장면이 등장한다. 소설이 각자의 머릿속을 차례로 들여다보는 장면은 롱테이크로 촬영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가장 마지막에 생각의 공을 받아든 은지는 틴챗을 통해 판매한 자신의 사진이 공적인 사이트에 전시되는 불행만 미래를 상상한다. 소설은 '기적이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모든 게 기적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라며 작게나마 희망을 내포하며 마무리 된다. 그렇다면 은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틴챗'은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어플로, 원래는 청소년들의 소통을 위해 개설되었지만 지금은 미성년자와 접촉하려는 성인들로 드글드글한 공간이다. 이서수 작가님의 소설은 현실과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결말에 다다른지 한참 된 지금까지도 내내 은지가 걱정된다.

'나는 살아봤잖아. 틴챗 있는 시대에 여중생으로 살아봤잖아. /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이름만 바뀐 또 다른 틴챗에 아이들은 끊임없이 빠져들 거고........ 그걸로 봐. 어른들은 돈을 벌고 있잖아.'


-플랫폼 노동과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여성 대상 약물 범죄와 미성년자 성착취 문제, 도박에 빠지는 청소년들과 

주식, 노인을 배제하는 첨단 사회와 노후대책 문제. 이 소설은 현실의 총체가 아닌가..! 그런데 묘하게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이유는 소설에 등장하는 가족들이 단란하기 때문인 것 같다. 『헬프 미 시스터』의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를 힐난하지 않고,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단란한 가족 이야기는 오랜만이라서 놀랍기도 했고 반갑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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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도 편집이 되나요?
이지은 지음 / 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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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출판편집자를 희망하는 예비 출판편집자다. 나보다 먼저 편집자의 길을 걸어온 분에게 편집자라는 직업의 현실과 업계의 상황을 듣고 귀가했던 날이 생각난다. 출판계는 단군 이래로 불황이라는 말과 편집자는 박봉이라는 말, 길은 많으니 조금이라도 더 어릴 때 다른 길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는 말. 흔하게 들어온 이야기였지만,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맥이 탁 풀렸다. 아직 결정의 기로에서 서성이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따끔한 조언이자, 어쩌면 정말 후배가 될 수도 있는 사람에게 나누는 애정 어린 조언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출판편집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나는 내가 정말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하는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이 책을 기대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 출판편집자로서 정식으로 일해본 적이 없기에 편집자의 일 이야기에 늘 목말라 있지만, 이때의 경험으로 편집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내심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내 세계는 점점 넓어집니다’라는 문구를 보고서는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정말로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직업을 향한 애정이 담긴 이야기.

이 책은 15년 동안 책 만드는 삶을 살아온 편집자가 자신을 스쳐 간 생각과 경험들, 고민과 보람들을 담은 책이다. 어떻게 일을 하는지, 책 한 권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어떤 사람들의 손을 거치는지, 어떤 고민을 통해 어떤 원칙을 세웠는지, 지속 가능한 ‘일’을 위해 어떤 시도를 해왔는지. 책과,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삶을 이야기한다.

 

한 업계에서 15년 차. 여러 산전수전을 겪고 나서도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 퇴색되지 않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은 책 만드는 일은 협업이라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다양한 사람과 얼마나 많은 소통이 오가야 할까. 그것을 생각하니 입이 떡 벌어졌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저자는 협업에 있어 꼭 필요한 자세는 배려라고 말한다. 친절함의 미덕. 오랜 경험으로 축적한 것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상황을 주도하는 법이 아니라 배려를 건네는 것이라니. 무언가 초월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만드는 편집자의 일은 (비록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편집자의 일인지 정확히 구분되지는 않지만) 능동적인 것 같다. 누가 시키기 때문에 그저 해치우는 식으로 처리하는 게 아니라 책을 위해, 저자를 위해, 그리고 편집자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 나도 그런 일이 하고 싶다. “일이 잘 되게 하는 일이 나를 위한 일”이라는 부분이 있다. 결국 저자의 ‘좋아하는 마음’에는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도 있는 것이 아닐까.

 

작가와 편집자의 관계에서 편집자의 역할은 “애정과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할 수 있어요. 지금처럼만 써주세요.

무엇이든 쓰면, 그다음은 제가 정리해볼게요.”(29p)

자신의 일을 향한 애정이 가득 담긴 이 책을 읽으며, 어떨 때는 저자가 출판편집자를 준비하는 내게 ‘괜찮아. 지금처럼 쭉 밀고 나가!’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내 인생에도 편집자와 같은 존재가 필요했나 보다.

저자가 가진 ‘좋아하는 마음’이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책을 제공해 주신 달 감사합니다.

 

나는 책을 만드는 일이 이렇게나 좋다. 시간을 돌려서 직업을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이 길을 처음부터 제대로 걷고 싶을 만큼.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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