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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
이동호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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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잡아먹힐 거라면, 살아 있는 동안 행복했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책의 1부는 저자가 돼지를 데려와 키우는 내용으로, 2부는 키운 돼지를 도축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와 공장식 축산의 현주소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가 돼지를 키우고 책을 쓰게 된 이유가 프롤로그에 제시되어 있다. '결국 잡아먹힐 거라면, 살아 있는 동안 행복했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이것은 채식에 관심을 갖고 시작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채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거치는 아이러니적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저자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저자는 담담하고 유쾌한 문체로 1부와 2부를 전개한다. 생동감 있는 문장과 그림은 저자의 돼지우리를 쉽게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오염은 동물을 키우는 것 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염은 동물을 '과도하게 밀집시켜' 키우면서 생겨난다. 인간은 돼지를 먹는다. 그럼 돼지는? 나는 돼지가 무엇을 먹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전세계 농지의 83퍼센트는 가축을 기르고 먹이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고 한다. 환경과 인간을 위해 육류 소비를 줄여야 한다. 우리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책처럼 '돼지와 내 건강은 연결되어 있다'. '동물은 인간에게 값싼 고기만 제공하면 되는 공산품'이 아니다.

2부에는 본격적으로 돼지를 잡는 내용이 나온다. '어떤 예의'. 이 말은 책장을 넘기는 손길을 멈추게 했다. 저자는 돼지를 키움으로써 도축할 때의 '어떤 예의'를 가질 수 있었다.우리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완전히 육류를 소비하지 않겠다는 어려운 다짐이나 그런 것이 무슨 가치가 있냐는 회의적인 질문이 아니라, 육류를 소비함에 있어 '어떤 예의'를 갖추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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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여자들
다이애나 클라크 지음, 변용란 옮김 / 창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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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즈는 육체에 대한 별난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 미디어가 내세우는 정형화된 육체에 어긋나는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나의 몸을 거부하는 순간, '나'는 점점 먼 곳으로 사라진다. 


로즈는 Thin Girls를 일일이 구분하지 못한다. 그들은 주체적 개인을 상실했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시설의 여자들은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다. 로즈의 독백은 끊임없이 자신의 몸에 대한 거부를 드러낸다. 로즈는 이것을 '침입자가 된 기분'이라고 표현한다. 기존의 몸을 부정하면서 로즈는 '새로운' 몸을 긍정하게 된다. 마른 몸을 위해 스스로의 욕구를 통제하는 것으로부터 기쁨을 느낀다. 여성들은 정형화된 몸을 위해 스스로를 억압하고 통제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기쁨이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을 억제하는 것을 기뻐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기쁨'이 아니라는 것은 이런 것을 말한다. 소위 말하는 '못나고 뚱뚱한' 여자들은 미디어에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예쁘고 마른' 모습으로 '변신'해야 한다. 우리는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미디어의 세뇌를 합리화하면서 그런 변신을 해 왔다. 사회는 '아름다운 여자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마치 그런 것들이 모든 여성에게 어울리는 옷이라는 것처럼.


『마른 여자들』은 여성의 몸에 대한 이슈 외에 퀴어에 대해서도 다룬다. 로즈는 십대 시절부터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제미마 같은 인기 여학생을 향한 감정을 동경과 모방으로 치환한다. 작중 등장하는 제이램은 로즈가 시설에서 만난 남성 연인이다. 로즈는 제이램과 유리창 너머로 꽉 막힌 소통을 하고, 육체적 사랑을 나눈다. 제이램은 로즈의 상상 속 연인이다. 로즈는 '사랑'과 '함께 늙는 노년'을 상상하지만 제이램은 로즈와 파티에서 만나 관계를 갖는 것을 상상해왔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부정하며 제이램과 성애적 관계맺기를 시도한 로즈는 그의 음경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다. 제이램은 로즈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짜 연인이고, 로즈는 그러한 행위로부터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마른 여자들』은 가스라이팅에 대해서도 다룬다. 릴리는 아이가 있는 유부남 필과 교제하면서, 다이어트 사업으로 돈을 벌고 있는 그의 권유를 따라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필과 그의 부인 라라 백스가 만든 다이어트 식품을 먹는다. 릴리는 '사랑'받는 여자가 되기 위해 필의 요구와 권유를 무조건적으로 따른다. 안타까운 점은 음식을 거부하는 로즈 자신도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즈는 자기를 통제한다는 것에서 오는 기쁨, 그리고 마른 모습인 자신을 포기할 수 없다. 프로아나 모임은 잠깐 동안 지속되다가, 동창 로런이 죽고 플리의 건강이 악화된 후 해체된다.


로즈는 프로아나 모임의 로런과 한때 쌍둥이의 우상이었던 캣 미첼스의 죽음을 겪는다. 릴리를 위해 속임수를 써 시설에서 나왔던 로즈는 밈과의 재회 이후 본격적인 회복을 결심한다. 마른 여자들은 '나'를 존중하기 시작한다. 로즈는 밈의 할머니 그레이스 그린의 집에서 회복을 시작한다. 스스로를 치유하며 그림을 그리고, 요리를 한다. 로즈는 그림을 통해, 릴리는 글을 통해 깊고 오래된 상처에서 벗어난다.


라라 백스가 판매한 다이어트 식품으로 익명의 여성이 죽고, 릴리가 뇌진탕을 일으킨 뒤 이들은 한자리에 모인다. 릴리, 로즈, 밈, 그레이스, 그리고 라라 백스까지. 라라 백스는 인스타그램을 지운 것을 질책하는 필의 전화를 받지만, 밈이 그것을 끊는다. 이 장면은 자기 자신/남성/사회로부터 받던 학대에서 벗어난/벗어나기 위한 여성들의 연대가 시작되는 순간으로 보였다.


사회와 미디어는 끊임없이 여성을 옥죈다. 옮긴이의 말에 있듯이, '여성의 몸은 숫자로 재단'된다. 숫자로 재단할 수 없는 여성의 몸은 비정상으로 치부된다. 작가는 로즈의 입을 빌려 '여성의 몸에 대한 언급을 중단하라'고 말한다. 언급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요즘은 '얼평/몸평'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면서, '예쁘다'고 말하는 것 또한 '평가'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타인의 몸에 대한 언급 자체를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몸은 오롯이 나의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를 찾기 위해 힘겹게 싸우는 여성들의 경험을 그리고 있다. 『마른 여자들』의 저자 다이애나 클라크는 등장인물들의 아픔을 담담하게 적어내려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마치 그들의 이야기가 내 것인 듯한 경험을 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이야기'보다는 '모두의 이야기'에 가까울 것이다. 나와 내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 나는 전혀 모르는 지구 반대편 여성의 이야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건강한 식이요법의 중요성이나 불륜과 가스라이팅, 퀴어적 코드, 자매애 등의 지엽적인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600쪽이 넘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진정한 나를 마주하는 것'을 강조한다. 소설 내내 반복해서 나오는 어구처럼 말이다.


"당신만의 평화를 지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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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동자 안의 지옥 - 모성과 광기에 대하여
캐서린 조 지음, 김수민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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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 눈동자 안의 지옥: 모성과 광기에 대하여」라는 제목에 이끌려 창비의 서평단 활동에 참여했다. 책의 내용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전무했다. 어쩌면 모성에서 출발해 광기로 변하는 어떤 모호한 감정을 다룬 불안한 텍스트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기대가 있어서인지, 가제본의 3분의 2정도 읽었을 때까지는 다소 지루했다. 내용의 주를 이루리라 예상했던 '모성'도 '광기'도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 책은 캐서린 조가 차분한 어조로 써내려간 입원 일지로 보일 만큼 평범했다. 그러나 이 덤덤한 문체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텍스트들이 캐서린 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친근하게 우리 곁에 있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솔직해지지 않고서는, 스스로와의 투쟁을 하지 않고서는 존재 자체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


캐서린 조는 산후정신증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며, 스스로도 이렇게 썼다. '내 정신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캐서린 조가 기록을 시작한 이유는 이것이 아니었을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산후정신증을, 일단은 현재의 자신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아까 말했듯 캐서린 조는 상당히 차분한 태도로 일관한다. 흥미로웠던 것은 과거의 서술과 현재의 서술 시제가 의도적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캐서린에게 산후정신증은 현재고, 지난 날들은 과거다. 어찌됐건 그는 정체성을 잃는 와중에서 자신의 삶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정지되어 있는 순간에도 기록을 멈추지 않으면서.


차분한 텍스트 속에 도사리고 있던 모성과 광기는 가제본의 후반부로 갈수록 모습을 드러낸다. 캐서린이 제임스를 만났을 때, 캐서린은 케이토의 이름을 '잊고 있었다. 내게 그 이름은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임신의 과정에서 '나'를 잃어가기 시작했고, 자신을 '운반자'라거나 '아기를 위해 존재하는, 하라는 대로 하는 포유동물'처럼 느끼기도 한다. 캐서린의 감정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생명의 잉태와 출산의 과정은 신비롭고 신성한 것, 침해될 수 없는 고결함 비슷한 것이라고 학습해왔다. 그러나 「네 눈동자 안의 지옥」에서 마주하는 광기는 이런 것들과 사뭇 거리가 있다. 캐서린은 자신이 더 이상 '독립체'가 아님을 안다. 케이토의 존재가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것도 알지만, 캐서린은 의심의 여지 없이 케이토를 사랑한다. 가제본의 후반부는 정체성의 혼란으로부터 오는 광기와 케이토를 향한 모성이 교차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숭고한 것으로만 포장되었던 모성 옆에 '광기'라는 이름의 '나'를 내세우면서, 글은 새로운 장을 펼친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감춰졌던 이야기들을 향해.


*본 서평은 창비 「네 눈동자 안의 지옥: 모성과 광기에 대하여」 서평단에 제공된 가제본을 읽고 썼습니다.


#네눈동자안의지옥 #캐서린조 #창비스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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