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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점
김희재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2월
평점 :
한국소설 : 소실점
누구나 사회적 자아와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실미도'와 '공공의 적' 등 영화 각본을 주로 맡아왔던 김희재 작가의 첫 소설이라는 '소실점'. 이 소설에서는 둥글게 살아가기 위해 외면한 취미라던지, 사회적 체면을 의식해 숨기고 있는 비밀같은 것. 그런 진정한 자아와 사회적 자아 사이의 갭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네가 인식한 나는 나 자체가 아니라 너의 시각을 통과한 나이고, 그것은 나의 실존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 - p. 154
'여자' 시리즈는 제가 필사적으로 그 사람을 알아가면서 발견한, 어쩌면 선우만이 아니라, 여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겪고 있는 자아의 갭(gap)과 그 폭이 만들어낸 갈등과 고민을 이미지화한 거니까요. - p. 174
어느 날 잘 나가는 아나운서이자 메인 뉴스의 앵커인 최선우가 알몸의 변사체로 발견한다. 발견된 장소는 미술교사이자 유명한 그림 작가인 서인하의 저택. 사체에는 강간의 흔적도 남아있다. 공인이니만큼 대한민국이 들썩이고 유능한 검사가 이 사건에 배정된다. 경찰 진술때에는 무죄인 것 같은 느낌을 주다가 검사와 만난 순간 바뀌는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늘 그래 왔다. 따분한 사람이 되지 않을 정도의 오락과 취미를 유지했지만 중고등학교 때도 도를 넘어서본 적이 없었다. 도를 넘어서는 즐거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즐거울 것이고, 재미있을 것이라는 친구들의 유혹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과 재미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가가 따를 것임을 일찌감치 알아버렸다. - p. 207
그렇게 용의자인 서인하가 자신과 죽은 최선우는 sm을 즐기는 파트너였을 뿐이라고 노골적으로 묘사하며,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검사는 점차 설득이 되어가는 자신을 느끼고 혼란을 느낀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주장하는 그녀는 머리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고고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사람에게 갭이 있다지만 서인하가 주장하는 일들은 정말 터무니없었고 고인을 모욕하는 행위로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진술에는 일관성이 있었고, 허세라고만 느껴졌던 묘사가 정황과 맞아떨어진다.
최선우에게서 보았던 것이 결국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사회 속의 인간, 관계 속의 인간으로 살기 위해 버려둔 또 다른 자아를 누구나 갖고 있다고. - p. 282
심지어 부검 결과도 애매하다. sm을 즐기는 격렬한 섹스의 흔적일 수도 있으며 결박당한 채 강간당한 사체라고도 볼 수 있다는 진술을 들으며 관련자들은 점차 혼란에 빠져만 간다. 밝혀진 사실만으로는 15년형밖에 내릴 수가 없고 최선우의 배경을 고려할 때 그렇게 된다면 공분을 살 것은 물론, 그녀의 남편에게 큰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머리가 아파만 오던 그 때. 검사는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신이 그녀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만이 그녀의 본질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서인하는 살해 혐의를 부인한다. 그에게 휘둘리지 않고 재판은 진행되고, 과학 수사를 테마로 갔던 해외 연수에서 경험한 다양한 테크닉, 특히 행동관찰을 통해 범인이 자백하지 않은 사실을 파악해내는 기술이나 진술 분석을 통해, 주변에 일어난 여성을 상대로 한 악질 방화사건과도 맞물리는 정황을 캐치하게 된다. 사건은 급 물살을 타고 흐른다.
소실점. 2차원의 평면에 원근법과 입체감이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준이 되는 선을 연결하는 방법. (중략) 소실점을 하나로도 할 수 있고, 둘로도 할 수 있고, 셋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소실점 하나로는 소실점 셋을 써야만 그릴 수 있는 높은 빌딩 같은 것을 그릴 수 없죠. - p. 287
최선우를 똑바로 보기 위해 매 순간 새로운 소실점을 찍고, 제 위치를 바꿔가며 그녀를 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결코 움직이지 않고, 자신이 한 번 찍은 소실점에 변동없이, 그 구도 안에 선우를 밀어 넣은 사람들은 보지 못했던 모습을, 저는 그래서 볼 수 있었고, 저는 그래서...(중략) 저는 행복했습니다. 제가 선우를 그렇게 볼 수 있는 사람이어서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p. 288
찬찬히 전개해나가는 듯 하지만 충격을 훅 몰아치는 전개로 지루함 하나 없이 결말까지 나 또한 급한 마음으로 읽어내리게 되는 책 '소실점'. 이 모습이 진실인지, 저 모습이 진실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모습을 바꿔가는 서인하가 결말부에서 최선우를 회상하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참 인상깊었다.
서인하는 검사를 처음 만났을 때의 악질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점점 더 선이 얇아지고 투명해져가는 느낌을 준다. 평면에 원근과 입체감을 주기 위한 소실점. 책의 제목과 같은 이 단어가 이야기의 본질을 점점 말해준다. 심리 스릴러, 범죄 추리 소설을 표방하는 이 이야기의 근원은 결국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참 감각적인 묘사로 흥미롭게 풀어놓은 이 소설을 추천한다.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흥미로운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