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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치하야 아카네 지음, 박귀영 옮김 / 콤마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일본 소설 : 흔적
작품의 목차가 참 인상깊다. 불꽃, 손자국, 반지, 화상, 비늘, 음악. 이런 단순하면서 마음을 움직이는 단어들이 참 좋다.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사랑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렇기에 이 모든 목차를 관통하는 제목을 '흔적'이라 지었나보다. 2013년 제150회 나오키상에 후보에 올랐으며, 같은 해 제20회 시마세 연애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치하야 아카네의 '흔적'은 6가지 단편소설집이다. 에쿠니 가오리와 요시모토 바나나를 이을 일본 차세대 감성 소설 작가로 주목받는 치하야 아카네의 이야기라고 하니 더더욱 궁금해지는 소설집. 여섯 남녀의 살아온 인생이 담겨있을 것 같은 흔적. 책을 읽고 그들의 흔적을 읽어내고싶어 책을 펼쳐들었다.
남자는 사라지지 않는 불꽃을 줬다. 그것은 잿불로 남아, 나 안을 채우고 있다. - p. 38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문장이 많은 책은 오랜만이었다. 각기 다른 여섯 남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 속의 인물들은 알게모르게 서로 얽혀있다. 결혼하기 전 관계성과 변화에 대해 두려워하는 여자와 그녀에게 사라지지 않는 불꽃을 주고 스러진 남자, 그 남자가 죽고 난 뒤에야 그의 그림자를 느낀 부하직원, '보통'이라는 커트라인에 집착하고 특별함에 대해 동경하며 그로 채워지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는 그의 아내와 어느 낡은 아파트의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이웃집에 얹혀 사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자학을 시작한 아름다운 여자, 그녀를 재워주고 있는 남자, 그녀가 자주 찾아가는 술집에서 피들을 연주하는 여자와 수족관 직원. 이렇게 총 6개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낼 때는 나오지 않은 주인공의 이름이 다른 인물의 장에서 무심하게 툭 튀어 나오는 등, 소설 내엔 그들이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각 파트마다 관계성이 이어지며 그들의 흔적이 책 안에 들러붙어 있다.
남자가 죽은 것은 반년 전. 죽기 전에는 딱히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그런데 죽은 그 순간, 그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 p. 43
그들은 사랑을 찾아 헤메고, 사랑에 상처를 받아 그 흉터를 흔적으로 남겨 현실을 살아간다. 이들은 각각의 불꽃, 손자국, 반지, 화상, 비늘, 음악의 각 파트에서 사라지지 않는 불꽃, 옥상에서 걸터앉아 남긴 손자국, 하얗게 남은 혹은 그림으로 남아버린 반지자국, 등 뒤에 화상처럼 남은 흔적들, 방 구석구석 떨어져있는 비늘같은 콘텍트렌즈, 내일 세상에 끝난다 해도 물고기도 사람도 사랑은 할 것이라고 알려준 음악까지. 그 파트의 주인공에게 목차와도 같은 흔적을 남긴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단편소설들은 사랑의 영원이나 행복에 대해 다룬다기 보다 사랑의 부재나 상실, 혹은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고 싶어하는 수단으로 다루며 그에 따른 상처 등의 흔적을 이야기한다.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며 그것을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어떻게 확인받고싶어하는지, 그로 인해 자해까지도 실행하게 되는 그 강렬한 흔적들. 그에 따른 감정들. 그로 인해 그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를 실감하고 사랑에 대해 재정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짧은 페이지의 책을 그들의 감정에 끌려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며칠에 걸쳐 읽어야만 했다. 그렇게 책을 전부 읽고나니 참 마음이 먹먹해진다. 이 책 또한 나에게 흔적을 남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