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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 ㅣ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평점 :
이탈리아 소설 : 나의 눈부신 친구
여자아이들의 관계란 얼마나 미묘한지. 서로 좋아하면서도 시기하고, 견제하면서도 신뢰한다. 나폴리 4부작은 나폴리를 배경으로 릴라와 레누라는 두 여자의 60년 우정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시리즈의 첫 권인 '나의 눈부신 친구'는 그 중 유년기와 사춘기를 다루고 있다. 나와 릴라는 오래된 친구이다. 그런 릴라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녀는 실제로 그 일을 해낸다. 화가 난 나는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써내려나간다. 그렇게 시리즈가 시작된다.
유년기의 소제목은 '돈 아킬레 이야기'이다. 유년기의 가장 강렬한 사건을 응축시킨 제목. 어릴때 무언가 실체 없는 공포에 시달릴 수 있다. 릴라와 '나'에게는 그것이 돈 아킬레였다. 그는 고리대금업자였고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상상속의 그는 몸집이 크고 못생겼고 또 괴물 같다. 그런 그가 어느날 살해당한다. 그것은 유년기에 가장 끔찍한 사건이었으며 릴라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는 릴라와 초등학교 1학년때 만나게 된다. 당시는 모두에게 죽음이 가까운 시대였다. 파상풍, 전쟁, 폭탄에 결핵 등으로 죽을 수 있던 시절.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이 학교에서 뛰어난 것을 동기로 삼아 여자아이들에게 돌팔매질을 한다. 모두가 도망가지만 릴라만은 침착하게 관찰하고 따라한다. 릴라는 못 된 아이라고 생각하는 '나'. 그렇지만 그런 그녀를 내버려둘 수 없던 '나'. 어느 순간 '나'는 릴라와 함께 돌팔매를 하고 있다.
그렇게 함께하게 된 릴라는 거침없고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이 가득하다. 심지어 머리가 좋아 모두가 알파벳과 숫자를 배울 때 글자를 이미 깨우쳤다. 누가 가르쳐줬냐는 말에 그녀는 말한다. "제가요."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아빠의 입을 빌어 말한다. 1등이 아니라면 넌 일을 해야하게 될거야. 줄곧 최고였기에 선생님 옆자리였던 나는 그 자리를 릴라에게 빼앗긴 후 질투하게 된다. 나는 질투나 증오와 같은 감정에 대응하기 위해 릴라를 인정하는 노선을 취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삼총사가 되았지만 전교 1등인 내가 이 그룹 안에서는 언제나 3등이었다. 나는 릴라가 카르멜라 쪽으로 몸을 더 가까이 할 때마다 고통스러웠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버리고 싶었다 - p. 100
'나'는 중학 진학을 위한 라틴어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으나 집안형편으로 인해 릴라는 수업참여도, 중학진학도 불가능하게 된다. '나'의 중학진학 결정 후 릴라는 '나' 뿐만이 아니라 카르멜라와 사귀게 된다.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와 친해져서 자신과 소원해지면 얼마나 서운하고 분노하고 자신이 못나게 느껴지는지에 관한 감정들이 잘 나타나 있다. 중학 진학을 못 하게 된 릴라는 고통받고 악랄해져갔고 '나'는 처음엔 불편했지만 그녀에게 우월감을 과시하게 된다. 릴라도 그것을 눈치채지만 그녀의 분노를 감당하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그녀의 가족들이 된다. '나'는 점점 더 공부해 몰입해가고 성실한 모범생이 되어간다. 처음엔 지지부진했으나 릴라와 공부를 시작한 후 전교1등을 하게 된다. 그 사실을 전하지만 릴라는 자신이 있었으면 1등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진정한 1등이 없는 상태해서의 1등이라고 자괴감에 빠지는 '나'.
드디어 릴라가 자신도 나만큼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게 증명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았다. - p. 212
사춘기는 '구두이야기'라는 소제목을 가지고 있다. 릴라는 먼저 여성화되는 '나'의 신체와 진학을 함에 따라 릴라보다 뛰어나질 것을 경계하듯이 '나'를 앞지르려한다. '나'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고 그 곳에서는 라틴어 뿐 아니라 그리스어를 배우는데 그 사실을 릴라에게 말하자 릴라는 그 날로부터 '나'에게 말하지 않고 그리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것을 알고 언제나 릴라는 나에게 앞지르려고 하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여전히 릴라와 함께 공부를 했고, 고등학교에서도 여전히 우수하고 남자친구까지 생기자 릴라는 서글퍼하는 듯 보인다. 릴라 얘기를 떠올릴 때면 비교대상 중 하나였던 '나'의 여드름도 가라앉기 시작한다.
원래 알던 사상이 깨어지거나 지식의 폭이 넓어질 때 혹은 알던 사람이 낯선 이로 보일 때 경계의 해체라는 표현을 쓴다. 릴라가 신발을 만들면서 상상한 미래가 현실로 다가오지 않자 릴라의 오빠가 그녀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던 양 폭력적으로 변하게 된다. 릴라는 충격을 받고 경계의 해체를 겪게 된다. 그로 인해 '분해되는' 듯한 경험을 하는 릴라는 그에게 헛된 바람을 불어넣은 것을 후회하며 구두를 하나 만든 것으로 족하고 독서와 공부에도 흥미를 잃게 된다. 그러자 '나' 또한 그 일들이 별 것 아니고 그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
동네의 범주를 벗어난 외부세계의 사물과 사람, 풍경과 책에 쓰인 사상을 대하면서도 릴라를 일종의 정신적 지지대이자 자극제로 간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의미한다. - p. 246
'나'는 선생님의 권유로 이스키아섬에 휴가를 가게 된다. '나'는 거기서 꽃처럼 피어난다. 머리는 다시 금발로 변했고 여드름은 사라지고 온몸이 태닝되어 매력적인 여자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 곳에서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 다시 돌아온 '나'는 처음으로 릴라에게 우위일 수 있는 사건임에도 감추고 다시 여드름이 난 모범생으로 돌아간다.
이 일은 내게 없는 것이 그녀에게 있고 그녀에게 없는 것이 내게 있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해주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계속되는 이 게임은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괴로웠지만 우리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만들었다. - pp. 343-344
'나'는 고등학교에서 모범생의 역할에 충실하고, 릴라는 구두를 만들던 것을 중단하고 집안일에 충실한다. 그러던 중 아름답고 매혹적인 릴라에게는 여럿이 계속 대시를 해오는데 그 중 릴라가 혐오하는 인물이 약혼자처럼 굴고 부모님도 흡족하게 여기자 다른 사람과 친해지고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그리고 릴라는 결혼식을 올리고, 그 곳에서 충격적인 진실을 접하게 된다. 결혼식은 정말 모두의 욕망이 드러나는 곳이었다. 다들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났고, 그리고 마지막의 반전으로 인해 다음권이 기다려지게 만든다.
넌 내 눈부신 친구잖아. 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남녀를 통틀어서 말이야. - p.416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시선으로 릴라를 '나의 눈부신 친구'로 바라보고 있지만 결국 릴라 또한 나에게 은밀한 열등감과 질투를 가지고 '나'를 '눈부신 친구'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로 허물을 드러내고 고난을 알릴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정말 '애증'이라는 것이 딱 알맞아 보이는 관계. 두 인물이 각각 어떤 성장배경을 지니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서로를, 혹은 세상을 대하는지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서로의 가장 신뢰하는 지지자이자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은밀한 라이벌이었던 둘. 첫 독서에는 둘의 관계에 중점을 뒀지만 격동의 시기였기에 책에는 나치, 파시즘, 전쟁, 고통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니 시대 배경을 고려해서 다시 한 번 읽어봐도 재미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