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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플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언니가 역에 없다.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다. (중략) 문을 연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다. - p. 29
영화나 공연을 볼 때는 시놉조차 보지 않고 장르만 파악해 전혀 내용을 모르는 상태로 가서 작품을 즐기는 걸 선호하지만, 책을 읽을 때는 제 취향이 맞는지 어느 정도 파악하게 읽게 됩니다. 도서관에서 빌려볼 때는 상관없지만 제 손으로 들어올 책은 제 공간에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책의 문장까지 훑어보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책은 특히나 눈에 꽂히는 부분이 있어 선택하게 되었어요. 묘사와 진행이 흥미로웠던 이 작품은 작가 플린 베리의 데뷔작이라고 하는데요.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장이 굉장히 섬세한 느낌이라 다음에도 찾아보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충격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어주면 좋겠지만 이미 슬픔이 침투하고 말았다. 아까 구급대원이 언니의 목에 손가락을 댄 순간, 슬픔은 단두대 칼날처럼 떨어졌다. - p. 37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라는 책 제목에서 파악 가능하듯 이 이야기는 한 죽음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극 초반부에 레이첼의 죽음을 느닷없이 마주하게 된 동생 노라의 심리를 따라가고 있죠. 지금 보니 페미니즘 심리스릴러라는 홍보문구가 있던데, 이걸 봤다면 어느정도 짐작 가능하듯 이 이야기는 죽음과 그 죽음을 야기한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는 큰 줄기 안에서 그 죽음에 대해 수사하며 발생하는 또 다른 폭력에 대해 서술하고 있어요.
뿌듯하다. 그 누구보다 언니를 잘 아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 p. 84
우리도 때로 그런 시선을 알아차리곤 하죠. 어떤 피해자가 술을 마시고 밤 늦게 돌아다녔다고 할 때, 여러 사람을 문란하게 만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정신병력이 있다고 할 때. 무의식적으로 피해자는 이래야 한다는 규격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사건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본다는 것. 플린 베리의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에서도 이런 시선이 등장합니다. 관련자의 알리바이 등 사건의 증거 수집이 용이하지 않자 경찰들은 레이첼이 어떤 여자였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거죠. 그리고 이 관점은 동생인 노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내가 찾고 있는 건 어쩌면 각기 다른 남성 세 명일지도 모른다. 스네이스에서 언니를 공격했던 남자, 산등성이에서 언니를 지켜보았던 남자, 그리고 언니를 살해한 남자. - p. 164
노라에게는 한 기억이 있습니다. 15년 전 폭행을 당한 언니의 말을 언니의 행실로 인해 믿어주지 않았던 경찰의 기억이요. 그래서 노라는 경찰이 이번에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불현듯 깨달으며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갑니다. 그러면서 15년 전의 기억과 교차해 서술이 이어지는데요. 그 사건으로부터 노라와 레이첼이 어떤 불안감 혹은 후유증을 가지게 되었는지가 드러나고 그 지점들이 노라의 시선으로 풀어집니다. '생각 중인 나를 스스로 지켜본다는' 노라는 그렇기에 관찰자처럼 담담하게 사건을 서술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흥미로웠던 플린 베리의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범인의 정체보다 노라의 심리를 따라가는 게 더욱 재미있었던 심리 스릴러 소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