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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제 책이 어쩌다 건지섬까지 갔을까요? 아마도 책들은 저마다 일종의 은밀한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에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예요.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 - p. 20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이름의 책을 도서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대체 이 제목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하기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 제목때문에 유치하진 않을까 한참동안 망설여지기도 해 결국 펼쳐보기를 주저했던 작품이예요. 그리고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으로 개정되어 나온 지금에서야 비로소 만나보게 되었는데요. 왜 이제서야 봤는지 지난 날이 아쉬워질 정도로 재미있게 본 소설입니다. 저자는 이 책이 실물로 나와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멋진 데뷔작이 유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었답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 그래서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거예요.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 p. 22
아주 오래전에 쓰인 책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누군가와 나를 연결해주는 일이란 참 멋진 일입니다. 이 책은 전쟁 후에 건지섬에서 어떠한 경위로 손에 들어온 책을 읽고 다른 책도 읽고 싶어진 도시가 전쟁이 막 끝난 건지섬에서는 책을 구하기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책에 있는 메모에 적힌 줄리엣에게 다른 책을 구해줄 수 없냐는 한 통의 편지로 모든 것이 시작되게 됩니다. 줄리엣은 작가로 소재를 찾고 있었고, 건지섬의 이 독특한 이름의 북클럽은 그녀의 흥미를 단숨에 끌게 되죠. 왜 북클럽의 이름과 창단에 얽힌 이것저것을 궁금해하던 줄리엣은 도시와 편지를 주고받게 되고, 점차 친밀한 사이가 되어 건지섬까지 찾아가게 됩니다. 아주 멋진 일이지요!
○ 당연히 삶은 계속되지 않아요. 계속되는 건 죽음이죠. 이언은 이제 죽었고 내일도 내년에도 그 후로도 영원히 죽어 있을 테니까. 죽음에는 끝이 없어요. 하지만 어쩌면 슬픔에는끝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엄청난 슬픔이 노아의 대홍수처럼 나의 세상을 휩쓸어버렸고, 여기서 벗어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죠. 그런데 벌써 물 위로 솟은 작은 섬들이 있네요. 희망? 행복? 뭐 그런 것들로 부를 수 있겠죠. 당신이 의자 위로 올라서서 부서진 건물 더미를 애써 외면한 채 반짝이는 햇빛을 받는 모습을 기분 좋게 상상해본답니다. - p. 162
영미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거의 모든 형식이 서간체로 되어 있어 쉽게쉽게 읽힙니다. 키다리아저씨와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라는 작품들도 생각이 나더군요. 다루는 내용은 많이 다르지만요. 이 이야기는 독일군이 점령했던 건지섬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그렇게 가볍지 않은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좀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될만도 하지만 책에 나오는 모든 인물이 입체적이라 놀랍게도 전혀! 지루하지 않아요! 워낙 많은 인물이 등장하기에 초반에는 조금 헷갈릴 수도 있지만 금세 구분해내서 각자의 성격이 묻어나오는 편지들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답니다. 맨 끝에 등장인물들 설명도 실려있기도 하구요.
○ 그렇게 늦은 밤이면 엘리자베스는 저에게 건지 섬과 북클럽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저에겐 마치 천국같이 들렸습니다. 잠자리에 누우면 불결한 냄새와 병균이 떠다니는 눅눅한 공기 속에서 숨을 쉬어야 했지만, 엘리자베스가 이야기를 할 때면 깨끗하고 상쾌한 바닷바람과 뜨거운 태양 아래 익어가는 과일 향기를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제 기억으로는 라벤스부뤼크에서 햇빛이 비친 날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문학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아주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돼지구이 이야기를 들을 때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습니다. 하지만 웃지 않았지요. 막사에서 웃으면 처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 pp. 274-275
건지섬의 주민들이 어떻게 독일군 점령기를 책으로 버텨냈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편지로 이루어진 이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기대되지 않나요? 그렇다면 이 책, 꼭 읽어보셔야합니다. 워낙 매력적인 이야기라서 그런지 영화화도 목전에 두고있다고 하네요. 그래도 역시 이 작품의 매력은 책으로 읽어봐야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명랑한 기질이 있는 밝은 천성을 지닌 줄리엣이 건지섬에 어떻게 녹아들게 되는지 꼭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보고나니 저도 북클럽 회원이 되어 멤버들과 책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