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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저갱
반시연 지음 / 인디페이퍼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무저갱
○ "네가 지은 죄를 말해." 놈이 입을 연다. 유일하게 나에게 건네는 말이다. - p. 8
하도 스릴러 소설을 즐겨 보다보니 참 예측 가능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반전만을 위해 쓰인 책도 있어 재미를 잃은 책들도 수두룩하죠. 심지어는 첫 챕터를 다 읽기도 전에 내용이 머릿속에 쭉 예상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스릴러에 반전만이 묘미는 아니라지만 아무래도 식상해지게 되죠. 하지만 이미 범람하는 스릴러들에 익숙해진 독자들을 치밀하게 속일만한 반전은 그리 많지 않아요. 그렇다면 이제 반전에 기댈 것이 아니라 다른 재미도 함께 찾아봐야겠죠. 이 책은 그렇게 반전과 재미를 모두 잡고 있는 이야기예요. 반시연의 한국 장편 스릴러 소설 무저갱. 간만에 찾은 보물같은 스릴러 소설입니다. 작가 이름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될 정도로요.
○ 사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는게 아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갈망하는 쪽에 가깝다.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 고통이기에, 흔히 죽음은 치명적인 손상의 형태를 하고 있다. 손목을 그어 피로 가득 찬 욕조가 그렇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으깨진 머리가 또한 그렇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실 고통의 결과이지 죽음의 모양이 아니다. 죽음은 고통 뒤에 내려앉은 무거운 적막이다. 만약 죽음이 아무런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죽음은 극단적 파멸의 대명사가 아닌 탈출과 희망의 상징으로서 존재하게 될 터다. - p. 72
이야기에는 여러 인물이 나오지만 중점적으로 봐야할 인물은 넷입니다. 강간에 살인까지 저지르고 어린 여자아이가 스스로 자살을 하게 만들 정도로 흉악한 연쇄 살인마인 '노남용'. 보통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특별한 회사를 다니고 있으며 노남용에게 모종의 적의를 가지고 긴 시간에 걸쳐 일을 설계하고 있는 '차장'. 복국집에서 일을 하며 착취를 당하고 있지만 딱히 다른 곳에서 일을 하기 어려운 실정이라 묵묵히 견디는 '야간삼촌'. 소명의식을 가지고 인간과 죽음 사이에 있는 고통을 치워 자존심을 지켜주고 안식을 선물해주는 '선생'. 이렇게 네 명이며 이는 소개에 나온 희대의 살인마 노남용, 노남용을 교도소로 돌려놓으려 치밀하게 계획한 사내, 어느 특별한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노남용을 죽여야만 하는 사내, 약물과 가스로 491명을 안락사 시킨 선생님이라 불리는 사내에 각각 해당하는 인물들입니다.
○ 용서는 피해자가 해주는거야. 법도 신도 아냐. 오로지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생각하고 판단해서 하는 거야. 죗값 역시 피해자가 결정해야지. (중략) 법은 질서와 유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야. 그냥, 처맞아야 할 새끼들이 처맞지 않고 처맞을 짓을 하기 위해 있는 거야. 절대로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니지. 억울해서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확실하고 진솔한 의사표현이 필요해. 그게 바로 나야. - p. 115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노남용은 흉악 범죄자이기도 하지만 빵빵한 배경을 지닌 매국노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수차례의 흉악범죄를 저질렀음에도 결국엔 사회로 풀려나오게 되죠. 출소까지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특별한 한 회사가 있습니다. 사람을 죽여서라도 '보호'를 해주는 곳이죠. 예를 들어 가정폭력 피해자가 있다면 가해자를 죽여주는 식입니다. 일시적인 관여가 아닌 완전한 보호를 추구하는 회사. 이 곳에는 그걸 가능하게 해주기 위해 보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조사해서 매끄러운 일처리가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조사팀과 괴물들이 가득한 무인도에서도 살아남는 인재들이 있는 관리팀, 보호를 실제로 가능하도록 가해자를 짓밟는 현장팀과 더 특별한 고통을 주기 위한 일시적인 치료를 위한 의료팀이 존재합니다. 이 곳에 입사하면 특별한 계약금을 받게 되는데요. 신입사원이 원하는 걸 가능한 한 들어줍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죽여주고, 무언가를 사 달라고 말하면 사주기도 하죠. 입사하게 되면 하얀 가면을 받게 되는데 이 가면은 회사의 상징이며 구성원들의 자랑이기도 하며 가해자들에게는 공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국 스릴러 장편 소설 무저갱에 나오는 주요 인물은 노남용과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 이 회사와 관련이 있기도 하죠. 흥미로운 소재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더해져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더라구요.
○ "단단히 착각하고 있어. 니 같은 놈에게 그런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구멍만이 있을 뿐이야. 지독하게 깊은 구멍. 바닥이 없어 끝없이 추락하는 시커먼 구멍만이." 조용히 구두를 들었다. "무저갱이라고 부르지." -p. 399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며 피해자가 마음놓고 살기 힘든 이 제대로 된 형벌이 없는 사회에서 법이란 어느 역할을 해주는지에 대해, 누군가에게는 악인인 사람들에 대해, 완전한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해 보여주는 스릴러 소설 무저갱. 굉장히 짜임새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새디스트이자 마조히스트인 노남용에게 어떻게 제대로 된 형벌을 줄 수 있을까 흐름을 따라가며 같이 예상해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이렇게 흡입력 있는 필력을 오랜만에 보아 즐거웠습니다. 반시연 작가의 다른 이야기들도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