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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인간의 권리 옹호>와 <여성의 권리 옹호>를 썼다. 그의 딸 메리 셸리는 소설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를 썼다. <메리와 메리>는 한권으로 어머니와 딸이었던 두 여성의 일대기를 기록했다.

이야기 중간에 <인간의 권리~>를 써서 유명해 졌고 아직 <여성의 권리 ~>는 쓰지 않은 메리의 초상화가 등장한다. 존 오피라는 화가가 그렸는데 이 화가와 또 한 명의 화가가 그린 그림에 대한 묘사가 재밌다. 내용은 이렇다.

˝두 초상화는 전체적으로 중후한 분위기를 풍긴다. 초상화 속 메리는 미소를 짓지 않는다. 청중을 매료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메리의 엄격하고 확고한 시선은 메리가 논리 정연하고 본질적인 주장을 할 수 있는 여성이며, 깊은 감정을 지닌 인간이자 철학자이고, 열정과 신념과 이상주의와 공감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초상화는 오늘날 독자들이 알고 있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정치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저서의 저자가 되기 직전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이 묘사는 정확히 당대의 사람들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미덕과 반대의 이미지로 메리를 묘사한다. 여성은 미소를 잃지 않아야 하며, 청중을 매료시키기 위해 은근히 노력하고 온화하며 부드러워야 했다. 그런데 이런 면모는 정확하게 현대의 정치인에게 대중이 요구하는 것이다. 요즘 정치인들의 프로필 사진, 18세기의 여성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 이미지인 것.

상당히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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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몬드>는 너무 쏜살같이 읽어버린 책이다. 흡입력이 있고 다음 전개가 궁금해서 잠을 잘 수가 없는. 윤재와 곤이의 이야기는 안타까웠고, 윤재와 도라의 이야기는 간지러웠다. 소설 전체는 쉬지 않고 무엇이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인지에 대해 독자에게 묻는 사건들을 나열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 이 소설은 해피엔딩인데 그 결말이 나는 못마땅했다.

윤재는 뇌의 편도체가 지나치게 작고 기능을 하지 못해서 생기는 무감각(무감정)을 앓고 있다. 생소한 병명인데, 윤재의 병은 ‘알렉시티미아‘라는 이름을 하고 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칼부림을 당해도 감정이 격앙되지 않을 정도였다. 곤이는 어려서 미아가 되어 버린 후에 소년원과 보호시설을 오가면서 반사회적인 태도가 몸에 배어버렸다. 윤재는 곤이 같이 극단적인 사람을 이해하면 사람의 감정을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고, 곤이는 자신의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 윤재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윤재의 무감각은 직접적으로 타인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힌 적이 없다. 어려서부터 타인의 감정에 대해 어머니로부터 계속해서 주입받고 학습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항상 타인을 신경쓰는 면모도 있다. 그러나 결국엔 주변 사람들의 배려와 곤이에 대한 걱정, 도라와 사이에서 생긴 낯선 감정때문에 조금씩 내면의 뭉클함을 알게 된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무의식을 딛고 일어선 엄마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야 만다. 비정상에서 정상 세계로 돌아온 그 순간의 눈물이 나로서는 반갑지 않았다. 윤재가 아무 해를 입히지 않았는데도 그가 다르다는 이유로 세상은 그를 계속해서 괴롭혔고 그 세상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윤재 만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스토리는 불만족스러웠다.

청소년 소설이라고 분류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청소년 소설을 대표하는 탑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고, 베스트 또는 스테디 셀러라고 한다. 그럴만하다.

#나군소설 #아몬드 #손원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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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고래가 내는 노래는 15~25Hz 음역대인데, 1989년 냉전 체제가 해체되어 가던 때 미군 해군 소속의 음파 탐지 병사는 52Hz로 노래하는 고래로 추정되는 소리를 탐지한다. 이 사실은 학계에도 알려지고 이 소리의 주인공이 과연 고래인지, 고래라면 어떤 고래인지 탐사가 시작된다. 고래의 모습을 관찰할 수는 없었지만 탐사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은, 고래의 소리가 맞고, 한 마리가 내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고래는 이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높은 음역대의 외톨이 고래.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의 존재는 이렇게 세상에 알려진다.

소설 <52헤르츠 고래들>은 52헤르츠 고래에 대해 알려진 바와 달리 복수형 어미를 제목에 달고 있다. 주인공 키코는 친어머니에 의해 학대 받으며 자랐다. 친구의 도움으로 집에서 탈출했고 회사를 다니며 아픔을 이겨내고 있다. 학대의 기억은 일상생활을 지배하곤 했고 자주 외로웠다. 자신을 엄습하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울고 있던 어느 날, 츤데레 같던 룸메이트는 늘 말없이 맥주 한 캔을 내주곤 했는데 그 날은 씨디플레이어를 받는다.

그 안에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의 노래 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방탄 소년단의 앨범 중 <화영연화>라는 제목이 있는데 그 수록곡 중 ˝whalien52˝라는 노래가 있고, 이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이쯤되면 그 소리가 궁금할 수 밖에. ^^
https://soundcloud.com/bbc_com/the-52hz-whale-recorded-by-bill-watkins
영국 BBC가 그 소리를 홈페이지에 담아 두었다.

회사의 전무 치카라와 사랑에 빠진 키코에게는 그 사랑이 시작되기 전부터 존경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안상과는 맺어지지 않았다. 그는 키코를 아껴주었지만 그 이상의 선을 탐하지 않았고, 키코도 그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유지했다. 치카라에게 안상을 소개시켜 주던 날, 아니 안상에게 치카라와 친구들을 소개하던 날, 안상과 치카라는 묘한 신경전을 벌였고, 치카라는 그 만남을 계기로 안상을 만나지 말 것을 종용한다.

키코의 사랑은 행복의 사다리를 타지 못했다. 치카라에게는 약혼자가 있었고 신분의 차이는 난관을 극복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키코를 손가락질 했다. 안상이 키코에게 적극적으로 애정을 고백하지 않았던 것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키코만이 아니라 안상도 52Hz 소리를 내는 고래였다. 안상은 자살한다. 치카라와 다툼을 벌이다 키코는 치카라의 손으로 칼에 찔리고 만다. 부상은 회복되겠지만 마음의 상처는 아물 길이 없었다. 키코는 치카라의 아버지인 사장에게 이별 위로금을 받아들고 할머니가 살다 돌아가신 시골 마을의 빈집으로 낙향한다. 이 낙향의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한다.

하릴없이 해안가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다 비를 만난 키코는 그 날 지저분한 옷차림의 장발 소년과 만난다. 그의 온몸에 있는 멍자국을 키코는 알아본다. 어찌된 일인지 소년은 말을 하지 않는다.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키코는 소년에게 52(고쥬니)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세 번째 고래다.

키코와 고쥬니는 서로의 상처를 아물게 할 것인가? 세상은 이들의 서로 돌봄을 방해하지 않을 것인가?

소설 속 이야기처럼 52Hz 고래가 한 마리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겠다.

이 소설은 같은 제목으로 영화로도 만들어 졌다. 몇 년 전 일본 사람들을 크게 울렸다고 한다. 보통은 원작이 있는 영화의 경우 소설 쪽이 훨씬 나은 경우를 많이 봤다. 글과 영상은 서로 차원이 다르다. 글로 쓴 서사와 묘사는 아무리 자세히 그려내도 문자 속의 이미지를 독자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다양한 상상력과 가치관을 반영해서 채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상은 이런 채색의 허용도가 매우 낮은 매체일 수 밖에 없다. 대개의 경우 글 쪽이 더 많은 정보와 가능성을 품고 있고, 영상은 이것을 확정함으로서 보다 분명한 이미지를 만들지만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존재했던 가능성을 소거한다.
이 소거의 결과는 훨씬 뚜렷하고 분명하다. 소거 이전의 글은 반투명 유리처럼 흐릿하지만 다양하다. 사람들은 앞의 것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고, 내 경우는 뒤의 것을 선호한다.

그런데도 이 작품의 경우 소설도, 영화도, 괜찮게 봤다. 소설에서는 들을 수 없고 상상하기만 했던 고래의 소리를 영화에서는 들을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일 것 같다.

보통의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들들의 외모는 과잉되곤 한다. 저 캐릭터가 꼭 저렇게 아름답거나 잘 생길 필요가 있는가 생각하곤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외모가 몰입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 저렇게 얼굴 뜯어 먹고 살다가 늙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내가 대신 고민해 줄 일은 아니니까 그쯤하고 만다. 다만 과잉이잖아 하는 생각은 늘 거둘 수가 없는데,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의 외모가 무척 설득력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정체성이 나중에 드러나는 안상은 그에 비해 불필요하게 키가 너무 크지 않은가 생각했고, 다만 그 수염은 설정과 무척 어울렸다는 점을 말해둔다.

소설과 영화의 스토리와는 별도로 52Hz 고래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흔히 목소리 없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그다지 좋은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목소리가 없는 사람은 없다. 목소리는 하나의 대표적인 기호일 뿐인데, 그런 의미에서 ‘의사‘, ‘의지‘, ‘뜻‘이 없는 사람은 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표현을 알아채는 사람과 사회가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과 사회가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소리 없다‘고 간주되는 사람을 대신하는 목소리나 그들이 목소리를 내게 하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나 ‘표현‘을 알아 듣는 사회의 감각과 능력이 필요할 뿐이다.

좀 엉뚱한 마무리일지도 모르겠다.
미국 해군은 왜 1989년에야 52Hz 고래의 소리를 탐지할 수 있었을까? 바다가 좀 더 조용해져서 라고 어딘가에 쓰여 있더라. 바다의 소리를 탐지하는 이유는 소련의 잠수함이 미국 서해안을 누비고 다닐까 봐서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은 미국에게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공포였을 것이다. 그러나 1989년이면 음향 탐지병의 임무는 충분히 느슨해 졌을 것이다. 잠수함 스크류 돌아가는 소리는 더 이상 미 서해안의 태평양에서 들을 수 없다. 무기들이 사라진 태평양의 소리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탐지병의 귀에 원래부터 존재했지만 들을 여유가 없었던 그 소리가 들린 것은 우연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로 세상의 전개는 평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누군가의 무기를 두려워 하고 있거나 적어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한국마저도 수 개월을 떠오를 필요가 없는 핵추진 잠수함을 가지게 된다며 호들갑을 떠는 세상이 왔으니 저 바다의 외로운 고래의 노래는 다시 들리지 않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군소설 #52헤르츠고래들 #마치다소노코 #세상에서가장외로운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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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문학상은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에게 돌아갔고, 그의 대표작은 <사탄탱고>인데, 나같은 사람에게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한 제목이었다. 그래서 순순히 낚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자발적인 낚임에는 후과가 좀 있다. 온 몸에 거미줄이 들러붙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이 소설을 읽는다면 비가 올 때는 읽지 마시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물론 늪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독서를 즐긴다면 습한 날을 골라서 읽을 수도 있겠다.

주인공은 이리미아시. 헝가리어 이리미아시는 영어로는 예레미야로 읽는데 성경의 그 선지자와 이름이 같다. 칙칙하고 습하며 거미줄과 곰팡이가 가득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희망이 없다. 꼬마부터 교장선생님까지 남편 있는 부인들의 몸을 탐내며 술과 담배에 찌들어 있다. 내일에 대한 기대라곤 없을 것 같은 마을에 날아든 민들레꽃 씨앗같은 소식은 죽은지 알았던 이리미아시가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나오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를 성경 속 예레미야를 보듯이 대한다. 습하고 가라앉을 것 같은 마을에 선지자 같은 사람이 부활한 듯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읽기가 쉽지는 않다>

지독한 만연체 문장이다. 그의 소설에는 마침표 대신 쉼표가 찍히는 일이 많다. 한 문단이 하나의 문장이다. 의도적으로 보이는데 어떤 문단은 띄어쓰기를 해야 할 곳을 다 붙여 놓았다. 그러다 보니 책 한 페이지 까만색 글자들의 전체적인 형상이 단정한 직사각형이다. 나는 만연체 문장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한 호흡에 읽히지 않는 만연체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라슬로의 문장은 그가 묘사하는 마을 같다. 한 호흡에 읽히는 만연체 문장은 아니지만 왜 그렇게 쓸 수 밖에 없는지가 납득이 되기는 한다. 이 소설은 이 문체로 쓸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내가 아는 최악의 만연체 문장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다. ‘~하고, ~하며‘로 이어진 문장에서 어떤 필연성도 찾기 어렵다. 게다가 한국의 민주주의는 굉장히 단절적이었기 때문에 적절하게 끊어 주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라슬로의 만연체가 그가 묘사한 희망없는 세기말적 풍경의 마을과 어울리듯이, 헌법 전문의 답답함은 한국 정치와 역사의 그 어떤 면과 닮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을 통해 한 문장으로 구성된 헌법 전문의 필연성을 처음 느꼈다.

<현미경 렌즈를 쓰고 있는 가짜 선지자의 이야기이다>

타인의 삶에 적당한 정도의 신비감을 가져야 신뢰감도 가질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타인의 삶을 현미경으로 관찰한다면 많은 경우 존중감과 존경심이 거두어 지고 그 찌질함에 치를 떨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라슬로는 독자들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치를 고민했던 것 같다. 그 장치가 바로 현미경 렌즈 같은 문장이다. 등장인물들을 거시적으로 다루지 않고 순간 순간의 미시적 움직임과 심리를 집요하게 들여다 본다. 그 어떤 인물에게도 감정이 이입되지 않는다. 그냥 한숨이 쉬어지고 답답하다는 생각만이 가득하게 만든다. 다만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게 만드는 힘만은 충만하다. 이것이 마지막 책장으로 독자를 이끄는 유일한 미덕이다.

이리미아시는 가짜 선지자이다. 소설은 그 이유를 전혀 설명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이리미야시의 귀환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리고 그의 귀환 일성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말이 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비전을 들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비전은 거짓이었다. 현혹하기 위해 동원한 신기루 같은 말일 뿐이었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 전개에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은 당연하다. 희망을 달라고, 좀 더 정직한 비전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싶어진다. 이리미야시는 성경 속 선지자 예레미야를 헝가리식으로 읽은 것이고, 이리미야시와 동행하는 페트리너의 영어식 표현은 피터이고 피터는 성경에서 베드로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를 통해 라슬로는 성경이 약속하는 구원에 대한 불신을 전도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술집에 모여 탱고를 추는데, 그 탱고가 ‘사탄탱고‘인 것은 이런 이유이다.

<윤회,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절망의 영원회귀>

압도적으로 대단하다고 느꼈던 요소는 이 소설의 형식적인 측면이 문장과 문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메시지와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구성해낼 수 있다는 것,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모두 2부로 이루어져 있고, 1부는 1장부터 6장까지인데, 2부는 6장부터 시작해서 1장으로 끝난다. 소설의 형식이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원은 닫혀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리미아시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지만 이리미아시는 거짓 선지자였다는 말을 이미 했다. 결국 이리미아시 전과 후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의 답답한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무변의 세계처럼 지옥같은 곳이 어디에 있을까?
지옥에 대한 묘사의 고전은 단연 단테의 <신곡>일 텐데 신곡이야 서사시 형식이고 워낙 고전이니까 제외하면 소설로서는 단연 탁월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절망의 영원회귀, 간혹 선지자가 찾아오지만 그 또한 거짓 선지자인 마을.

가스파르 코에닉의 소설 <지옥>은 홍세화 선생님이 지면에 소개한 적이 있어서 읽어본 소설인데, 이 소설의 묘사에 대해서도 놀랐었다. <지옥>이 묘사한 그곳은 공항이었다. 무한대의 신용카드가 주어지는데 문제는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이다. 늘 공항을 통해 어딘가로 여행을 가야 한다. 무한의 여행, 정주의 권리가 없는 곳, 따라서 ‘관계‘할 수 없는 곳, 가스파르 코에닉의 지옥은 물질문명의 자본주의였다.

<같은 제목, 소설을 원작으로 한 놀라운 영화도 있다>

<사탄탱고>는 소설이 원작이고, 원작자가 시나리오에 참여한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다. 여러가지로 놀라운 영화인데, 일단은 이 영화의 러닝타임에 경악했다. 7시간 18분이다. 세상에. 흑백영화다. 지독한 롱테이크 기법으로 소설 속 묘사를 화면으로 옮겨 놓았다. 글로 읽었을 때 느꼈던 답답함, 끈적임, 꿉꿉함, 그리고 절망감, 이 모든 것을 화면에서는 더블 샷을 추가한 커피처럼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추석 연휴 기간 동안 이 영화를 봐버렸다. 나로서도 놀라웠다. 맙소사, 이걸 봤다니. 일단 영화를 플레이 시켜놓고 자리를 잡으면 내가 집중을 하든 그렇지 않든 시간은 흐르고 영화는 진행된다. 기분을 다운 시키고 싶을 때, 혹은 냉정하고 차분해 지고 싶을 때 보면 좋다.

공산국가였던 헝가리의 집단 농장이 해체되고 사회체제가 바뀌기 시작하던 무렵에 쓴 소설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 답답하고 절망적인 분위기가 이해된다. 중국으로 반환을 앞둔 시기의 홍콩 영화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그 처연함이나 희망없음의 정서가 <사탄탱고>에서도 재연된다. 다만 <화양연화>가 아름답고 아련하며 붙잡을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그 시대의 감정을 되살렸다면, <사탄탱고>는 좀 더 무자비하다. 읽기가 어렵다고 말을 했지만, 그렇다고 잘 읽히지 않는 소설은 아니다. 읽히긴 하지만 내가 무얼 읽고 있는지 헤매게 하는 소설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볼 만하다. 다 읽어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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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읽기 힘든 소설이다. 이 징면도 분명 꿈 장면 같은데 도무지 설명이 없다.

바깥은아무런변화가없었다 저녁이깊어가지도아침이오지도않았다 그저끝없이아침인지저녁인지어스름만이어지고있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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