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 - 위대함과 환상 사이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 지음, 홍기빈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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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가장 큰 수확, 카를 마르크스에 더 가까이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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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부터 나에게 희뿌연 안개 속에서 가끔 영감을 주었던 철학자는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와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였다. 지금까지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다가 살패하면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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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닥뜨리는 문제들을 해결해보려고 가끔 니체와 그 관련된 저작들을 찾아보면서 공상을 하곤 했다. 비극의 탄생, 신의 죽음,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영원회귀,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등은 탁월한 사유의 결과였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 기업경영의 현실에도 거의 그대로 들어맞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물론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나 혼자 그렇다고 느낀다. 가끔 강의 때 니체를 언급하면 이건 뭐지, 하는 반응이다. 왜 그러는지 나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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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문학과 예술적 상상도 니체의 저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볼 때 놀라기도 했다. 니체는 삶의 심각한 현실에 처하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반복적인 자기자랑과 현학적 표현과 우스꽝스런 비유들은 사실 애교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내 방식대로 해석하는 것이므로 철학자들이 볼 때 틀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인간이 개입된 세상엔 주관적 해석만 있을 뿐이지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그렇게 해석한다고 잘못될 것은 전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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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마르크스는 조금 달랐다. 남들은 니체가 훨씬 더 어렵다고 하던데, 나는 마르크스가 훨씬 더 해석하기 어려웠다. 읽으면 읽을수록 주장하는 내용이 너무나 방대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해설서도 많고 평전도 많지만, 그걸 읽어도 내 머리 속에 마르크스를 명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가 안 되니 해석도 제대로 될리 만무했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관에 조응하지 않는 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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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내 생각에 마르크스는 분명히 칸트와 헤겔의 독일관념론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 같은데, 전문가들은 다들 마르크스를 유물론자라고 몰아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유물론을 주장하는 듯한 면모가 보이긴 하지만, 그 따위 이론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역사적 발전단계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 일생의 목표는 분명했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해방이었다. 기독교를 향하여 '인민의 아편'이라고 일갈했던 것도, 기독교가 비참한 노동자들의 삶을 도외시하고 현실의 불행을 보상해 줄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냄으로써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기만하도록 가르쳤고 사회를 변화시킬 동력을 잃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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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상은 오늘날 한국기독교에서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의 기르침이 오히려 신자들을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교회가 특정한 성경구절, 교리, 신학이론에다 마치 자연법칙처럼 비인격적 권위를 부여하여 복종하도록 함으로써 신자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제거해버리고 있다. 이는 교회가 신자들에게 사회적 부정부패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늘날 교회가 신자들에게 아편을 주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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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을 보면 유물론자의 외침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노동의 사회·경제적 환경조건을 혁명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후의 다양한 주장들도 나에겐 처절한 환경에 놓인 노동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마르크스의 격렬한 현실적 외침으로 해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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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소규모 촌락 공동체, 일명 마르크 협동체(Markgenossen)라고 불리는 삶의 공동체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개리스 스테드먼 존스의 『카를 마르크스』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레닌이 저지른 그런 어설픈 프롤레타리아 혁명 같은 것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살리기 위한 협동주의자 또는 공동체주의자였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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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Gibin Hong) 박사가 번역한 『카를 마르크스』(개리스 스테드먼 존스, 아르테 출판 2018)를 읽으면서 마르크스는 종교개혁 시대의 재세례파(Anabaptist)처럼 급진적 개혁파에 속하는 공동체주의자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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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세례파의 한 부류로 독일에서 생긴 부르더호프(Bruderhof)***라는 공동체가 영국, 독일, 미국 등지에서 공동체적 협동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이 부르더호프를 찾아갈 때마다 마르크스가 꿈꾸던 공동체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여기가 마르크스가 꿈꿨던 공산주의 사회처럼 보인다고 말하곤 했다. 그들은 빙긋이 웃곤 했었다.

***브루더호프를 알고 싶다면 한 번 방문해 보길 권한다. 내가 여휴가때 시간이 되면 늘 한번씩 찾아가보는 곳이 브루더호프 다벨 공동체(Darvell Community)다. 런던 시내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 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Robertsbridge라는 마을에 있다.

https://www.bruderhof.com/…/where-we…/united-kingdom/darv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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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지지를 보내고 잘못된 것, 비합리적인 것, 악한 것에 비판을 보낼 뿐이다. 내가 보기에도 마르크스 역시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마르크스는 결코 뿔 달린 괴물이 아니란 말이다. 인간적 결함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노동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에너지를 그때 그때 남김 없이 쏟아 부은 위대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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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에 대한 조금 더 투명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2018년은 정말 마르크스에 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던 한 해였다. 꼼꼼한 번역에 힘써 준 홍 박사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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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마르크스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는 사실, 즉 마르크스는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2018년 한 해는 의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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