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
이상운 지음 / 하늘연못 / 2000년 8월
평점 :
절판



뒤죽박죽 엉켜버린 듯한 장르. 우리의 주변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특이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혜리와 현서. 현실적이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간헐적으로 비추어지는 스님과 가족의 죽음과 사랑과 우주와 존재와 정치적인 이야기들...

작가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이야기는 오히려 아무 이야기도 없는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아니 어쩌면 작가의 말대로 이걸 노렸는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카오스를 노린 것일까?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소설을 가장 잘 표현해 낼 수 있는 본질이었기 때문에?


「...당신의 눈이 내 메마른 문장의 겉만 읽고 떠나버린다면, 오로지 직선으로만 달리다 가버린 당신의 뒷모습을 보며, 당신과 나의 우주가, 그리고 나의 󰡐탱고󰡑가 얼마나 쓸쓸한 것인가...」(󰡐작가의 말󰡑 中에서)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마냥 쓸쓸했을 것이다. 아니 씁쓸했을 것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려는 메세지는 도대체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로지 직선으로만 달릴 것이다. 책의 뒷편에 나와있는 평론을 보며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끼워맞추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작가가 전하려는 카오스에 숨어있는 많은 메세지들과 평론에 공감할 것인가? 온갖 기교들로 문장을 채우고 있는 글나부랭이들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한 주제는 이 책을 극찬한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어질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작가가 말하는 우주와 나의 본질, 존재 그리고 상징적인 정치 이야기에 귀기울여지지 않을 뿐더러 발견하기도 싫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답답해지는 마음.. 심지어 이 책의 평론을 담당한 김정란 교수에게 그동안 쌓아온 신뢰마저 없어질 정도였다.


인간이 생각해낸 것이라면 허구가 분명하다는 작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작가도 평론가도 나도 모두 내 식대로 허구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허구라는 관점에서 소설을 들여다본다면 지금까지 내가 품고 있던 '탱고󰡐에 대한 악한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탱고는 탱고 음악의 특성이 레카도 주법과 스타카토 주법에 맞추어 동작을 표현하여 정열과 사랑, 낭만 그리고 애수를 표현한다. 그러나 작가는 전혀 스타카토식의 글은 쓰지 않는다. 씩씩하지도 않고 분노에 차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비장한 결의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글에는 오로지 레카토 주법만이 살아있을 뿐이다. 부드럽고 평화스러우면서도 슬프고 애잔한 느낌들.. 작가는 무언가 비장한 결의와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만 했다. 어쩌면 문단문단 나뉘어진 그의 글들이 스타카토식의 끊어주기 특징을 살려낸 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어떤 춤도 탱고만큼 복잡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춤은 없다. 둘이 출 수 있는 많은 춤을 내비두고 굳이 탱고를 택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소설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탱고는 작가의 뜻에 부합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현서와 혜리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유독 혜리와 현서만이 온갖 상처를 지니며 살아온 사람같다. 그들에게는 특별한 자신들만의 경험이 있어서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을 살면서 겪어보기 힘든 일들을 그들은 겪은 것이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아프고 특이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것을 경험했다는 것인가? 경험했기에 그들이 진부한 일상에서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이었을까?


현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과 형수를 한꺼번에 잃은 후에 절대적인 허무감에 휩싸인다. 그는 공간과 시간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의 고민은 있고 없고, 없고 있고의 반복으로 존재한다. 커다란 우주안에 아주 조그맣게 존재하는 자신과, 혜리의 우연한 출현에 대해 서스름없는 현서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생각은 정말 독특하다. 그리고 무것운 듯 가볍다.

유혜리. 그녀는 아주 특이한 과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그녀에 대한 지나친 사랑으로 인해 그녀는 아버지에 의해, 아버지는 그녀에 의해 상처받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채 혜리가 아버지 앞에서 옷을 벗은 그 날 아버지는 느티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혜리는 자살한 아버지를 땅속 깊이 묻는다. 그리고는 그 위에 죽은 엄마가 좋아하던 감나무를 심어 놓는다. 그녀를 옥죄었던 수갑이 풀어진 것이다. 그러나 수갑이 풀어진 대신 혜리에겐 아주 커다랗고 무거운 족쇄가 채워진다.


현서와 혜리는 탱고같은 사람이다. 이들이 유일하게 탱고를 췄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들은 탱고를 추면서도 서로 어긋난다. 탱고만큼 복잡하면서도 서로 다른 복잡함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제나 먼 세계를 응시하며 깊은 공허의 눈빛을 지니고 있는 혜리는 현서앞에 언제나 우연치고는 너무 짖궂게 나타난다. 현서는 혜리의 등장을 우연이라 믿는다. 온갖 우주의 공간과 시간을 주절거리면서 현서는 혜리의 우연을 정당화 시키려고 한다. 난 그 정당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식상한 우연을 작가는 이곳에 끌어다 놓았다. 우주라는 거대한 존재를 등에 업고.. 혜리의 갑작스런 등장을 우연이라 말하기엔 너무 비약적이다. 혜리와 현서가 탱고를 추면서 서로 어긋났던 것, 혜리가 우연처럼 현서앞에 나타났던 것은 혜리와 현서가 다른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함께 학생운동을 하고, 꿈을 꾸고, 탱고를 추었고, 언제나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가진 혜리는 현서에게 옛기억의 모든 것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다. 혜리는 암울했던 젊은 날에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하고 꿈을 꾸고 탱고를 추었던 사람이다. 7년후 변한 모습으로 다시 만났어도 현서에게 혜리는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인 것이다. 혜리에게 현서는 혜리가 그 동안 품고 살아왔던 족쇄를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아니 혜리는 현서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작가는 현서를 통해 혜리를 관찰하며 과거의 핍박이 지속되어있다는 것과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린다. 과거의 존재인 혜리를 억압했던 독재자 아버지가 죽었기에 혜리를 억압했던 수갑이 풀어질 줄 알았지만 독재자 아버지는 감나무 아래 묻혀서 여지껏 아픈 시대의 혜리에게 수갑보다 더 무거운 족쇄를 채우고 있다. 혜리의 가슴속에 커다란 상처를 내고 있는 아픔을 현서는 밝혀내야 하는 것이다. 나약한 혜리는 자신의 상처가 누군가에 의해- 현서에 의해- 아물기를 원한다.

현서는 혜리의 집을 찾아간다. 혜리의 편지를 읽고 감나무 밑을 파헤치기 위해 혜리의 집에 간다. 그러나 작가는 현서가 감나무 밑을 파헤쳤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미궁으로 남겨 놓는다. 현서의 편지를 끝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확고한 의지도 없고 어떠한 해결도 없이 소설은 끝이 나는 것이다. 평론가는 작가가 미궁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인다고 했기에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지만 만약 현서가 감나무를 파헤치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면..? 아니 감나무만 파헤치고 아무런 행동이 없었다면..? 그냥 감나무 밑에 있다는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아는 것이 미궁을 해결하려는 의지인 것인가?


정열과 사랑과 낭만과 애수가 곁들여진 춤 탱고. 소설 탱고는 춤 탱고만큼이나 복잡함 투성이다. 그렇다고 춤 탱고의 정열과 사랑과 낭만과 애수가 있는 소설도 아니다. 사랑이 있는 듯, 애수가 있는 듯 하지만 이내 평론가에 의해 그것은 역사적인 이야기를 위한 매개체로 탈바꿈한다.

이 소설은 우주와 존재를 다루는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진부하다. 또한 역사와 정치적인 이야기를 다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하다. 작가는 여러 엇갈림 속에서 어떠한 균형도 찾고 있지 못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협화음속에서 진행되어진 글이다. 현서와 혜리라는 주인공 자체도 그 시대를 겪었던 사람들이 보기에도 너무나 이질적이며 세상과 많은 삐걱거림이 있다. 이 소설은 삐걱거림이 난무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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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 홍신 엘리트 북스 49
H.멜빌 지음 / 홍신문화사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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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 바다의 표적이여, 하늘 높은 곳의 강대한 뱃길 안내자여, 그대는 진실로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쳐 준다. 그러나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희미한 암시라도 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아닌 어떤 자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모디 딕은 어디에 있는가. 이 순간에도 그대는 그 놈을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의 눈은 지금도 지켜보고 있는 그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지금도 저쪽의 알려지지 않은 심연의 사물들을 응시하고 있는 그대의 눈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 태양이여!>




에이허브는 해먹에 서서 광활한 바다를 바라본다. 그는 모비딕이 아닌 고래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적막하리만치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며 그는 오직 모비딕만을 발견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뜬다. 태양은 낮에는 작열하는 빛을 내뿜으며, 밤에는 두터운 어둠속에 숨어 에이허브와 모비딕을 응시한다. 에이허브는 바다에서 만나는 배에게마다 백경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누군가 백경을 보았다고 하면 에이허브는 바로 백경을 보았다는 곳으로 배의 방향을 돌린다. 에이허브는 태양이 본, 마주친 배들이 본, 그 백경을 본다.



모비딕은 에이허브가 탄 배의 뱃길 흔적을 통하여, 자신을 잡기 위해 들끓고 있는 에이허브의 욕망에서 풍겨지는 지독한 냄새에 의해, 모비딕과 에이허브 둘 다를 응시하고 있는 태양에 의해 에이허브를 바라본다. 이 둘은 태양에 의해 주체가 되지만 모비딕은 에이허브보다 더 많은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에이허브가 그를 찾아 돌아오지 못할 항해를 하면서도 모비딕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에 비해, 모비딕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에도,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도, 에이허브보다 일부러 더 느리게 헤엄을 쳤을 때에도 응시하는 힘으로 에이허브를 주시한다.

   지젝은 주체는 언제나 너무 느리거나 너무 재빠르면 결코 자신의 욕망의 대상과 보조를 맞출 수 없다고 한다. 에이허브 앞에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모비딕과 모비딕을 잡겠다는 에이허브의 욕망의 응시가 일치하는 순간의 쾌락은 침몰이라는 파멸로 이어진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필연적으로 잃어버리게 된다. 에이허브는 모비딕을 선택했고 그것은 곧 침몰로 이어진다. 그는 모비딕을 찌른 밧줄에 감겨 모비딕과 함께 심연으로 떨어졌다. 스크린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는 침몰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에이허브의 모비딕에 대한 집착은 모비딕을 만나기 전까지에 한에서만 고집스러운 신념으로 비춰질 뿐인 것이다. 에이허브는 다리 한 쪽을 잃었을 때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모비딕과 만날 때에는 남은 다리 한 쪽 뿐만 아니라 심장을 내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표면적으로 그는 최소한의 인정마저 모비 딕을 잡겠다는 복수심에 불 타 흔적조차 남지 않은 듯 하다. 그러나 바다에 빠진 후로 자신은 죽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미치광이 소년 핍에게 나타내는 애정에서 에이허브가 느끼고 있는 고뇌를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복수심을 넘어선 이상의 무언가를 위해 모비 딕을 쫓고 있다. 그것은 미혹을 흘리는 고래에게 홀린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에이허브 자신이 모비딕-되기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고래잡이를 나선 피쿼드호는 단 한사람, 에이허브로 인해 모비딕을 잡는 배가 되었다. 선원들의 모든 개성, 담력, 공포, 죄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융화되어 하나의 주재자인 에이허브가 가리키는 대로 추적의 노예가 되어 모두 궁극의 숙명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어느 길로도 넘나들 수 있는 리좀의 바다에서 모비딕을 잡겠다는 목표를 지닌 수목의 배가 항해한다. 수목과 리좀이 씨줄과 날줄처럼 어지럽게 얽혀있는 곳에서 에이허브와 모비딕은 리좀의 구멍에 영원히 매장된다. 그것은 욕망의 S극과 N극이 만난 불꽃튀는 파멸일 수도 있고, 리좀의 검은구멍에 완전하게 빠진 영원한 탈주일 수도 있다.



 라캉의 ‘여자는 없다’를 빌어말한다면, 자신의 서슬퍼런 욕망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더욱 파랗게 물들이는 에이허브와 모비딕과의 마주침은 야성이 흘러넘치는 진정한 사내들의 미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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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갈증
미시마 유키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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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도의 심리묘사를 통해 사랑에 대한 강밀한 집착을 파헤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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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뫼비우스의 띠 장마 외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28
조세희.윤흥길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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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명 난쏘공이라고 불리우는 단편과 장마를 이제야 읽었다.

둘 다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줄곧 손을 저었던 소설이었는데,

이번만큼은 꼭 읽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읽어야 할 소설이 둘 다 들어있으니 일석이조였기 때문이었다.

삼촌과 외삼촌으로 대비시킨 한국의 역사를

어린 아이의 눈을 통해 써내려간 장마는 지금 읽어도 재미있는 소설이다.

특히 할머니들 간의 신경전을 거리두기를 통해 표현해내려간 솜씨와

문장의 수려함또한 뛰어나다.

난쏘공은 내 예측을 뛰어넘은 소설이었다.

재개발 거주민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이야기 되는 소재이다.

그래서 일상적 리얼리즘에 머무를 수도 있는 위험하고 흔한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세희 씨는 이것을 뛰어난 상상력으로 버무려

리얼리즘을 극대화 했다.

그래서 이것은 리얼리즘을 뛰어넘은 소설이며,

1970년을 거슬러 2008년에도 살아숨쉬는 소설이다.

줄거리를 듣는 것으론 안된다.

읽어야만 왜 난쏘공이 명작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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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질문 - 내 삶을 바꾸는 경이로운 힘
바이런 케이티·스티븐 미첼 지음, 김윤 옮김 / 침묵의향기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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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중한 사람에게서 이 책을 추천 받아 구매한 후

한동안 읽기가 두려웠습니다.

어려우면 어쩌나 하는 마음과

이걸 읽고도 마음에 아무런 감흥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이 책을 열게 되었고,

조금의 설명과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서

이 것을 왜 추천해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샀으니 읽어야 겠다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을수록 이 책에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네 가지 질문을 통해서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란

간단하고도 쉬운 일더군요.

그렇지만 우리들은 아무도 그 네 가지 질문을 던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나서 거기서 멈춰버립니다.

표면에서만 겉돌 뿐 더 깊게 파고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남의 탓 혹은 자기 비하만 할 뿐 본질을 꿰뚫지는 못합니다.

영적인 사람만이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저의 편견을 뒤바꿔준 책입니다.

저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저에게 네가지 질문을 던져 상황을 파헤칩니다.

그러면 한결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듭니다.

전 영적인 사람이 아니지만,

이 것을 하는 동안에는 마치 명상의 삼매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상쾌하고 안정적인 기분을 갖게 됩니다.

케이티가 내 앞에 와서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활자에서 힘이 느껴집니다.

그 힘이 제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여러분도 이 힘을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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