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 홍신 엘리트 북스 49
H.멜빌 지음 / 홍신문화사 / 1993년 8월
평점 :
절판



* <그대 바다의 표적이여, 하늘 높은 곳의 강대한 뱃길 안내자여, 그대는 진실로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쳐 준다. 그러나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희미한 암시라도 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아닌 어떤 자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모디 딕은 어디에 있는가. 이 순간에도 그대는 그 놈을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의 눈은 지금도 지켜보고 있는 그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지금도 저쪽의 알려지지 않은 심연의 사물들을 응시하고 있는 그대의 눈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 태양이여!>




에이허브는 해먹에 서서 광활한 바다를 바라본다. 그는 모비딕이 아닌 고래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적막하리만치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며 그는 오직 모비딕만을 발견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뜬다. 태양은 낮에는 작열하는 빛을 내뿜으며, 밤에는 두터운 어둠속에 숨어 에이허브와 모비딕을 응시한다. 에이허브는 바다에서 만나는 배에게마다 백경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누군가 백경을 보았다고 하면 에이허브는 바로 백경을 보았다는 곳으로 배의 방향을 돌린다. 에이허브는 태양이 본, 마주친 배들이 본, 그 백경을 본다.



모비딕은 에이허브가 탄 배의 뱃길 흔적을 통하여, 자신을 잡기 위해 들끓고 있는 에이허브의 욕망에서 풍겨지는 지독한 냄새에 의해, 모비딕과 에이허브 둘 다를 응시하고 있는 태양에 의해 에이허브를 바라본다. 이 둘은 태양에 의해 주체가 되지만 모비딕은 에이허브보다 더 많은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에이허브가 그를 찾아 돌아오지 못할 항해를 하면서도 모비딕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에 비해, 모비딕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에도,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도, 에이허브보다 일부러 더 느리게 헤엄을 쳤을 때에도 응시하는 힘으로 에이허브를 주시한다.

   지젝은 주체는 언제나 너무 느리거나 너무 재빠르면 결코 자신의 욕망의 대상과 보조를 맞출 수 없다고 한다. 에이허브 앞에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모비딕과 모비딕을 잡겠다는 에이허브의 욕망의 응시가 일치하는 순간의 쾌락은 침몰이라는 파멸로 이어진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필연적으로 잃어버리게 된다. 에이허브는 모비딕을 선택했고 그것은 곧 침몰로 이어진다. 그는 모비딕을 찌른 밧줄에 감겨 모비딕과 함께 심연으로 떨어졌다. 스크린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는 침몰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에이허브의 모비딕에 대한 집착은 모비딕을 만나기 전까지에 한에서만 고집스러운 신념으로 비춰질 뿐인 것이다. 에이허브는 다리 한 쪽을 잃었을 때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모비딕과 만날 때에는 남은 다리 한 쪽 뿐만 아니라 심장을 내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표면적으로 그는 최소한의 인정마저 모비 딕을 잡겠다는 복수심에 불 타 흔적조차 남지 않은 듯 하다. 그러나 바다에 빠진 후로 자신은 죽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미치광이 소년 핍에게 나타내는 애정에서 에이허브가 느끼고 있는 고뇌를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복수심을 넘어선 이상의 무언가를 위해 모비 딕을 쫓고 있다. 그것은 미혹을 흘리는 고래에게 홀린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에이허브 자신이 모비딕-되기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고래잡이를 나선 피쿼드호는 단 한사람, 에이허브로 인해 모비딕을 잡는 배가 되었다. 선원들의 모든 개성, 담력, 공포, 죄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융화되어 하나의 주재자인 에이허브가 가리키는 대로 추적의 노예가 되어 모두 궁극의 숙명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어느 길로도 넘나들 수 있는 리좀의 바다에서 모비딕을 잡겠다는 목표를 지닌 수목의 배가 항해한다. 수목과 리좀이 씨줄과 날줄처럼 어지럽게 얽혀있는 곳에서 에이허브와 모비딕은 리좀의 구멍에 영원히 매장된다. 그것은 욕망의 S극과 N극이 만난 불꽃튀는 파멸일 수도 있고, 리좀의 검은구멍에 완전하게 빠진 영원한 탈주일 수도 있다.



 라캉의 ‘여자는 없다’를 빌어말한다면, 자신의 서슬퍼런 욕망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더욱 파랗게 물들이는 에이허브와 모비딕과의 마주침은 야성이 흘러넘치는 진정한 사내들의 미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