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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야만, 본능, 시원을 잃어버리고 길들여진 인간에 관해 이야기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한창 재미있게 즐겼던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라는 게임을 떠올렸다. 집을 짓고, 전투기구와 병력을 만들고 싸우고, 업그레이드하고, 다시 싸우고 결국에는 적을 완전히 뭉개는 게임이다. 그 게임은 적이 있다는 것을 상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적이 없으면 게임 자체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즐겼으나, ‘야만인을 기다리며’ 를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내 안에도 잠재된 폭력성과 각인 받은 제국주의식 사고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제국의 소속이지만, 문제제기를 놓지 않는 인물이다. 아마도 그는 작가의 분신일 것이다. 존 쿳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이라는 특이한 태생을 지닌 작가다. 그에게서 이런 소설이 나온 것은 어쩌면 매우 자명한 일일 것이다. 다수의 흑인을 지배하고 살아가던 소수의 백인 안에서 문제의식을 지니고 살지 않았다면 이런 소설을 쓸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읽고 느끼는 공감은, 단지 존 쿳시의 특별한 상황을 이해해서만이 아니다. 역사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각 이 순간에도 계속 벌어지고 있는 제국주의의 음모에 우리는 모두 노출되어 있고, 의도치 않게 가담하고 있기도 하며, 그럴수록 점점 시원에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국은 언제나 가상의 적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제국을 공고히 하려고 한다. 다른 나라의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상황만으로도 앞의 문장은 충분히 증명될 수 있다. 수구보수들은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해 언제나 간첩과 빨갱이를 걸고넘어진다. 언제든지 전쟁은 터질 수 있으며, 북한은 언제나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 곳곳에 우리를 치려고 하는 북한사상을 지닌 사람들이 숨어서 우리를 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 논리로 선거에서 표를 얻고, 칼럼을 쓰고, 신문을 내고, 정권을 꾸리며 국민들을 선동한다. 이미 제국주의 안에 편입된 국민의 대다수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제국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적으로 부터 당신들을 지켜주는 것이 제국(국가)의 임무이다, 그들을 처지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 나라는 언제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라고 제국은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의 논리를 다시 배열하면, 그들의 이면을 알 수 있다.
' 적이 없다면, 제국의 존재 자체가 위험해진다. 당신들은 국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국을 위해서는 적이 필요하다' 이것이 제국의 이면인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싸워야 할 적이 필요할 것이고, 그 적은 우리가 잘 모르는 미지의 국가, 민족, 부족으로 상정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 것이다. 인간은 원래 모르는 것, 미지의 것에 대해 호기심과 함께 두려움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더욱 많은 지지를 얻어낼 수 있고, 제국의 논리를 튼튼히 할 수 있다. 우리는 선진제국, 너희는 언제 우리를 침입할지 모르는, 혹은 우리가 교화시켜줘야 하는 야만제국이라는 이분법으로 말이다.
"무언가 우리로 하여금,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이나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개념 속에 사는 걸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그건 제국의 잘못이다! 제국은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제국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의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에 대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그 생각은 어떻게 하면 끝장이 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시대를 연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228 쪽 "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처럼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지 않는 한 제국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안에는 단 사탕들이 무수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이미 야만을 잃었기 때문이다. 문명을 접하고, 규율과 제도가 생기고, 돈이 거래되고, 어느 새 국가의 통치를 받고 있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시원과 멀어지는 것이다.
주인공은 몇 일에 한 번씩 섹스를 해야 할 정도의 성욕을 지닌 늙은이이다. 그는 가짜 신음을 완벽하게 내는 매춘부와는 황홀한 섹스가 가능하지만, 포로로 끌려왔다 고문에 장애인이 된 야만인 여자와는 섹스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하게 되긴 하지만 큰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이 누구나 본능을 지니고 있듯, 주인공도 본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그는 그 본능을 이미 한 번 사회에 걸러진 욕망으로 밖에 해결하지 못한다. 동정심 혹은 안타까움이라는 외부적 감정을 갖고 다가갔기에 야만인 여자와는 섹스가 되지 않는 것이다. 되더라도 서로 즐겁지 않고, 소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야만인 여자와 소통하기를 진정으로 원했다. 그 여자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야만’의 의미를 완전히 전복한다. 제국은 ‘야만인’이 그들이 살아온 방식대로 행하는 사냥이나 유목 등에 대해 자기들의 영토를 침범하고 제국의 사유재산인 국민과 식량을 다치게 하고 약탈하는 적으로 해석하지만, 그것은 거울로 본 ‘제국’ 자신의 모습일 뿐이다.
야만인 소탕작전을 나갔던 군대가 돌아오지 않자, 마을을 보호한다던 군인들은 식량을 약탈하고, 그들의 가축을 죽이고, 그들이 무서워 피난을 가는 마을 사람들의 집을 부수고 불을 지른다. 제국이 위험하다고 말했던 ‘야만인’의 행동을 고스란히 ‘제국’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짜 ‘야만인’은 누구인가? 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몇 명 남지 않은 군대가 돌아오고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는 주인공에게 젊은 군인은 ‘그들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 고 말한다. 자기들을 유인해서 사막에 따라오게 해서 죽게 했다는 것이다. 제국은 끝까지 ‘야만인’을 적으로 두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다. 자기들의 삶의 터전에 위협을 가하는 제국을 피해서, 혹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으며, 혹은 대항하여 살길 찾아 가는 야만인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편집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제국이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이 있다’는 편집증은 절대 없어져선 안 될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전체로 보면 군인이지만, 개인으로 보면 하나의 젊은이일 뿐인 그 군인이 그런 논리를 갖고 있는 것은 이미 제국 안에 편입되어 시원에서 멀어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 군인들, 제국안의 사람들은 그렇게 '진짜 야만’과는 멀어져 있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우리가 만들어낸 사전적 의미의 야만인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제국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다시는 그곳으로 갈 수 없을 정도로 시원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돈이면 최고라는 천박한 자본주의가 만연해있고, 지금의 정부는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입각한 정책으로 빈부 양극화를 조장하고 있으며, 수구보수들은 여전히 적을 상정하며 자신들의 논리에 반대 입장을 내는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법은 제국주의 논리로만 움직인다.
‘오래 전에 길을 잃었지만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할 길을 따라 계속 걸음을 옮기는 사람처럼, 나는 바보 같은 느낌을 받으며 그곳을 떠난다. - 267쪽’
그래서 이 마지막 문장이 더 와 닿는 이유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대한민국도 우리 개개인 모두도 오래 전에 길을 잃었고,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하는 내 안의 ‘야만’에 대한 고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는 계속 걸어가야만 한다것 뿐이다. 정말로 그것 밖에는 없는 것 같다. 대신 내 안의 야만인을 기다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