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 <검은 꽃>에는 다양한 주인공들이 배치되어 소설의 전개를 끌고가지만, 내가 김이정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그를 감히 유목민이라고 부르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농장에서 탈출하여 해방노예가 되어 돈을 모으며 미국으로의 월경을 꿈꾼다. 그것이 좌절되자 멕시코 혁명의 게릴라군이 되어 싸우고, 과테말라 혁명군을 거들어 싸우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속하지 않고 고유한 자신의 공간을 지키며 원하는 것을 주고 원하는 것을 얻는 야금술사가 된다. 그는 물질성을 띠고 있는 질료적 흐름을 이어 과테말라에서 외면한 척박한 밀림의 땅에 ‘신대한’이라는 나라를 건립한다. 그것은 그가 지니고 있던 야금술사 고유의 다공공간이 매끄러운 공간의 탄생을 위한 전조였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유목민에게는 ‘역사’가 없다. 그의 죽음과 함께 신대한은 몰락한다. 신대한의 영토에 있는 신전들 사이로 해골들만 굴러다닐 뿐 신대한이었다는 어떠한 흔적이나 역사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김이정이 자신이 이룩한 사건을 무화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신대한을 건설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요시다가 말한 국가가 우리를 선택한다는 말에 반하여 자신들이 국가를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이다. 존재하고 있는 국가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규율을 정하고 스스로의 삶을 구성해나갈 수 있는 나라를 건립하므로써 자율주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나라를 세운 권력을 이용하여 돈과 여색을 탐하지도 않고, 조선으로의 회귀와 옛 여인을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유일한 핏줄인 아들에 대해서도 혈통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처럼 그의 모든 흐름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다는 가장 큰 흐름이 존재한다. 언제나 배제된 자, 이방인으로서 능선을 타고 달리는 야성의 늑대처럼 마주쳐오는 모든 것들과 부딪치며 조선에서 과테말라의 밀림까지 상이한 배치들을 넘나든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야금술사의 죽음이 아닌 유목민으로서의 죽음이다.


“그는 아무리 발버둥쳐 봐자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망나니의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사형수처럼 기를 쓰고 몸부림쳤다. 그리고 그는 그토록 기를 쓰는데도 그 무서운 것에 점점 가까이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순간순간마다 느꼈다. 그는 또 느꼈다. 자신의 고통은 그 검은 구멍 속에 쑤셔 넣어졌기 때문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그 구멍 속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가 구멍 속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까닭은 자기 인생이 옳았다는 확신이 그를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자기 인생에 대한 정당화, 바로 이것이 그를 단단히 움켜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나오는 대목이다. 김이정은 이반 일리치와는 달리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확신하지도 않고, 삶의 중심을 만들어놓지 않는다. 불연속적인 흐름을 따라 배치가 달라질 때마다 얼마든지 다른 것들과 열결되고 엉뚱한 곳으로 나아가며 리좀적인 계통도를 그릴 뿐이다. 김이정은 결국 신대한을 만들어 영토를 획득한 것으로인해 밀림까지 밀고 들어온 과테말라 정부군에 의해 신대한과 함께 사라진다. 그에게는 부모에게 버려졌던 처음부터 죽음을 맞이하는 끝까지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패배했지만, 승리했다. 이반 일리치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검은 구멍에 완벽하게 빠졌고, 그래서 그의 검은 구멍에서는 꽃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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