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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풀니스 - 깨달음으로 가는 실용적인 마음수행 안내서
조셉 골드스타인 지음, 이성동.이은영 옮김 / 민족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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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풀니스』 

책의 부제는 ‘깨달음으로 가는 실용적인 안내서’다. 처음에는 ‘깨달음’과 ‘실용성’이 함께 놓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읽어가면서 이 책이 말하는 실용성이란 단기적 효과나 기술의 유용성이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적용되는 태도와 방향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조셉 골드스타인의 이 책은 마음챙김을 단순한 스트레스 완화 기술로 다루지 않는다. 존 카밧진의 MBSR이 임상적 언어로 번역된 실천 방법이라면, 골드스타인은 불교 경전, 특히 염처경을 중심으로 고통의 구조와 그 근원을 직접 바라보게 한다. 즉, 하나는 증상을 다루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뿌리를 묻는 방식이다. 이 차이는 단순한 접근법의 차이가 아니라 수행의 목적 자체를 달리한다.


가장 인상적인 개념은 두카(dukkha)에 대한 설명이었다. 흔히 고통으로 번역되지만, 골드스타인은 이를 ‘어긋남’ 혹은 ‘마찰’로 설명한다. 수레바퀴의 축이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상태처럼, 우리의 삶 역시 맞지 않는 조건 속에서 억지로 돌아갈 때 고통이 발생한다. 이 비유는 고통을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신체적 감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이 두카는 무상(anicca)과 연결된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지만, 우리는 그것을 고정된 것으로 붙들려 한다. 무지개가 조건의 결합일 뿐인데도 실체처럼 여기듯, 삶의 모든 경험 역시 조건적 현상이다. 이를 붙잡으려 할 때 어긋남이 생기고, 그것이 곧 고통이라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으로 제시되는 갈망(tanhā)은 시지프스 신화를 통해 설명된다. 시지프스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 속에 갇혀 있지만, 골드스타인의 관점에서는 그 고통이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자신은 바위를 밀어야 하는 존재’라는 동일시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역할에 대한 동일시가 곧 갈망이며, 그 갈망이 고통을 만든다. 이는 일상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어떤 태도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집착 자체가 또 다른 얽매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시를 떠올렸다. 시는 인간의 다양한 마음작용을 포착하는 언어인데, 염처경은 바로 그 마음작용을 관찰하라고 말한다. 대상은 동일하다. 다만 시인은 그것을 형상화하고, 수행자는 그것을 알아차린다. 시를 읽으며 경험하는 거리감과 메타인지는 마음챙김의 구조와 닮아 있다. 감정 속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시를 통해 한 걸음 떨어져 보일 때 드러난다.


시명상을 통해 도달한 ‘무아’의 감각 역시 이 책과 맞닿는다. 수많은 시에 반응하는 서로 다른 ‘나’들을 따라가다 보면, 고정된 자아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각각의 반응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며, 그것들이 모인 그 지점을 ‘나’라고 부를 뿐이다. 이는 골드스타인이 말하는 아낫따(anattā)와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경로는 다르지만 도달점은 같다.


골드스타인은 사념처 수행에 무게를 둔다.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층위를 통해 경험을 관찰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이해와 체험의 간극이 드러난다. 개념적으로는 따라갈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 경험으로 자리 잡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이다.


몸에 대한 관찰은 신체를 ‘나’로 동일시하지 않는 데 목적이 있고, 느낌에 대한 관찰은 쾌·불쾌·중성의 감각 자체와 그에 따른 반응을 구분하는 데 있다. 우리는 흔히 느낌이 아니라 그에 따른 욕망이나 거부를 동일한 것으로 착각한다. 이 점은 일상의 사소한 습관 속에서도 반복된다.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단계에서는 현재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는 훈련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실제로는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법념처에서는 탐·진·치와 같은 번뇌의 구조 자체를 통찰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결국 이 책이 주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통찰이다. 정보는 이해를 가능하게 하지만, 통찰은 체험을 통해서만 열린다. 그래서 이 책은 읽었다고 해서 ‘알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며, 그것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게 만든다. 

 

이 독서는 하나의 결론으로 끝나지 않는다. 두카의 마찰이라는 비유, 시지프스의 갈망, 무아에 대한 통찰은 모두 현재 진행형의 질문으로 남는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책을 덮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완결된 이해를 제공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관찰과 성찰을 요구하는 출발점에 가깝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삶을 경험하는 방식 또한 점차 달라진다. 통찰은 한 번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점진적으로 깊어진다.

이 글 역시 그러한 과정의 일부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사유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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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탈출법 - 평정과 휴식으로 이끄는 7가지 마음 기술
함영준 지음 / 북스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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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졌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났다."

뻔한 말이 뻔하지 않다고 여겨질 때는 누군가의 체험이 담겼을 때다. 뻔한 말을 뻔하게 할때는 다가오지 않는다. 수많은 말 중의 하나가 되어 그저 귀에서 미끄러진다.


암에 걸려 요양원을 전전할 때 이야기다. 나를 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아는 암 치료법을 들이댔다. 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안달 나 있는 표정이었다. 그때마다 속으로 소리쳤다. '나도 알거든!' 그들은 뻔했다. 신문에 나온 무언가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경험도 감동도 진실도 없었다. 그저 아는 것을 말하고 싶은 표정뿐이었다. 그러나 이 글귀는 달랐다. 다시 살아났다는 것! 환희가 느껴진다.


이 글귀는 『 우울탈출법』에서 가져왔다. 이처럼 정통으로 찌르는 말이 달리 있을까? 이 표현은 우울증에서 벗어난 저자가 사용한 말이지만 어떤 병이건 혹은 어떤 나락이건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우울은 놀라운 단어다. 마음의 감기라고 하듯이 누구나 다 느끼는 감정이라고도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번쯤 우울해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회색빛 우울에서 벗어나면 세상이 밝아보인다. 즉 어떤 조건으로 인해 우울해하다가 그 조건이 사라지면 다시 평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울증은 다르다. 마음의 번민이 무기력이 자신에 대한 비하가 오래도록 계속되는 일이다. 우울증에 이르면 뇌에서 나오는 호르몬이 달라진다. 많은 사람이 우울증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우울증은 어디서 올까? 사실 우울증은 가까이 가기도 꺼려지고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기운 빠진다. 겪는 이가 힘든 것처럼 보는 이도 힘들다. 그러나 저자는 과감히 자신의 우울증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말한다. 우울증은 루미네이션 때문에 생겨난다고. 끝없는 반추,


잘 나가는 신문사 기자, 청와대, 그리고 이제는 한 언론매체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엘리트 코스만 걸어온 그가 자신이 우울증을 앓았다고 고백한다. 도무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털어놓는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공황발작. 하룻밤 새 몸무게가 4킬로그램이나 빠진다. 병원을 돌면서 그가 받은 진단명은 우울증.


그가 묘사하는 우울증의 증상은 충격적이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차선으로 넘어가서 달리고 있었다고 털어놓을 때는 읽는 나도 아찔했다. 우울증 증상이 그 정도인가? 그냥 우울증은 무기력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상태 아니었나? 그저 의욕을 잃고 누워만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었나? 그럴 수도 있다. 그가 겪은 우울증 증상은 산란이다. 도무지 집중을 못하는 것이다. 무언가 한 가지 일을 하려고 해도 서너 시간 걸린다고도 썼다.


보통 사람의 주의 산란은 할 일이 많아서다. 한꺼번에 이일 저 일을 하려드는 것이다. 일거리가 많으면 집중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달랐다. 어떤 일을 하고자 했는데 그 일에 집중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만큼 마음이 산란하다는 것.


그의 나이 55세, 급격한 변화를 꾀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했다. 사회에 실망해 스스로 정치 세계에 뛰어들고 싶었던 것. 그 일이 붕괴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우울증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그의 우울증 원인은 새로운 세계로의 이륙이었는데 그 이동에 실패했던 것.


그가 말하는 우울증의 주된 증상은 루미네이션, 끝없는 반추다. 반추란 무엇인가. 뇌의 작용이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도 동일한 일을. 패배자의 심정.


생각이란 좋은 것이다. 생각을 거듭함으로써 우리는 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생각에만 골몰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무언가를 생산해내기 위해, 즉 목적 있는 생각과 실패의 원인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지나간 일에는 실체가 없다. 즉 허상이다. 이미 결정되어 결론이 난 일을 곱씹는다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허점투성이이기 마련이다.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허점이 나온다. 사실 세상 모든 일이 허점투성이인 채로 돌아간다. 세상사가 그렇지 않은가. 지나간 일을 수용할 때 비로서 새로운 출발점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는 있는 그대로 자신을 수용하기로 했다. 우선 의사를 만났고 처방전을 받아들었으며, 운동을 시작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명상. 그렇게 7개의 마음 처방전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책은 잘 읽힌다. 저자가 기자였던 덕분에 쉽고 명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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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대성당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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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평범한 일상과 툭 던져진 대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무심해 보이는 문장과 문장 사이, 인물들의 표정 없는 얼굴 뒤에는 인간 존재의 깊은 외로움, 소통의 어려움, 그리고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작은 깨달음의 순간들이 숨어 있다. 카버의 대표적인 단편으로 걸작으로 꼽히는 「대성당」(1983)은 단순히 세 인물의 역학관계뿐 아니라, 작가가 활동했던 시기(종종 1970년대 미국 사회의 그림자로 읽히는)의 불안과 소통의 어려움이라는 시대적 정황을 그 배경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대성당」을 포함한 카버의 작품이 가진 힘은 바로 평범해 보이는 일상과 툭 던져진 대화 속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진실을 파악해 내는 그의 탁월한 능력에 있다. 그는 불필요한 수식이나 장황한 설명 없이, 인물들의 건조한 대화, 사소한 행동 묘사, 그리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침묵을 통해 인물의 내면 심리, 관계의 균열, 그리고 삶의 단면들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러한 미니멀리즘적 접근은 독자로 하여금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감정과 의미, 즉 '행간'을 스스로 채워 넣도록 유도하며, 이를 통해 독자는 더욱 강렬한 울림을 느끼게 된다. 카버는 일상이라는 캔버스 위에 최소한의 붓질로 인간 본연의 외로움, 연결의 갈망, 그리고 예기치 못한 순간의 깨달음이라는 보편적인 진실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이야기는 평범하다. 어느 날 아내의 친구인 맹인이 화자의 집을 방문하고 화자는 그 맹인인 로버트가 불편하다. 맹인이기 때문에 불편하고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맹인을 가까이 본적도 사귄 적도 없ㅈ는 화자는 로버트의 방문을 불편해하고 일반인이 가졌음직한 편견으로 그를 본다. 로버트는 아내의 옛 친구이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느끼고 이해한다. 아내는 그 둘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지만 정작 본인은 깊은 피로 속에 잠들어버린다.

화자인 '나'는 보이는 것, 즉 시각적인 것에만 의존하며 세상을 판단한다. 텔레비전이나 술잔, 그리고 대마초에 익숙한 그의 세계는 좁고 평면적이다. 이는 어쩌면 당시 만연했던 사회적 불안이나 현실의 무게감에서 벗어나려는 당시 일부 사람들이 선택했던 방식 중 하나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아내의 과거나 맹인 친구와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맹인에 대해 그저 피상적인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맹인이 턱수염을 길렀다는 데 대해 놀라고 갈색의 색조로 옷을 차려입었다는 데 대해 놀란다. 그의 '봄'은 피상적이며, 타인의 깊은 내면이나 삶의 복잡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일종의 내면적 맹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반면 맹인 로버트는 물리적인 시각을 상실했지만, 타인의 말소리, 감정의 파동, 그리고 세상을 이루는 질감과 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이며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나눌 준비가 된 인물이다. 당대의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맹인이지만 그는 자신의 세계를 이룩해냈기에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높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아내는 이 둘 사이의 '연결고리'이다. 그녀는 화자의 현재이자 로버트의 과거이며,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아슬아슬하게 엮어주는 존재이다. 그녀는 특유의 배려심이 넘치는 태도 덕분에 맹인을 위해 일 년간 일했고 이후 그들은 둘도 없는 친한 친구가 되어 서로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기차역에서 맹인을 데리고 온 아내는 남편과 맹인 친구 사이의 어색함을 녹이려 애쓰고, 그들 사이의 대화가 이어지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아내는 막상 중요한 장면에서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든다. 단순히 피곤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잠듦은 어쩌면 그녀가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진정한 소통에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아버리는' 상태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내느라 지쳤거나, 혹은 현실의 관계 속에서 이미 체념한 부분이 있었기에, 기존의 편안한 관계를 넘어선 깊은 연결의 순간에서, 그녀는 잠시 부재하는 것이다.

아내가 잠든 늦은 밤, 화자와 맹인 로버트 사이에 전에 없던 깊은 교류가 시작된다. 연결 매개체인 아내가 물리적으로 부재하게 되면서, 화자는 맹인 로버트와의 직접적인 접촉, 함께 그림을 그리는 특별한 경험, 그리고 손과 손이 맞닿는 교감을 통해 비로소 '깨어난다'. 맹인은 화자에게 대성당을 그려달라고 요구하고 결국 함께 탁자 위에 손을 얹고 그림을 그리는 경험으로 이끈다. 대성당의 모습을 그려나가는 동안, 화자는 이제까지 그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봄'을 경험한다. 그것은 눈으로 보는 시각적인 형태가 아니라, 몸의 감각과 내면의 인식을 통해 대성당의 '실체'를 느끼는 경험이다.

소설의 마지막 문단은 이 깨어남을 몇 문장으로 묘사한다. 화자는 대성당 그림을 완성하고 눈을 감은 채 로버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My eyes were still closed. I was in my house. I knew that. But I didn’t feel like I was inside anything." 이 문장은 화자의 내면에서 일어난 극적인 변화를 생생히 보여준다. 그는 물리적으로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고, 자신이 익숙한 공간인 '집 안에 있다'는 사실도 명확히 인지한다. 하지만 "더 이상 어떤 것 안에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But I didn’t feel like I was inside anything)"는 부분에서 이미 경계를 뛰어넘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는 그가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자신의 좁고 편견에 찬 내면의 틀, 혹은 물리적인 경계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당대의 현실 도피적인 분위기나 그를 옭아맸던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맹인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육체나 집이라는 공간, 혹은 그를 둘러싼 사회적 편견이라는 '틀' 안에 갇힌 존재로 자신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니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물리적, 심리적 경계선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자각의 공간으로 나아간다.

눈을 감았기에 오히려 내면의 눈이 뜨였고, 익숙한 집 안에 있었지만 어떤 경계에도 갇히지 않은 자유로움을 느꼈다는 이 역설적인 묘사는 화자의 총체적인 '깨어남'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아내가 잠들어 물리적 매개체가 사라진 순간에, 화자는 맹인이라는 타인과의 깊은 교류를 통해 자신 안의 새로운 지평을 발견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봄'을 넘어선 존재 방식의 변화, 즉 진정한 '깨어남'이라고 볼 수 있다.

카버는 이처럼 세 인물의 단순한 배치, 미묘한 행동(아내의 잠), 그리고 그 결과로 벌어지는 예기치 못한 교감을 통해 인간관계에서 소통의 어려움과 가능성, 그리고 진정한 '봄'이란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비롯됨을 이야기한다. 세 사람의 역학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잠이 다른 두 사람 사이의 새로운 관계와 깨달음으로 이끌어가는 역동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그저 맹인의 방문으로 일어나는 극히 사소해 보이는 일상 이야기가 이처럼 깊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에 카버의 소설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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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슴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4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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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사에서 사진작가로 일하는 인영은 같은 건물에서 일하던 작은 제약회사의 여직원 의선이 거리에서 나체로 달리는 것을 목격한다. 어느 날 기억을 잃어버린 의선이 알몸에 트렌치코트 하나만 걸친 채로 인영의 집을 찾아온다. 차갑기로 유명한 인영이지만 의선을 거두기로 한다. 인영의 후배인 명윤은 우연이 의선에 관해 듣고 호기심을 가지는 정도였지만 인영의 집에 놀러 갔다가 의선을 보고 반해버린다. 어느 날 의선은 인영이 아끼던 바다 사진을 불태우고 목욕 다녀온다고 나간다. 그 사진은 인영이 언니가 죽은 제주 바다를 찍은 것이었다.

이후 명윤이 길에서 의선을 발견, 연파는 할아버지의 연 얼레를 훔쳐 도망가는 그녀를 뒤 쫒아 반지하방으로 가서 관계를 맺는다. 의선이 사라지고 난 후 명윤은 줄기차게 그녀를 찾으려 한다. 인영과 명윤은 탄광 사진을 찍어 사진집을 낸 장종욱이라는 사진가를 취재한다는 명분으로 의선의 흔적을 좆아 황곡으로 간다. 장종욱은 취재에 극히 불성실하게 응한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늦게 나타나고 게다가 취한 상태였다.

장종욱은 하루 종일 막장에서 광부들과 하며 사진을 찍을 정도로 사진을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광부들의 일하는 모습을 찍음으로써 보람을 느끼곤 했다. 막장은 위험한 곳이었다. 장 역시 자신에게 사진을 찍도록 허락해준 임이라는 광부와 함께 사고를 겪기도 했다. 여섯 명이 함께 일하다가 갱도가 무너져 두 사람만 남고 네 사람은 죽었던 것이다.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 갱에 매일 들어간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거는 일이었다.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아내는 장이 탄광촌이 무너지며 죽을뻔한 위기를 겪은 이후에 그를 떠났다.

​인영과 명훈은 황곡과 월선의 폐탄광촌을 찾아 다니면서 의선의 흔적을 좇는다. 의선이 말했던 함이라는 이름이 붙은 학교를 찾아다니고 폐탄광의 사업소와 탄광촌을 헤매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만 의선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의선에게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탓이다. 마침내 포기하고 떠나려던 순간 버스 터미널에서 우연히 어둔리가 현리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은 폭설을 무릅쓰고 연골을 찾아간다. 눈길을 걷던 그들은 아직 멀쩡하게 남아 있는 의선의 집에서 의선이 다녀간 흔적을 본다.

그러나 명윤은 밤새 고열에 시달린다. 다음날 아침 명윤은 자신을 놓고 가달라고 애원하지만 인영은 명윤을 부축하고 마을로 내려온다. 기진한 명윤을 내려놓고 마을로 달려간 인영은 이웃의 도움을 얻어 그를 데려오는데 성공한다. 마침내 그들은 기차역에 이른다. 그들은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기차를 타지만 사고가 일어난다. 장이 병원으로 찾아오고 회복되어 집으로 돌아온 인영은 의선이 가져갔던 사진을 발견한다. 그 사진은 인영이 언니가 배사고로 죽었던 제주 바다를 찍은 것이었다.

검은 사슴은 의선의 아버지인 임이 의선에게 해주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환상의 동물이다.

검은 사슴은 땅속 깊은 곳, 어두운 바위틈에서 살며, 뿔로 불을 밝히고 강력한 이빨로 단단한 바위를 씹어먹고 산다. 검은 사슴의 꿈은 지상으로 올라가 햇빛을 보는 것이다. 검은 사슴은 광부를 만나면 햇빛을 보게 해달라고 한다. 광부들은 뿔을 자르게 해주면 안내해주겠다고 한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에 검은 사슴은 뿔을 내밀고 뿔을 잘린 검은 사슴은 다시 햇빛을 보게 해달라고 하지만 이번에 광부들은 이빨을 요구한다. 이빨도 잃어버린 검은 사슴은 지하를 헤매다니다가 운 좋게 밖으로 나가 햇빛을 받으면 녹아버린다.

타인에게 모든 것을 주어버리고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이 동물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어둠 속에서 기어 다니면서 바위를 먹고 산다는 그 생태 자체가 고단하다. 이 동물의 마지막은 역시 서글프기 짝이 없다. 그처럼 염원하던 대로 마침내 햇빛을 보더라도 녹아버리는 것이다.

검은 사슴의 생태가 보여주는 것처럼 소설은 어둡다. 등장인물 모두가 과거의 상처를 갖고 있고 그 상처는 그들을 놓아주지 않으며 모두가 고통에 시달린다. 특히 의선은 주민등록번호조차 없을 정도로 무심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부모 역시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들로 어머니는 정신이 온전치 않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건사하느라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다.

모든 등장인물이 상처를 갖고 있다는 이러한 묘사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배경이 된 탄광촌은 이미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진 곳이다. 한때 정부는 광부들에게 ‘산업전사’라는 미명을 붙여 주었지만 그 산업전사는 목숨을 담보로 지하로 들어가 석탄을 캐내는 사람들이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만큼 그 대가는 소중히 여겨져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탄광촌에는 술과 여자와 노름이 넘쳐났다. 이제 석탄은 효용이 줄었고 탄광촌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기는 하짐나 그들 또한 절망을 짓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탄광촌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패배의 구덩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것은 잊혀진다는 의미다.

그런 그들을 상징하는 인물이 의선이다. 의선은 주민등록조차 되어 있지 않기에 자신의 정체성조차 갖지 못한 인물이다.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으로 쓰던 일기는 그녀의 삶을 말해주지만 기억조차 잃음으로써 자신조차 잃는다. 그런 그녀의 흔적을 추적하는 두 인물, 인영과 명윤은 자신들의 상처로 인해 의선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반드시 가야할 곳이 바로 의선의 고향인 연골이다. 연골은 세상의 모든 연이 바람을 타고 날아들어오는 곳이므로 희망이 힘을 잃고 내려앉는 곳이다. 그러나 연골에서는 그 모든 연을 모아 태움으로써 봄을 시작한다. 상실과 회복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곳은 죽음이자 탄생의 시발점이다.

의선이 기억을 되찾는 것에는 오징어 트럭을 모는 남자와 그의 아내가 한 몫한다. 그들은 의선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고 한편으로 애정을 보여준다. 의선은 마침내 기억을 되찾는다. 모든 사람에게는 상처가 있지만 그 상처로 인해 서로는 유대감을 느낀다. 한강의 첫 소설인 이 작품은 어둡다. 마치 탄광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끝없이 내려가고 또 내려가 마침내는 막장에 다다른다.

다행인 것인 이 막장의 끝에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막장속에서 사고를 만난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절대적인 연대로 살아남았듯 이들 역시 사랑으로 살아남는다. 인영과 명윤이 의선을 찾아가는 그 여정동안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듯 사진가 장 역시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을 돌아본다. 모든 주요 등장인물이 회복할 것이라는, 이전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암시를 담은 이 결말은 긴 어둠을 따라온 독자들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한다.

1998년, 20세기의 말에 나온 이 작품은 대단히 음울해 세기말의 한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산없화 도시화로 대변되는 20세기는 모든 개인의 심리에 영향을 끼쳤고 도처에서 우울증을 앓게 했다. 모든 주인공이 상처로 인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것은 20세기 말 현대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검은황금을 좇아 그저 파내려가기만 하던 갱도가 내려앉아 기차 사고를 일으키고 많은 사람을 죽이듯 산업화 도시화는 수많은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거대한 권력과 문명의 발달은 어떻게 할 수있는 것이 아니다. 약자인 우리가 살아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밖에 없다. 희망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아주 미약한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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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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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라고 말하면 그 대상은 나/우리이다. '간다'라고 하면 그 대상은 너/그/그들이다. 이 책의 번역자인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는 '소년이 온다'라는 제목을' 인간의 행동들(Human Acts)이라고 번역한 이유에 관해 논한다. 인간의 행위에는 양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피해자의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다. 피해자가 있다면 가해자도 있기 마련이다. 많지 않지만 「쇠와 피」 장에는 분명 가해자의 이야기가 있다. 「일곱 개의 뺨」에도 있지만 가장 많이 나와 있는 곳은 「쇠와 피」 장이다. 사실 이 책의 정점은 「쇠와 피」 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해자가 가하는 폭력의 목적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기도 하다.

피해자는 왜 피해자가 되었을까 하는 것이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도망할 수 있었는데도 도망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므로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도망하지 않도록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인간은 가해자일 수 있고 피해자일 수 있다. 상황에 따라 혹은 입장에 따라 인간은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데보라 스미스는 인간 행위의 양면성을 이야기하는 '인간의 행동들'을 번역서의 제목으로 삼았다. 스미스가 택한 제목은 원제목인 '소년이 온다'와는 정반대다. ‘소년이 온다’가 대단히 시적인 반면 '인간의 행동들'은 논리적이다. 저자와 번역자의 차이는 여기서도 나타난다. 저자가 직관적인 제목을 택했다면 번역자는 보다 더 이성적인 제목을 택했다. 저자는 사람의 가슴으로 들어가고자 했고 번역자는 생각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한편으로 알려주고자 하는 마음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소년은 왜 오는 것일까? 인간 행위의 양면성을 알려주기 위하여 오는 것일까?

양면성을 알려준다는 것 자체가 선택을 의미한다. 이러이러한 일이 있다. 광주 518과 같은 일이 있다. 그 일은 국가라는 절대 권력이 휘두른 폭력이 빚어낸 참사다. 그 참사를 알려주기 위하여 오는 것일까. 역사 속에는 무수한 국가 권력의 피해가 있다. 광주가 처음이 아니고 끝도 아니다. 그 끝이 되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또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느라고 바빠 일쑤 잊기 때문이다.

잊는다는 것은 의식에서 밀어낸다는 것이다. 밀어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면 잊을 수 없게 되는가? 기억을 공유하면 잊을 수 없게 되는가. 가장 근본적인 것은 잊히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공론화하고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잊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주인공들은 세대가 다르고 성별이 다르며 위치가 다르다. 한결 같은 것은 이들이 힘없는 피해자라는 사실 뿐이다.

첫 장인 「어린 새」에서 나오는 동호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섯 명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동호는 「검은 숨」의 주인공인 정대의 친구고, 정대는 죽임을 당했다. 「일곱 개의 뺨」에 나오는 은숙과 「밤의 눈동자」에 나오는 선주와 더불어 시체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쇠와 피」에 나오는 김진수 또한 상무관에 있었고 동호에게 캐비닛에 숨었다가 자수하라고 말한 장본인이다. 이들은 각기 1, 2, 3, 4, 5장의 주인공이다.

제6장인 「꽃 핀 쪽으로」의 주인공은 동호의 어머니다. 한편 에필로그인 「눈 덮인 램프」의 주인공은 이 소설에서 너 혹은 당신이라고 부르면서 말하는 내포 화자로, 동호가 살던 중흥동 집에 살았던 적이 있다. 결국 모두가 동호와 연결되어 있다. 내포 화자는 이들 여섯 명의 마음을 구성하는 사람이고 그들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며 그들의 혼을 불러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즉 내포 화자인 내가 동호가 될 수도 있었다는 전제가 이들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타자로 밀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열다섯 살, 동호는 상무대에서 시신을 돌보는 일을 자청한다. 다양한 형태로 죽임을 당한 시체들은 천 밑에서 부패해간다. 동호는 그 시취를 맡고 냄새를 몰아내기 위해 촛불을 피우며 친척들에게 시신이 놓인 곳을 알려주다가 결국에는 총에 맞아 죽는다. 동호는 왜 장례식에서 애국가를 부르는지 왜 태극기로 시체를 감싸는지 궁금해한다. 나라는 그 국민들이 믿는 최후의 보루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군인들이 시민을 죽이는 것도 이상하지만 장례식에서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 의아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후에 나온다.

정대는 죽임을 당한 시체로 나온다. 혼이 된 정대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말도 할 수 없고 어디론가 떠날 수도 없어 자신의 시체 주변을 맴돌다가 시체가 소각된 후에야 비로소 떠나는데 죽임 당한 이들의 무능력이 절절히 통감 되는 장이다.

은숙의 장은 글의 힘을 절감할 수 있는 장이다. 글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정권은 모든 책을 검열하며 방향에 어긋나는 구절은 가차 없이 검은 줄을 긋는다. 5년이 지난 후 출판사에서 근무하며 정권의 눈에 거슬리는 번역자가 번역한 책을 가져간 은숙은 책 한 권이 거의 통째로 검은 줄이 쳐지는 수모를 당한다. 그녀는 일곱 대의 뺨을 맞고 매일 한 대씩 잊겠다고 결심하지만 그렇게 될 리는 없다.

김진수의 장은 진수와 함께 유치장에 갇혔던 교대 복학생이 화자로 그는 자신이 당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에 김진수가 더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고문 도구로 볼펜이 나온다. 볼펜은 아주 흔한 필기구로 학생들이라면 항상 갖고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다. 볼펜으로 고문을 당한다면 볼펜을 사용할 때마다 고문 당한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쇠와 피 장에서 진수는 생식기 고문을 당한다.

「쇠와 피」 장이 무참한 것은 권력이 그들에게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본능을 이용한다. 한창인 청년 둘에게 밥을 한 그릇 준다. 국도 한 그릇 반찬은 김치 두어 쪽이다. 하루 이틀이라면 견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이 삼일 정도 계속되면 굶주림이 이성을 압도한다. 서로 상대가 더 많이 먹지 않을까 하고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게 된다. 거기에다가 좁은 유치장이 꽉 찬 상태로 씻지 못하고 일주일이 흐른다면 인간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굶주림에 눈을 희번덕거리고. 그렇게 권력은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게 만든다. 인간 이하의 상태, 그런 너희들에게는 양심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것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선언이 바로 권력이 목적하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적용했던, 목적했던 그 방식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밤의 눈동자」 장의 주인공인 선주는 이미 삼십 년 전에 고문당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 일, 여성으로서 치부를 남김없이 유린당했던 그 일은 수치심으로 그녀를 압도했다. 어떻게 생식기에 삼십 센티미터 자가 쑤시고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자궁 입구를 짓이겼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고문이 악랄한 것은 여성으로서 가진 존엄을 송두리째 무시하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모든 것을 압도한다. 특히 존재를 부정당했을 때 그 수치심은 어디에 가도 바로 서지 못하게 한다. 여성임을 말하는 가장 강력한 장기, 성스러운 장기는 생명을 낳는 자궁이다. 인간의 성스러움은 모두가 생명과 맞닿아 있다. 생명을 품는 장기인 자궁, 생명을 뿌리는 장기인 남성의 생식기,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버려 타인을 돕는 이타심, 그것이 바로 성스러움이다. 신을 갈구하는 행위가 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신을 논하고 신이 세계를 만든 방식을 논하는 것이 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꽃 핀 쪽으로」의 주인공은 동호의 어머니는 동호를 잃은 후 애달픈 심정을 말한다. 아들의 죽음을 잊을 수 없었던 어머니는 유가족으로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아이에게 덮어 씌워진 수치를 씻어내고자 했다. 동호의 아버지가 죽은 후 시위는 그만두었지만 그 아픔은 여전하다. 이 장은 동호가 어머니에게 꽃 핀 쪽으로 가자고 권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동안 518에 대한 명칭 자체가 변해왔고 이제 518은 폭력이 아닌 ‘민주화’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어느 정도 양지로 올라서게 되었다.

양지로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은 기억의 문제이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에 얽매어 있다 보면 아무리 큰일이라도 뒤로 미루게 된다. 먹고사는 일은 온 힘을 요구하는 고달픈 일이기에 특히 고통스러운 일은 제쳐 놓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 아픔을 공유한다면, 그들이 겪은 고통이 타인 또한 인간임을 알기에 경험한 것이라면 우리는 인간의 경지에 머물게 된다.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는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 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130).

열다섯 소년은 양심을 상징한다. 이 소설의 제목이 '소년이 온다'가 된 것은 열다섯의 동호가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소년이기 때문이다. 친구 정대가 죽는 것을 본 동호가 정대의 시체를 찾는다는 핑계로 상무관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시체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는 것인데 죽을 줄 알면서도 끝까지 남는 것이다.

왜 그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그런 일을 했을까가 이 소설의 핵심이자 이 소설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그들은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권력이 휘두르는 절대적인 폭력의 피해자, 죽지 않을 수 있지만 서로를 놓지 못해 죽음의 구덩이로 뛰어드는 그 일은 양심의 표상이다.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하여,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하는 행동이 바로 '소년이 온다'로 귀결되는 것이다. 내포 화자가 말하듯 누구도 그런 상황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 그런 상황이라면 길을 가다가도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일을 잊었을 때 혹은 미루어 두었을 때 본질적으로 동일한 일이 일어난다. 2009년의 용산 참사가 그러했고 2014년 세월호 참사가 그러했다. 그런 일들은 국가권력에 희생 당하는 약자들의 이야기다. 저자는 인간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온 소년을 기억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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