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쉬쏭 > 소 사육이 인간의 탐욕과 결부되어 보여지는 모습은……
육식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 시공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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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표지의 사진이 젖소의 얼굴로 생각된다. 젖소 하면 홀스타인종이라는 단어가 연상된다. 어릴적 목장을 했었던 외갓집에서 홀스타인 젖소들을 보아왔던 일을 생각하면 소와의 인연은 우리 전통 소인 황소와는 거리가 있지만 사진의 모습과 같은 젖소의 친근함이 느껴진다. 이런 소와 관련된 ‘육식의 종말’은 내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소 사육과 관련된 내용이다.

     몇 년 전 언젠가 다큐멘터리 방송을 통해 이 책의 내용과 비슷한 이야기를 보았던 생각이 난다. 내용은 이 책보는 더 자극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왔던 생각이 난다. 송아지 고기를 얻기 위해 갓 태어나자 마자 어미와 격리되어 고기 맛을 살리기 위해 철로 되어 있는 모습 것을 배제시킨 우리에다 근육질을 좋게 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활동을 제약하는 우리의 모습이 하나가 아닌 몇 백 마리를 사육하는 공동사육장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게다가 먹이와 활동의 제약에 약해지는 면역체계의 보완을 위한 각종 항생제 투여는 결국 인간의 간접적인 항생제 투여의 효과를 보이고 있다는 내용은 충격을 더해 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항생제는 둘째치고 인간의 탐욕을 위한 동물의 학대 모습은 도를 지나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이야기가 일목요연하고 논리적이며, 다종다양한 방면에 걸쳐 보여주는 저자의 이야기는 다시 한번 우리의 식생활을 돌아 보게 한다. 단백질 피마리드의 최정점에 위치한 쇠고기는 맛과 영양, 부에 대한 사회적 위상 등에 있어 어느 식단, 어느 음식보다 도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렇게 평가하는 근본 이유는 서구 문명의 소 사육과 연계된 식민정책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내가 미처 몰랏던 내용들이다. 거기에 소를 키우기 위한 목초지와 작물생산은 환경파괴에 이어지고 이런 과정을 통해 지구의 자연생태계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지구의 온난화의 주원인이 학교에서도 늘 상 배워 왔던 자동차의 배기 가스라는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던 이야기일 것이다. 허나 소가 지구의 온난화의 주범이라는 이야기는 생소하다. 또한 세계의 허파라고 하는 아마존의 개발로 점차 지구 환경의 복구가 어려워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를 뉴스를 통해 들어 왔지만 정작 아마존의 무차별적인 개발의 원인이 소 사육에 있다는 이야기는 이 또한 생소하다. 미국의 서부 개척사는 전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들려지는 이야기이며,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카우보이의 멋과 낭만은 미국을 미화시키는 내용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런 카우보이의 등장은 단지 세뇌 당한 그저 재미있고 아름답고 멋진 사나이의 이야기쯤으로 생각하지 그 카우보이들이 왜 탄생하였고, 그들의 역할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영국과 유럽인의 쇠고기 소비를 위한 산업역군이었고, 값싼 임금을 받고 일했던 3D직종 중의 하나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내용들을 보면 소 사육과 쇠고기 소비의 과정이 결국 미국 개척사이며, 남미의 개발과정이라는 이야기는 충격이다. 비단 저자가 이야기 하는 단편적인 내용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부개척의 이유와 그 과정은 미화된 서부개척사의 한 단면일 것이다. 또한 미국뿐만 아니라 남미,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신대륙들 모두 소 사육을 위한 새로운 경작지를 찾는 과정이라는 관점은 일리 있는 시각이라 생각된다. 거기에 덧붙여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의 민족들은 기아에 허덕이며 굶어 죽고 있는 상황에 사람이 먹어도 충분할 곡물이 사육되는 소의 지방질을 위해 풍족하게 소를 먹이고 있다는 이야기 또한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렇게 길러진 소는 더 많은 지방질 함유를 위한 곡물사료에 의한 사육과 톱밥, 쓰레기 등을 먹여 산업화된 동물로서의 변화는 결국 인간에게 그 병폐가 나타나고 있다. 소위 얘기 하는 광우병을 낳게 하고 있으며, 더 광범위 하게는 고혈압, 당뇨, 뇌졸증 등의 최근 성인병의 원인인 비만을 낳고 있다. 이런 인간 탐욕에 의한 질병들은 지구환경 파괴와 같이 동반되어 전세계를 죽음으로 몰아 넣고 있는 상황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최근 수입쇠고기 통관을 요구하는 미국의 압력은 “나와 같이 너도 같이 죽자”는 이야기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모든 수입쇠고기가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나 산업화된 쇠고기 생산과정이 왜곡되고, 수익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변화되면서 인간의 건강과 행복을 파괴하는 도구로 바뀐 상황에 대해서는 철저한 검역절차와 현장 실사를 통해 국민건강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활동이라 생각된다. 어찌 되었든 쇠고기 소비를 줄여 근본적인 생산량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나와야 할 것이며, 결국 육류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최근 웰빙과 맞물려 다이어트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 다이어트의 궁극적인 목적이 웰빙과는 직결되는 내용은 아니라 생각되지만 사회의 통념상 미의 기준이 바뀌어 생긴 내용이기도 하지만 다이어트를 하는 방법으로 쇠고기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이야기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육식에 의한 식단이 아닌 채식위주의 식단이 결국 다이어트의 좋은 방법 중에 하나일 것이다. 저자가 얘기하는 ‘육식의 종말’이지 않을까?

     우리가 먹는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라서 저자가 얘기하는 정도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일까? 소 사육은 아직은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머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지구 환경파괴의 주범이면서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소 사육의 실상을 보면서 우리의 먹거리 환경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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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전출처 : sunshineray > 우리 시대의 행복
노동의 종말 - 개정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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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리프킨은 이 책에서 경제 변화의 흐름을 되짚어보고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견합니다.  사실과 통계 자료를 이어가며 담담하고 건조하게 쓴 책을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우리의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제러미 리프킨은 전세계가 대공황을 거치면서 본격적인 소비 문화가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는 상품은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냅니다.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하는 필수 구매 리스트가 따라가기 바쁘게 새로워집니다.

탁탁 폴더형 핸드폰 닫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더니 곧 밀어내는 것이 우아해 보이고 가로로 눞힐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언제 어디서나 TV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얼마전까지 냉장고는 한번 사면 오래 잊어버릴 수 있는 몇 안되는 것들 중에 하나였는데 요즘에는 각 가정의 소득 수준을 한눈에 보여주는 '지표' 가 된 듯합니다.  TV를 보다보면 겨우 문 하나로 어떻게 야채를 싱싱하게 보관하고 얼음을 얼릴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하고 손님이 왔을 때 냉장고 옆에 잠시 서서 우아하게 웃을 수 없으니 스스로가  안쓰러워집니다.

리프킨은 교육 혜택의 불평등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되는 비숙련 노동과 반숙련 노동 그리고 단순한 사무직 노동이  기계와 소프트웨어로 대체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산업 사회 이전의 어느 귀족만큼이나 풍족한 현대의 평범한 사람들은 과연 행복한가? 앞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알랭 드 보통이 그의 책 [불안]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보통은 계급이 선천적으로 정해진 사회에서 오히려 각 개인의 정신은 더 독립적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낮은 계급은 신과 자연의 이치에 의해 정해진 것이므로 허름한 옷을 입고 지주에게 머리를 수그려도 최소한 그 시대의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경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과 속]에서 엘리아데 가 말했듯이 산업 사회 이전의 사람들은  이 광활한 우주를 관장하는 신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과 인생을 바라보았습니다.  사회에서 낮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신 안에 충실한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긍심은 드높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우리는 더 많이 가진 사람들과의 차이를 통해 스스로를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현대의 가난은 현실적인 고통 이외에도 대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무엇인가 '모자란' 사람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끄러워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느 시대보다 잔인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투명한 유리 천장을 통해 소수의 사람들이 향유하는 삶을 구경하며 마음 속의 가난이 커지는 시대에 사는 우리의 고민과 불안은 어쩌면 시대가 만들어낸 우울일지도 모릅니다.  '개인'의 고유함과 독립성을 강조하고 보장하는 듯이 보이지만 어떤 시대보다 한 사람의 가치를 단순하고 무자비하게 저울질하는 세상에서 '나의 행복'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가 인정하는 행복을 갖기 위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공인된 집단에 속하기 위해 모두 한 방향으로 뛰어갑니다. 거대 자본 아래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선택되고 살아남아 기본적으로 갖추어야될 것을 갖추고 어디가도 무시받지 않으려면 늘 긴장하고 끊임없이 노력해합니다. 그래서 우린 늘 불안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방 안에서 나는 행복한가 묻곤합니다. 나는 왜 행복해지지 못하는가라고 묻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리프킨과 보통의 책을 읽으면서 먼저 우리 시대는 행복한가, 이 시대의 행복은 무엇일까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TV 선전을 보며 한숨을 쉴 수도 있고 연봉이 높은 친구를 보며 스스로가 한심해 질 수도 있고 옆집에 놀러갔다가 남편이 미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는 있지만, 이런 순간들이 자신의 가치를 규정하고 삶의 귀중한 시간들을 지배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되지 않을까요.  이 삭막한 물신의 시대를 건너며 자신의 생각과 마음이 숨쉬는 영토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차들이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 옆 숲 속에서 오솔길을 만들어가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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