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기억된 남자
크리스티나 매케나 지음, 여상훈 옮김 / 들녘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4.4
때때로 내가 하는 선택들에 대해 자문할 때가 있다.
나는 왜 그런 일을 겪었고 어떻게 지금까지 왔는지 이유를 묻는 날이 있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내 잘못된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를 이렇게 만든 것들이 사실 모두 잘못된 것이었다면 어떨까.
내가 나에 대해 아는 것들이 전부 잘못된 기억이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올해 마흔한 살이 된 제이미 매클룬은 10개월 전 세상을 떠난 믹 아저씨를 그리워하며 늘 그렇듯 농장을 돌본다.
그의 정수리에는 이미 오래 전 탈모가 진행되어 한 줌의 갈색머리만이 놓여있고 오른쪽 눈에서 턱까지 그여진 흉터는 그의 인상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앨리스 아주머니, 그리고 믹 아저씨마저 사라지고 방치된 집안은 온통 잿투성이로 뒤덮여 폐허가 되었고, 그저 죽지 않기 위해 먹는 음식과 신경 안정제만이 제이미가 집 안에서 유일하게 손대는 것이다.
자신을 악몽 같은 수녀원에서 입양해 준 두 분이 떠나고 허전함과 공허함을 달래려 그는 알코올에 의존했고 브루스터 박사를 찾아 가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던 친구 패디와 로즈 부부는 제이미에게 신문 구인을 통해 여자를 만나보라는 제안을 한다.
제이미는 신문을 찾고 브루스터가 권유한 다이어트까지 하기로 결심하며 새로운 삶을 기대하기 시작한다.

교사인 리디아 디바인은 목사이던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인 엘리자베스와 함께 살고 있다.
강압적으로 모든 일에 규제를 하던 보수적인 아빠 때문에 남자친구는 상상조차 못했고, 품위와 교양 같은 말들로 가득 찬 일상에서 드디어 빠져나온 리디아는 아침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엄마와 티격대며 지내고 있다.
마흔이 되어 조금씩 일탈을 꿈꾸는 그녀에게 청첩장이 날아오고, 더 이상 엄마와 결혼식을 가지 않겠다 말하는 리디아에게 친구 대프니는 신문에 짝을 찾는 광고를 실어보라 조언한다.
그렇게 엄마 몰래 광고를 실은 리디아는 세 통의 편지를 받아 그 중 괜찮아 보이는 상대에게 답장을 보내고 회신을 통해 만날 약속까지 잡게 된다.
대프니와 약속 장소에 나간 리디아는 61살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이는 상대의 외모에 깜짝 놀라 자신이 리디아가 아닌 척 부인하며 여자 화장실 창문을 통해 탈출해버린다.
그리고 자신이 농부라고 소개한 편지에 답장을 보낸다.

제이미는 답장을 받고 또 다시 로즈에게 달려 가 대필을 부탁해 그녀가 써준 대로 편지지에 옮긴다.
책은 하나도 읽지 않지만 패디가 갖고 있는 카우보이 소설 제목을 빌려 쓰고, 요리에 관한 질문에 로즈의 번 레시피를 넘겨 받으며 자신이 잘하는 요리라고 써서 보낸다.
그리고 숱이 없는 머리를 가리기 위한 가발을 주문하며 브루스터가 권유했던 휴가를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자신이 가진 가장 깔끔한 옷인 믹 아저씨의 정장을 구겨 입고 우스꽝스러운 뾰족 구두를 신은 제이미는 테일러스타운의 해변가 게스트하우스로 무작정 찾아 간다.
리디아의 이모인 글래디스는 누가 봐도 허름한 농부 차림새의 제이미를 쫓으려 하고, 마침 엄마와 함께 이모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은 리디아는 그를 보며 연민을 느낀다.
브루스터의 추천으로 왔다는 말에 제이미를 안으로 들인 글래디스는 몇 배의 요금을 부르고 제이미는 믹 아저씨가 남긴 예금에서 암컷 양 한 마리 값의 숙박비를 치르며 겨우 게스트하우스에 묵는다.
밤이 되어 리디아는 이모의 조언대로 조금 짧은 치마와 화려한 블라우스를 걸치고 해변가를 구경하다 우연히 점을 보게 되고, 점술가에게 한 남성이 운명에 보인다는 소리를 듣는다.
연회장에서 창피를 당하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밤의 해변을 거닐던 제이미와 마주친 리디아는 그에게 미소를 보내고 둘은 그렇게 스쳐간다.
짧은 휴가를 마친 일상에서 리디아와 제이미는 만나기로 하고 약속을 잡는다.

로맨스처럼 가장한 둘의 만남을 표면 상 내보이지만 이 글이 쓰여진 이유는 바로 제이미가 있던 수녀원의 일상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86번으로 지칭되는, 제이미로 보여지는 그 아이의 처참한 일과가 계속해서 그의 미래와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너는 쇼핑백에 담겨 버려졌고 너와 같이 있던 누이는 죽었다며 그건 모두 네가 나쁜 아이이기 때문이고 더 이상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제이미, 86번은 수녀들에게 늘 들으며 자랐다.
석판을 손에서 놓치거나 이불에 실수를 하는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없이 가해지는 폭력에 아이들은 친구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익숙해져있다.
어류의 간에서 나오는 지방유라는 간유를 매일 먹고 잦은 실수들로 인해 매일 혼나며 밤에는 성폭력까지 가해지는 일상, 페얼리 가문의 농장일을 도우러 수녀원을 떠났어도 고통은 아이에게서 떨어지는 법이 없고 결국 도망친 그에게 깨진 그릇으로 얼굴의 흉터를 남긴다.
다시 돌아온 수녀원에서 농부라는 한 부부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들기까지 꼬박 10년을 86번 제이미는 자신을 버린 엄마와 멀리 떠난 누이를 그리워 하며 견뎌냈다.

어째 이어질 듯하면서 이어지지 않고 잘 될 것 같으면서 느낌이 묘하더라니 결말을 막장 드라마로 만들지 않기 위한 노림수였다.
차마 상상도 못했던 결말은 리디아와 제이미의 만남 이후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빠르게 모든 것을 정리한다.
각자에게 필요했던 게 무엇인지 서로가 몰랐음에도 그걸 정확히 채워주는 결말인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다시 삶에 적응하면서 모든 게 다 거짓말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작별을 고하는 제이미의 마지막 모습이 아련하다.
인정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아픔이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말하는 제이미가 너무도 안쓰러워서 그대로 끝나버리는 게 싫어졌다.
행복한 순간 하나 쥐지 못하고 겨우 빛 하나 드디어 마주하게 된 때에 그만하면 됐다고 끝나버리는 이야기, 철저하게 이용당한 삶이 되어버린 듯해 더 마음이 쓰인다.
내내 해피엔딩이 아니면 어쩌나 마음 졸였다.

the misremembered man, 잘못 기억된 남자.
제목과 표지만으론 그리 흥미가 생기지 않았는데 뒷장의 소개글이 인상 깊었다.
이 이야기는 밝혀지지 않은 깊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거짓말이다 라는 말과 함께 ‘사십 년이 흐른 지금, 나는 여전히 비닐 봉투에 담겨 돌계단에 버려진 아이다’ 라는 문장이 눈에 밟혔다.
다 읽고 난 지금도 모든 게 마주치는 마지막 페이지와 함께 저 문장이 아린다.
어릴 적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었던 날, 혹은 대학생 때 <도가니>를 읽던 순간의 감정이 아마 지금의 먹먹함과 닮아 있지 않았을까.
결코 가볍게 읽어선 안 될, 감당하지 못할 만큼 쓰디 쓴 이야기.

살며, 노래하고, 춤추고, 연주하고 싶었다. 빛나는,
소중한,
신이 주신,
사랑이 이끄는,
릴리가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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