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개의 산
파올로 코녜티 지음, 최정윤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4.4
주인공 피에트로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외삼촌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피에트로와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유랑하는 아버지를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다.
공장에서 일을 하다 휴일이면 산을 찾아 떠나는 아버지로 인해 가족들은 밀라노에 집을 둔 채로 유령 마을 같은 그라나에 정착한다.
친척들과 연을 끊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인해 부모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자란 어린 피에트로는 그라나에서 또래인 브루노와 마주치게 된다.
자신보다 몇 달 형인 브루노가 궁금하면서도 친해질 필요가 없다 생각했던 피에트로였지만 고립된 곳에 단 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둘은 가까워진다.
모든 사람들과 적이 되는 아버지의 성격을 달래는 역할을 하는 어머니는 불쌍한 아이들을 그냥 보지 못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는 브루노에게 공부를 가르치게 되고, 브루노는 점차 가족처럼 스며든다.
아버지, 브루노와 함께 셋이 산을 올라 더 부자 지간처럼 느껴지는 브루노에게 질투를 느끼기도 하고, 브루노를 다시 데려 가려 브루노의 아버지가 아버지를 폭행하는 장면 같은 것들을 보면서 피에트로는 자라났고 마침내 아버지와 산에 오르는 일을 거부하며 소년 시절을 스스로 끝낸다.

그라나와 밀라노를 오가며 학창 시절을 보낸 피에트로는 그라나를 떠나 도시로 가고, 아버지를 따라 벽돌공의 일을 하던 브루노는 그라나의 삼촌의 방목장에 계속 머물면서 둘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거리가 생긴다.
한참만에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다시 돌아온 그라나에서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채로 피에트로와 브루노는 다시 만난다.
아버지가 아무도 모르게 자신에게 남긴 유산을 소개하는 브루노를 보며 피에트로는 자신이 잊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조금씩 떠올리고 혼자만의 화해를 시작한다.

읽으면서 ‘여덟 개의 산’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줄곧 궁금했었다.
아버지와의 갈등이랄까 의견 차이는 사실 소년 시절 아버지를 묘사하는 부분이나 산에 오르고 싶지 않은 마음 같은 걸로 간접적으로만 표현될 뿐 그렇게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감정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마침내 마음 속으로만 품고 있던 반항을 끄집어 내어 표현한 이후 다음 장, 아버지의 첫 등장은 죽음이었다.
아버지의 유산으로 진행되는 다음 이야기부터 기억 속에서만 나타나는 아버지는 때로 미화되기도 하지만 늘 똑같은 이미지였는데 브루노가 바로 그 부분을 깨트려주는 역할을 한다.
권위적이고 완고한 아버지가 아닌 산에서 언제나 뒤를 돌아보며 나를 걱정하던 아버지의 모습 또한 존재했음을 브루노는 아버지가 직접 설계한 집을 만들면서 피에트로에게 일깨워준다.
후반부의 이야기는 라라의 존재로 인해 조금 미묘하게 틀어지지만 어쨌든 브루노와의 우정을 주제로 하면서 아버지와 외삼촌 피에로의 모습과 둘을 겹쳐 보이게 만든다.

검은 선, 빨간 선, 초록 선, 아버지와 아들, 그 사이를 비집고 존재하는 아들 같은 친구, 셋의 관계가 산에서 크레바스를 건너는 장면을 통해 가장 잘 보여진 것 같다.
결국 그 크레바스를 통해 피에트로가 느낀 감정과 그 날 자신이 지켜보았던 아버지와 브루노의 모습이 이 책의 주제라고 느껴진다.
벽돌공과 학생으로 만난 브루노와 피에트로 사이의 거리와 아무도 모르게 서로 눈을 마주치며 턱을 끄덕이고 손가락을 드는 장면 또한 지나고 보면 기억에 남는다.
얇은 책이라 금방 읽기도 했지만 그만큼 큰 사건이나 메시지 같은 것 없이 고요하게만 흘러가는 책이다.
사실 라라가 등장하면서 결말까지의 전개는 굳이 필요한가 싶을 만큼 잘 맞지 않아 보인다.
후반부에서 이야기는 브루노에게 가까이 가 그를 아버지로 만들었다가 실패를 쥐어주면서 다시 슥 멀어진다.
피에트로가 네팔에서 히말라야를 등반하고 여러 경험을 할 동안 듬직하고 꼿꼿하게 서있던 브루노는 그라나에서 한 발도 떼지 않은 채로 점점 무너져내린다.
다시 가까이 다가갔을 때 브루노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둘의 친밀도를 통해 넌지시 알려주는 것 같다.
그리고 황급히 떠난 피에트로가 큰 폭설 이후 자신들의 아지트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더 이상 브루노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의 주인공이 피에트로가 아닌 브루노라면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브루노의 마음은 피에트로보다 더 두꺼운 페이지를 만들어낼 만큼 많이 복잡했을 것 같다.

정말 단순한 이야기다.
아버지, 피에트로, 브루노를 중심으로 그라나와 아버지의 유산이자 둘의 아지트인 바르마가 배경의 전부인데 <여덟 개의 산>이라는 제목의 정체는 뜬금없이 네팔에서 등장한다.
세상에 가장 높은 산이라는 메루산과 메루산을 둘러싸고 있는 여덟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의 모습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말이 갑자기 등장하고 그것이 제목이 된 이유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공개된다.
그러니까 마지막 결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제목이 된다.
별다른 내용이 없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곱씹을수록 묘하게 슬퍼지는 책이다.
전혀 가깝게 묘사되지 않지만 단 하나 뿐인 친구, 두 명의 아버지, 몰입해서 감정 이입이 될 만큼도 아니고 모르겠는 부분도 있는데 시종일관 잔잔하게 흘러갔던 이야기가 생각할수록 더 쓸쓸하게만 느껴진다.
떠올려 보니, 그렇게 연결해서 보니 읽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이야기가 남긴 걸 그래도 겨우 주운 것 같다.

아버지를 따라 산을 타던 것을 그만둔 지 한참이 지나서야, 어떤 인생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산이 존재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나와 그의 인생에서 정중앙에 있는 산, 우리의 인생이 시작된 처음으로는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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