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4.6
허름한 동네에서 홀로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는 명정은 어느 날 외국어가 쓰인 정체불명의 택배 하나를 받는다.
송장에 적힌 이름이 8개월 전 비행기 사고로 행방불명된 외아들의 것임을 알게 된 명정은 복잡한 마음으로 상자를 열고, 그 속에 시체처럼 웅크리고 있는 로봇을 보게 된다.
무료 드라이클리닝을 조건으로 이웃인 세주를 불러 회사에 전화해 본 결과, 로봇의 출처는 아들이 직원으로 있었던 바이오 산업 관련 회사이며 직원 혜택으로 신청 시 돈을 내고 제품 샘플을 가질 수 있게 해줬는데 아마 그게 도착한 것 같다는 말과 함께 곧 회사는 문 닫게 될 지 모르니 샘플의 보증은 해줄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세주에게 평생 무료 드라이클리닝을 제공하며 한국어로 된 두툼한 제품 설명서까지 갖게 된 명정은 열일곱쯤 되어보이는 소년형 로봇이 꼭 아들과 겹쳐보여 오래 전 둘째가 생긴다면 형과 돌림자를 넣어 짓고자 했었던 잊혀진 이름을 로봇에게 주고 만다.
그렇게 은결은 명정과 함께 세탁소에서 지내게 된다.

시호와 준교 같은 초등학생들의 스타가 된 은결은 그들이 하는 말에도 회로를 가동하며 단어의 변화형에 대해 고민해야 할 만큼 미숙하고, 명정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는 물론 조용한 일상에 끼어든 말하는 기계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sns와 방송의 집중도 잠시, 점차 사그라드는 관심에 익숙해지고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은결은 명정을 따라 세탁소 일을 도우며 그의 일상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를 알고 표정과 말이 뜻하는 바를 관찰하며 은결은 세탁소라는 좁은 공간 속에서 자라난다.
시호와 준교가 교복을 입고 사춘기를 맞으며 커 가는 순간에도 은결은 변하지 않지만 성장해간다.
세탁소의 손님들을 통해 사람과 삶과 죽음, 그 속의 무수한 인과와 관계를 알지 못한 채 그저 바라볼 뿐인 은결에게 명정은 언제 어디든 원할 때는 가도 좋으니 전원이 꺼지기 전 돌아오라고 말한다.
늙고 병들어 죽는 과정 속에서 홀로 변하지 않는 은결은 주변의 변화를 모두 인식하며 그것을 받아들인다.
마침내 스스로 생각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하게 된 은결은 변함 없는 일상 속에서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하며 무너짐을 경험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은결은 로봇의 그것을 벗어난 충동과 한 스푼의 세제로 드디어 변해지고 만다.

찬찬히 곱씹고 싶은 책이다.
삶을 나직하게 그려내는 대사들은 쿵하고 와닿지는 않아도 계속해서 잔잔하게 울린다.
불가능한 설정이라는 걸 아는데도 시호의 원피스 주머니 속 씨앗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휴머니즘 드라마가 따로 있나 이런 게 휴머니즘이고 드라마지 하는 감상이 흘러나온다.
몽글몽글, 빨래 냄새 같은 기분 좋은 포근함이 배여있는 이야기다.
아무리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도 마음에 든다.
따뜻한 동화 같아, 좋다.


혈연을 비롯한 모든 관계를 한순간에 잘라내는 도구는 예리한 칼날이 아니다.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 끊어지고 마는 낱장의 휴지에 불과하다.

무슨 수로 인간은 그 다양한 상황에서 가장 합당한 말 한 마디를 골라 건넬까. 눈앞의 사람이 아픈지 슬픈지 분하거나 억울한지 또 달리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마이크로 단위의 시간 동안 확정하고 가장 그럴듯한 조치를 취할까. 어쩌면 사람이 그때 그 순간에 가장 적절하게 반응한다는 것도 확률의 문제일 뿐, 실은 그들이 내놓는 모든 결론과 행위 또한 매 순간 몇 제타바이트에 이르는 오해를 동반하는 게 아닐까.

데어버리도록 뜨겁고 질척거리며 비릿한 데다, 별다른 힘을 가하지 않고도 어느 결에 손 쉽게 부서져버리는 그 무엇.

“괜찮아. 형태가 있는 건 더러워지게 마련이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지우고 또 지웁니다. 어차피 다시 졸릴 테니 잠자리에 들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처럼요.”

“무엇보다도 나는 꿈을 꿀 줄 아는 사람과 인생을 함께하고 싶어.”
은결은 사람이 말하는 꿈에 크게 두 가지 다른 뜻이 있음을 안다. 그녀의 입에서 터지는 겹자음의 경음은 푸른 멍이 든 자리에 붙인 반창고 같다.
“잠들어 꿈을 꾸고 거기서 깨어날 줄 아는 사람, 꿈을 그리거나 그렸던 적 있는 사람과 살아갈 거야. 깨어난 뒤 남아있는 것이 악몽뿐이라도 상관없고, 깨어져 형태를 잃은 꿈의 파편을 쓸어담으면서 살아갈 뿐이라도 괜찮아. 거기에 뭉개고 뒹굴지만 않는다면, 손대지 않으면 적어도 베이지는 않을 테니까.”

이제 와 하나 마나 한 생각이지만 처음부터 이름을 붙여선 안 되는 거였다. 그 이름은 언제까지고 펼칠 일이 없는 종이 속에 접어두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름을 붙여준 것을 떠나보내는 방법에 아직도 익숙지 않다.

이해 불가능한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구전을 통해 허황되게 부풀려지는 것들. 존재의 진실성 여부가 그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수긍과 인정에 달려있는 것들. 잊어버린 채 방기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노크해 오거나 부지불식간에 덜미를 잡아채는 것들. 실체를 확인하고 분석하기 위해 과감히 렌즈를 들이대면 사라지는 것들. 그래서 때로 지나치게 의미가 부여되곤 하는 것들.
그러므로 존재하기를 그만둘 게 아니라면, 차라리 이해하기를 멈춰야 옳은 것들. 은결은 그 가운데 하나의 모습으로 그의 곁에 머물러왔다.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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