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남녀
나혁진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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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주소만 강남일 뿐 낡고 낡은 낙원아파트에 2년 전, 하나의 살인 사건과 또 하나의 살인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개포동 사건으로 불리며 대규모의 수사 인력이 잠시 동원되기도 했으나 연쇄 살인인지 별개의 범행인지도 추려지지 않는 채로 사건은 미궁에 빠졌고, 2년이 지나도록 범인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는 채로 방치되었다.
유지혜는 2년 전 살인 미수의 피해자로 사건 당시의 기억은 하나도 없지만 여전히 칼로 찔렸던 후문 근처에는 얼씬도 않고, 밤과 낯선 자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며 PTSD에 시달리는 중이다.
사건으로 인해 다니던 자전거 회사의 비서를 그만두고 학원 영어 강사로 일하는 유지혜는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6월의 날씨에 바바리 코트를 걸친 수상한 남자를 보게 된다.
그 수상한 남자가 술자리에서 자신이 여전히 불안함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를 몰래 듣고 집 앞까지 쫓아와 범인을 잡자고 하며 명함을 건네고 간 다음 날, 명함의 블로그를 통해 그가 서울대 공대 연구원으로 범죄를 해결해 표창까지 받은 사실로 신빙성을 얻은 유지혜는 탐정 강마로라는 부실한 명함에 속는 셈치고 전화를 건다.
그렇게 아마추어 탐정 강마로와 피해자 유지혜는 주변을 탐색해가며 2년 전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둘은 살인 사건의 피해자인 최순자와 유지혜의 공통점인 낙원아파트의 봉사단체, 낙원회의 회원 8명을 용의자로 선정해 2년 전의 그들을 추적해가며 각자가 숨기려 했던 진실들과 비밀들을 조금씩 드러낸다.
나귀가 사자 행세를 하다 들켜 맞아 죽었다는, 최순자가 죽기 전 회식 자리에서 말한 이솝 우화를 동기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과연 누구일지, 왜 아무 상관 없는 유지혜를 칼로 찔러야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는 아주 뜸을 들이며 답을 미룬다.
가십 거리에 환장하며 이리저리 소문 퍼뜨리기 바쁘던 최순자를 죽일 사람은 많아보여도 유지혜를 죽일 사람은 전혀 감도 오지 않는다.
하지만 뻔하다면 뻔할 수 있는 범인이기 때문에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아무 징조없이 확 터뜨려버리는 방식으로 이야기는 반전을 꾀한다.

추리 소설인 것 치고는 그리 탄탄하지만은 않은 듯한데 라이트 노벨인 걸 감안하면 읽는 재미는 충족시켜준다.
어차피 배경이 아파트라 다른 범인을 끌고 와 스케일을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 좁은 봉사 단체 안에서 온갖 버라이어티한 일들이 펼쳐지는 것 정도는 코난이 가는 곳마다 살인이 일어나는 거나 비슷하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피해자로서의 유지혜나 탐정으로서의 강마로의 캐릭터는 지나치다고 할까 어설프다고 할까, 아무튼 완벽한 등장인물의 역할을 못 해내는 듯하다.
학원 강사 취재를 하기 전에 PTSD 환자들의 취재를 하셨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살인이 아니라 폭행과 학대만 해도 피해자에게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후유증을 남기는데 하물며 살인미수의 범죄가 남긴 피해가 고작 일을 할 수 없어 그만두고 갑자기 꺼진 불에 비명을 지르는 정도로 그려지는 건 정말 아니다.
신경 정신과에서는 이만하면 괜찮다 말할 정도라 하지만 어두움에 불안을 느끼면서 가족들이 일찍 들어오라는 재촉에는 화를 내는 주인공은 방어 기제로 기억 상실까지 일으킨 트라우마가 무의식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음을 보여준다.
거기에 탐정이라는 또 다른 주인공과의 만남을 그리는데 그런 피해자를 술자리부터 집 앞까지 쫓아오는 설정이라니 정말 아주 많이 별로였다.

범죄 동기, 범행 방식 같은 게 한 번에 그려지지 않는 건 아파트 단지의 구조 탓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따라가기 귀찮게 느껴진다.
뭔가 깔끔하게 떨어지기 보다는 쓰잘데기 없는 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각 회원들의 인물 설정은 눈에 확 들어온다.
공군 대령 출신의 회장, 음대 교수, 드라마 작가, 30대 부부, 가수 지망생 중 사람을 목 졸라 죽이고 칼로 찌른 사람은 누구였을까.
파헤쳐지는 과정과 드러난 비밀과 실제 범행이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은 들지만 그 짜여진 판 자체는 마음에 든다.

표지가 색다르다고 좋아했던 책들이 모두 라이트 노벨인 걸 알고 보니 더 이상 손이 안 갈 것 같다.
예쁜 표지들이 더 나왔으면 했는데 일반 소설에서 표지의 다양성을 기대하기는 힘든가 보다.
그래도 비슷한 느낌의 <봉명아파트 꽃미남 수사일지> 보다는 제목부터 완결까지 이 책이 확실히 더 낫다.
사건의 당사자인 피해자가 주인공인 것도 그렇고, 경찰은 무능력한 집단인 건 매한가지지만 경찰이 제 3자에게 수사 자료를 유출하는 것보다야 못 미더워도 탐정이 조사하는 게 나은 것도 같고, 애인과의 사연보단 형에 대한 질투가 더 현실성 있기도 하고 말이다.
아무튼 딱 적당한 라이트 노벨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본의 라노벨에 비하면 조금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 같아 많이 아쉽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니 희망을 가지는 계기로 삼는 수 밖에.
정통에 못 미치는 완성도에 캐쥬얼을 섞어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들만 쏟아내지 않고, 무언가를 의식하고 따라하지도 말고, 가는 방향은 같지만 마치 편법처럼 지름길로 빠져버리는, 재밌지만 새로운 이야기가 보고 싶어진다.
뻔하지 않은 이야기, 그때가 되면 예쁜 표지들을 마음껏 집어들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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