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0
인공수정으로만 아이를 갖고 애니메이션 같은 2D 캐릭터와 성욕을 해소하며 부부 간의 스킨십이 근친상간으로 여겨지는 미래의 평행세계, 실험도시에서는 남자 또한 인공자궁을 통해 수정을 시도하며 매년 크리스마스에 거주민 중 랜덤으로 선정된 사람들이 임신하고 그로 인해 출생한 아가들을 모두가 엄마로서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아마네는 사랑의 색인 붉은 색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엄마에게 엄마와 아빠가 사랑한 결실로 자신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커왔다.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아마네는 자신이 아주 오래 전 사람들이 하던 원시적인 교미를 통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엄마가 심어놓은 사상이 아닌 자신만의 본능을 정의내리기 위해 만나는 인간 애인들과 섹스를 시도한다.

처음 책 소개글을 봤을 때는 실험도시 부분이 너무 소름끼칠만큼 생경해서 섬짓했던 것 같다.
다 읽고 보니 그 불쾌감보다 더 심오한 질문이 남는다.
총 3부로 나뉘어진 책은 1부에서 아마네가 성장하는 과정과 결혼과 재혼까지의 내용을, 2부에서는 남편과 가족으로 지내면서 서로의 애인을 만나다 둘 다 사랑에 실패하는 장면과 그로 인해 사랑의 도피를 결정하는 내용이, 마지막 3부에서는 부부임을 숨기고 에덴이라는 이름의 실험도시로 이주해 지내면서 변화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마네가 각자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주변 인물들을 접하면서 가족에 대해 고민하고 결혼과 출산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에서 이야기는 조금씩 궤도에서 멀어져간다.
껍데기 뿐인 애인과 가족,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인간과 무생물의 구별 없이 그저 타산적으로 소비되버리는 세계에서 가족이 주는 온기의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다.
가족의 필요성을 잃고 또한 고집스레 겨우 끌고 온 인간애인과의 섹스가 자위에 불과하며 무의미한 일임을 깨달은 채로 아마 인간의 최종 목적지가 될 곳에서 마주한 풍경에는 모두가 이름을 잃고 같은 표정으로 애완동물처럼 길러지는 모습이 놓여있다.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열망은 셀 수 없는 아가들을 마주하며 퇴색되고 바래진다.
무뎌지고 감퇴하며 겨우 남아있던 그 마지막 끈이 끊어진 순간부터 이야기는 폭주하며 분열된다.
그리고 이 모든 원인인 엄마를 편집하며 이미 배설되어버린 본능을 만들어내려 한다.

선악과를 먹어 욕망을 알게 된 아담과 이브, 만약 선악과의 효능이 다하거나 다른 열매로 다시 낙원인 에덴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이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에덴동산에서 쫒겨나며 모든 걸 잃은 아담과 이브와 모든 것이 소멸되어가는 현재의 에덴을 생각하면 ‘소멸세계’라는 제목은 이해가지만 잘 익진 않는다.
중간중간 섬짓한 대사들이 긴장감을 잇는다.
그에 비해 결말은 제대로 된 낙원을 보여주지 않아 아쉽다.
조금 더 나아갔어야 했다.
아주 새까맣고 무거운 돌을 기껏 들고 와놓고 얼마 가지 못하고 던져 버렸다.


“인간은 점점 진화를 거듭해서 영혼의 형태며 본능도 바뀌어가잖아. 완성된 동물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으니 완성된 본능도 존재하지 않지. 누구나 진화의 과정에 있는 동물일 뿐이야. 그러니까 세상의 상식과 부합하든 하지 않든 그건 우연에 불과하고, 다음 순간에는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어지는 거지. 우리는 진화의 순간을 살아가는 거야. 언제나 그 길을 가는 ‘도중’이라고.”

“엄마는 말이지, 네가 이 미친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도록, 무엇이 올바른 세상인지 어린 너에게 가르쳤단다. 네 영혼에 똑똑히 새겨 넣었어. 태어나서 처음 본 세상이 우리 영혼에서 지워지는 일은 절대로 없어. 지금은 이 세상에 물들어 있어도 언젠가 반드시...”

남자나 여자, 그러한 구분 없이 우리는 모두 인류를 위한 자궁이 된 것이다. ‘정상’이라는 들리지 않는 음악이 우리 머리 위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음악에 지배당하고 있다. 내 몸속에도 어느새 그 음악이 우렁차게 퍼져 나갔다. 그 음악을 따라서 나는 다정한 목소리로 우리 ‘아가’를 불렀다.

이것저것 잘 먹는데, 제일 많이 먹이는 건 이 세상이야. 세상을 먹고 그 세상에 딱 맞는 형태로 변화하는 동물이란다. 아주 신기하고 재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