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범
권리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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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상상하는 것이 범죄가 되는 세상을 그린 이야기라니, 신간 소식에서 접하고 꼭 읽어야지 싶었다.
˝나는 사랑하는 것들을 떠올렸을 뿐입니다. 제가 누굴 죽였습니까? 강간을 했습니까? 거짓말을 했습니까? 저는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어요! 죄는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피해를 수반하는 것 아닙니까? 상상이 도대체 왜 거짓이고 죄란 말입니까?˝라는 뒷 표지의 대사가 `상상범`이라는 제목만큼 눈에 띈다.

첫장부터 놀랍다.
책의 배경은 이천백 몇 년, 대규모 지각변동 후 세워진 이름하여 URAZIL 정부와 U시인데 이 부분에서 사실 새로운 세계를 설명하는 부분이 너무 불친절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정말 안 읽히고 인과관계를 파악하기도 힘들다.
그래도 주인공인 요철과 율리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활기를 띤다.
내가 권리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기 때문인 지는 모르겠지만, 읽는데 도대체 책 한 권이 이렇게나 혼란스러울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상상을 주제로 한 책 아니랄까봐 그냥 책 전체가 상상하는 중 같다.
상상 속에선 무슨 일이든 짜임새 없이 마구잡이로 일어나는데 딱 그렇다.
예술로 치자면 피카소이고, 르네같은 초현실주의.

스토리를 요약하려고 해도 뭐가 진실이고 뭐가 상상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요철이라는 인물이 상상범이 된 것은 맞는 듯한데 기울어진 글씨들의 법정 장면이나 율리와의 상상 부분은 당최 뭐가 뭔지.
그냥 읽어봐야 알 수 있는 소설인 것 같다.
다만 상상을 했기 때문에 범죄자가 되어버린 요철의 입장이 인상적이다.
상상을 하지 말라고 강요받아도 끝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는 요철은 책 속에서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인물이다.
하지만 실상은 아무런 이유 없이 찍혀 조종당하는 처지.
결국 상상하는 그에겐 애초에 상상할 자유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이와 달리 얽매인 것이 없지만 가장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다.

읽는 내내 이 URAZIL 정부와 로텍이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으며, 그것을 비판하고자 쓰여진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서 검색해보니 `미네르바 사건`을 모티브로 쓰여진 소설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쉽게 `상상하는 게 범죄가 되는 세상이라고? 재밌겠다` 이런 생각으로 읽으면 낭패볼 책인 것이다.
그래, 할 말은 많다만 SNS도 감청하려는 세상이니 말을 아끼도록 하자.
그래도 꽤 잘 쓰여진 소설이다.

읽는 내내 진도가 안 나가서 지쳐갈 때쯤 책은 참으로 기상천외한 결말을 맞았고, 시종일관 불친절함에 의해 생긴 내 서운함은 작가의 말을 통해 사라졌다.
`허구가 현실을 압도할 수 없는 시대, 그래서 불가피하게 정신의 골절을 입을 수 밖에 없는 시대. 저는 지금의 시대를 그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사고 치는 사람 따로, 수습하는 사람 따로. 그리고 가해자와 피고인이 일치하지 않는 딜레마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짓는 사람이 또 따로. 어쩌면 디스토피아가 삼백 년 뒤가 아닌 바로 삼백 페이지 뒤에 있는 건 아닐는지? 그래서 이 소설도 블랙코미디가 되었습니다. 언뜻 현실 비판적 주제와 환상적 장치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현실의 광포함을 이겨내는 것, 현실 위를 날아오르는 것, 그것이 바로 제가 지극히 리얼리즘적인 소재를 다룰 때조차 소설에서 환상적 장치를 배제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이 말들이 콱 박혀서.
그러면서 끝에 부모님께, 다음에는 정말로 쉽게 쓰겠다지 않는가.
부모님께 약속하셨으니 다음 작품을 기다려볼 용의가 생겼다.
(밑줄 긋기로 172-174p를 통째로 옮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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