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고등학생 탐정 이야기는 도저히 안 보고는 못 견딜 만큼 매력적인 조합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코난이 그러하고, 김전일과 빙과의 호타로 등등 수많은 시리즈를 지나면서도 더디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들은 몇 년이 지나건 늘 고등학생으로만 머물러 있다.

박하익 작가를 처음 봤던 건 디지털 작가상 역대 수상작 목록이었다.
박하익 작가의 이름과 <종료되었습니다>라는 책의 제목이 콕 뇌리에 박혀 있었고, 한참 추리소설에 빠져있던 때 책을 고른답시고 이리저리 인터넷을 뒤지다 발견한 박하익의 `선암여고 탐정단`이란 글씨를 보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을 읽고 말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네 도서관에 책이 없는 걸 확인하고 기다리던 중 드라마가 제작된다는 걸 알게되었고, 마침내 이번주 도서관에 누구도 손대지 않은 빳빳한 신간으로 입고되어있는 시리즈 두 편을 발견하고선 주저없이 뽑아 들고왔다.

사설이 길었다.
그러니까 그 구김없는 표지만큼 설렘이 큰 책이었다.
마치 기다려왔던 택배를 받을 때의 기분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책을 펼쳐든 순간 보이는 목차가 신선했다.
거기엔 무려 선암여자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중간고사 미스터리영역의 문제지가 실려있다.

문제1. 신종 변태가 이동한 자취의 방정식을 구하고 그에 접하는 돌멩이를 날려라.
문제2. 비밀 파일과 골분 항아리의 연립방정식을 풀고 사라진 핑크 토끼의 좌표를 구하여라.
문제3. 제시된 명제들의 참과 거짓을 구별하여 투명 미로를 미분하라.
문제4. 두 가지 독립 사건에 희생당한 검은 콩 두유의 원한을 풀고 총격의 진범을 잡아라.
문제5. 무한급수의 레플리카가 수렴하는 합을 구하고 살인자를 판별하라.

여기서부터 직감했다.
나는 이 책을 사랑하게 될 거란 걸.

주인공은 당연히 선암여고 탐정단.
고등학교 1학년에 박사 과정을 마친 천재 쌍둥이 오빠에게 열등감을 가진 채율에게 `무는 남자 사건`을 계기로 미도, 성윤, 예희, 하재로 구성된 선암여고 탐정단이 접근한다.
우여곡절 전혀 관심없던 채율은 탐정단에 들어가고 그 중심에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는 이야기.

여고생은 늘 작품 속에서 비현실적으로 여성스럽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추리소설의 여고생은 대개가 피해자로 등장하기에, 그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탐정 이야기는 매우 새롭다.
게다가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학교에 붙들려 자율 아닌 자율 학습을 하는 우리나라 고교생이라면 말 다했다.
평범한 고딩에게 추리소설의 소재가 나올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소설은 그 고등학생이라는 점을 아주 철저히 활용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수사를 한다.
추리소설하면 떠올릴 만한 굵직한 사건들은 이들의 몫이 아니었다.(물론 그들은 원했겠지만.)
학교에 갇힌 소녀들의 호기심은 기껏해야 동네 변태를 잡고 선배의 토끼인형을 찾아주며 왕따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인 것이다.
그 별 것 아닌 어찌보면 평범한 소재에 작가는 사연을 더한다.
그 사연 또한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이며 그 부분에서 굉장히 여고생의 시선을 잘 담아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탐정단이 하라온과 엮이기 시작하기 전 책의 중반부까지는 추리 요소를 섞은 청춘소설에 가까웠다.
하지만 학교를 벗어나고 느닷없는 총기사건을 겪게 되며 탐정단은 조금씩 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그 폭을 조금씩 넓혀나간다.

사실 악마의 대본 부분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애매하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그의 죄가 애매하듯 결론 또한 애매하다.
분명한데 확실하지 않은 결말을 내고 탐정단은 새 책에서 2학년 1학기를 맞는다.
2학년 1학기 중간고사 추리논술영역의 문제지는 이러하다.

문제1. 다음 <보기>를 읽고 `선암학사의 여학생 귀신`의 세가지 유형을 참고하여 각각 알맞은 해결책을 제시하시오.
문제2. 그룹 `슈가 걸즈`의 래인의 비밀을 파악하고, 하라온의 숨겨진 의도와의 연관성을 서술하시오.
문제3. 사라진 책가방이 다시 나타난 원인을 분석한 뒤, 채율이 라온과 체결한 조약의 정당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시오.

문제만 봐도 알 수 있듯 <탐정은 연애금지>에서는 본격적으로 스케일이 커진다.
이쯤되면 `평범하지 않은` 게 아니라 `특별`한 거다.
스포는 생략하고 결론적으로 행동 반경이 넓어진 만큼 활약할 사건 또한 많아졌다.
그리고 제목만큼 로맨스 역시 깊어졌다.
사실 어리석게도 끝까지 난 책가방의 주인이 수능을 지나면 골든퀘스트를 깨고 돌아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말은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으며 일종의 충격을 남겼지만 추리소설을 청춘소설처럼 여긴 대가인 셈이니 뭐.

일본 작품은 수없이 읽었어도 우리나라의 `추리소설`하면 당장 떠오르는 게 없다.
특히나 캐릭터를 전면에 세운 소설은 더더욱 보기 힘들다.
그렇기에 이 소설이 택한 방식은 탁월하다.
개성넘치는 캐릭터들은 이야기가 클리셰 덩어리에 깔려 지루해지도록 절대 놔두질 않고, 짧지만 굵게 설명하는 트릭은 그 캐릭터들이 수사한 과정에 의해 특별해진다.
때로 독자에게 트릭을 숨기는 에피소드도 재밌지만 그들이 가는 길을 생생히 보여주어 독자를 독자가 아닌 탐정단의 일원이 되도록 만든다.
선암여고 탐정단의 아이들은 추리소설을 심각하게 만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들이 여고생 탐정단이라는 위치를 너무나도 잘 활용해 선생과 경찰의 수사망이 닿지 않는 범위를 건드리는, 누구도 따르지 않고 오로지 그들만의 수사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보면 될 거 같다.

조금 아쉬운 건 주인공인 탐정단과 엮이는 굵직한 인물들이 대부분이 조력자인 것.
탐정단을 적대시하거나 무시하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많지만 이들이 앞을 전진해나가는데 나서서 막을 라이벌은 없다.
셜록 홈즈에겐 모리아티 교수가, 김전일에겐 지옥의 광대, 그리고 코난(신이치)에겐 검은 조직(괴도키드는 포지션이 애매하고 애초에 쫓는 목표도 다르므로 제외.) 등.
무릇 탐정에겐 꼭 숙적이 필요한 법이다.
이제 2권, 겨우 2학기 째, 다음 이야기가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두 권을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내릴 만큼 재밌었다.
아무래도 사건이란 건 피해자와 가해자가 존재하기에 본질은 결코 유쾌한 상황이 아닌데도 즐거웠다.
그만큼 참 안타깝기도 하더라.
이게 소설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으니 현실은 어떨지.
나올 이야기가 남았다는 점에서 아직 2학년인 건 좋은데 이 아이들도 3학년이 될 생각을 하니 슬프다.
정말 고등학생들한테 이 정도의 낙이라도 주어지면 좋겠다.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취미 생활 하나는 할 수 있게.
그냥 좀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드라마도 꼭 봐야겠다.
책도 다음편이 얼른 나오면 좋겠다.
사야지.
또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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