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려라 메로스 - 모리미 도미히코의 ㅣ 미도리의 책장 7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시작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5.0
작가 설명엔 분명 `신역` 달려라 메로스 라고 적혔는데 정작 책에는 어딜 찾아봐도 앞에 그 말이 붙질 않는다.
신역이 무슨 뜻인지는 아는데 `달려라 메로스`를 몰라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때까지도 작품을 이해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뛰어 넘겼던 작은 글씨를 정독하고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선 황순원이나 김유정, 현진건 등등 이름만 들어도 알 작가들의 단편을 본인의 입맛대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정말 어떻게 이런 발상을.(절레절레)
참 알면 알수록 신기한 작가다.
이런 아무도 상상 못할 일을 자처하면서 자신의 이야기에 원작을 교묘하게 버무려낸다.
사실 원작을 몰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어떤 부분을 땄는지, 뭘 말하려고 했는지는 알 만 하다.
여기저기 널부러진 색색의 천쪼가리 같은 각자의 이야기를 퀼트처럼 요리조리 엮어내는 게 보통 솜씨가 아니다.
꼭 그가 사는 교토에 이 모든 인물이 정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
혹시 몰라, 그만의 교토에서 살고 있는 인물들의 실화를 자신의 문체를 빌려 세상에 내놓는 지도.
이쯤하면 눈치챘겠지만 역시다.
교토에서 또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작들에서 늘 만났던 그 사람들을 포함한 인물들과, 그 대학교를 포함한 교토가 다시 눈앞에 나타나는 거다.
이번엔 명작이라 불리는 고전들의 옷을 걸치고.
이 작품 전체가 그러하지만 `벚나무 숲 만발한 벚꽃 아래`는 특히 이제까지의 그의 방식과 문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굳이 유사함을 찾자면 앞에서 등장하는 사이토와 다다미 넉장 반 정도.
사실 작가가 원래 쓰던 이야기는 이런 류의 정적인 이야기들이었다고 하는데 확실히 그를 알려 준 작품들을 읽고 보면 이쪽은 싱겁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이런 글도 쓸 줄 아는 작가라는 게 좋다.
교토와 대학 생활(아마도 교토대)을 다룬 모든 그의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이 비슷하다는 것에서도 느낄 수 있듯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모든 인물은 흡사 작가 자신처럼 읽힌다.
특히 이 책은 어쩌면 본인이 하고 싶었을 글들로 쓰인, 작가 자신을 가장 많이 투영시킨 이야기라는 게 느껴진다.
마지막 `햐쿠모노가타리`의 나는 무려 `모리미`이니 말이다.
혹시 그만의 문체와 그의 작품이 주는 엉뚱한 재기발랄함을 기대한(초반의 나 포함) 독자들에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달려라 메로스`에서 그 매력을 잃지 않았음을 마치 팬서비스처럼 보여줘 웃음을 자아내고, 나머지 두 장에서 감정의 여운을 남긴다.
솔직히 글을 읽는 입장에선 그의 특유의 고루한 문체는 술술 읽힌다는 장점과 함께 사족이 엄청 많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불가피하게 문단의 시작에서 끝으로 단숨에 뛰어넘도록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과감히 버린 그 문체 덕에 조금 심심해졌지만 이 마니아 층 바깥의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겼다.
(원작을 아는 사람 또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대담한 방법을 택한 게 실로 작가답다.)
다른 이야기들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하여튼 새로운 작품이다.
이 책을 진지하게 논하려면 물론 이 다섯 가지 이야기의 원작을 읽어야 할 것이다.
원작을 읽고 나면 오히려 별로라는 말을 담게 될 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읽고 원작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을 주는 것만으로도 꽤 성공적인 리메이크였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쓰다가 깨달았는데 이 작품 곱씹을수록 놀랍다.
1. 일단 작가는 특유의 문체가 아닌 자신의 새로운 글을 선보이면서 차츰 독자들이 익숙해질 수 있는 물꼬를 틔웠다.
2. 그로 인해 벽처럼 느껴지던 그만의 문체는 희석되어 팬이 아니던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3. 또한 그 문체를 선보이기 위해 택한 방식이 무려 고전의 리메이크. 교과서에 실리는, 명작이라 일컬어 지는 작품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호기심을 갖기 마련. 자신을 모르던 사람들도 자신의 글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4. 거기다 `달려라 메로스`에서 작가 특유의 즐거움을 선사하며 자신의 팬들 또한 만족시켰다.
이 모든 걸 과연 작가가 계산해서 글을 썼는지는 알 길이 없다.
원작을 읽지 않았기에 과연 3번의 사람들이 다음 작품을 읽을 수 있도록 만족감을 줬는지도 알 수 없다.
작가에 빠져도 너무 빠진 내가 망상의 결과로 혼자 너무 앞서 나간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짜 이 모든 게 계산된 것이라면?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사랑스러운 작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