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공주 세라 - 어린 시절 읽던 소공녀의 현대적 이름 걸 클래식 컬렉션 1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지음, 오현아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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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마냥 좋아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수많은 책들 사이에 마법처럼 눈에 띄는 표지에 이끌려 <작은 공주 세라>를 읽게 되었다.

 

  요즘 나오는 소설에 비하면 대단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부자였던 소녀가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하게 지내다가 다시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 구조는 이제 이미 정형화된 틀인지라 전개 방향이나 결말은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이야기가 아주 낭만적이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모두에게 공주처럼 대접받다가 하루아침에 하녀 신세가 되었는데도, 자신의 고결한 영혼만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는 듯 행동하는 세라의 모습은 당차고 용감하다. 이뿐이랴, 세라는 상상력을 무기로 열악한 주변 환경을 마법처럼 긍정적으로 뒤바꿔버린다. 몰락하기 이전이나 이후에나 공주인 체하며 긍지와 자존감을 포기하지 않는 세라는 하녀 취급을 받을 때조차 진짜 공주처럼 고귀하게 빛이 난다. 자신보다 더 굶주린 아이를 위해 빵 여섯 개 중 다섯 개를 양보하는 모습은 아무나 발휘할 수 없는 극도의 절제와 나눔의 미덕을 보여준다.

  이러한 세라의 여정은 눈물겹고, 폭력과 착취가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최대한의 긍정성을 끌어내고 희망을 놓지 않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정여울 작가의 추천사에 적힌 대로, 차별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상상력과 이야기로 부정적인 상황을 몰아내는 세라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귀감이 되는 인물로 추켜세워지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난 뒤에 반드시 보상이 있으리라는 걸 아는 독자의 입장에서 (특히 늘 고난과 보상이 함께 짝을 맞춰 오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입장에서는) 이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특별히 아주 가슴 뛰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라의 강인함과는 별개로 책을 덮고 난 후 밀려오는 씁쓸함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세라의 입장에 서서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잠시 잊고 있던, 모른 척하던 부분들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공주는 어디서 오는가? <작은 공주 세라>에 드리운 제국주의의 그림자

 

  물론 세라는 부자인데다가 착하고 품위 있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족함이 없는 아이이다. 하지만 세라가 인도에서 온 영국인이고 이후 인도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전보다 더한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세라를 둘러싼 안온함과 풍요로움, 그 막대한 부가 식민지 착취를 통해 쌓아올려졌을 것을 생각해본다면, 식민 지배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등골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비록 세라가 처음부터 균형 잡힌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으되, 태생부터 최상위층에 속해 있었고 이러한 환경에 어릴 적부터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아직 19세기의 아이이기 때문에)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라는 모두에게 친절함을 베풀고,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는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세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시 사히브’(사히브는 식민지 시절 인도에서 유럽 남성을 높여 부르던 말이고 미시가 붙어 '미혼의/여자아이'의 뜻을 더한다.)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타인의 시중을 받는 것이 익숙한 아이에 머무른다


  (람 다스가 자신을 미시 사히브라고 부르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세라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세라는 자신을 라자의 딸처럼 대하는 람 다스를 보며 하인 하녀 등에게 홀대받는 지금과 달리 하인과 노예들이 자신에게 깍듯이 대하던 과거를 향수 어리게 회상한다. 또한, 세라는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포착하지만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텍스트 내에서 람 다스는 신비스러운 동양인이자 충성스러운 하인으로 묘사되는데, 사실 유럽 아이들을 왕의 자식처럼 받드는 식민지 출신 인도인의 이미지를 현실로 가져오면 얼마나 분하고 비굴한 모습이 되는가…….) 결국 세라는 제국주의와 계급 질서를 내면화한 전형적인 지배자의 시각에 입각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가난의 경험은 세라를 겨우 조금 나은 상류층 지도자로 만들어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공주 세라>의 결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다소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낭만성을 한 꺼풀 벗겨내고 보면 제국주의의 질서와 계급 질서가 그대로 유지 및 계승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교훈적인 이야기의 결말은 현대인의 입장에 서서 냉소적으로 생각할 때 이렇게 읽힌다.

 

  인도 식민지 착취를 통해 쌓아올린 막대한 부를 얻어 옆방에서 함께 고난을 견디던 친구베키를 하녀로 구출해가고, 마지막에는 굶주린 백성(아이)’들을 위해 자애롭게 빵을 나눠주는 영국 공주(세라)’. (본문에서도 언급되었던 이 백성과 공주를 다시 식민지와 대영제국으로 치환해보면 또 어떤가.)

 

  계층 간 이동에 대한 욕망도 가능성도 보여주지 않은 채, 하층민은 하층민으로서 자신의 본분에 만족하고, 공주는 공주로 남는다. (특히 자발적으로 세라를 시중들겠다는 베키의 모습, 세라가 그간 서로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아이라고 강조하던 친구를 기쁘게 하녀로 데려가는 모습, 이후 세라의 시중을 들며 행복해하는 베키의 모습은 기득권층이 바라 마지않는 바람직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더더욱 베키를 자신과 같은 학생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세라의 언급 한 마디만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동화에 드리워진 이면의 그림자를 목격하는 건 늘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세라의 상상력과 품위만을 치켜세우기엔 세월은 이미 너무 많이 흘렀고, 많은 가치가 변했다. 순수하게 세라의 낙관적인 능력에 감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씁쓸하기도 하지만, 어렸을 적 축약본으로 읽었던 책을 완역본으로 읽는 묘미는 원래 이런 부분에 있는 것 아닐까. (그때 그 시절의 감동이 퇴색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사족으로, 꼭 제국주의가 아니더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이야깃거리는 이외에도 무궁무진하다세라를 정말 주체적인 주인공으로 볼 수 있을까? 만약 아니라면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작은 공주 세라>에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본받을 만한 어머니 상(Mother Figure)이 부재한다. 실질적인 어머니의 부재(ex. 세라와 로티의 어머니)와 상징적인 어머니의 부재(ex. 민친 교장과 어밀리아)가 아이들, 특히 세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이 질문에서는 아버지의 부재가 여자아이의 몰락과 직결되고, 아버지 상(Father Figure)의 귀환(캐리스포드)이 상승으로 이어지는 점. , 남성의 보호 아래에 놓인 여성이 안락함과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는 모습을 작가의 생애, 시대적 상황 등에 연결지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혹은 세라가 누리는 권력의 근원이 어디인지 다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민친 교장은 <작은 공주 세라>에서 악의 축에 가까울 정도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모든 것에서 긍정적인 것을 끌어내는 세라가 되어 민친 교장의 긍정적인 면모를 찾아본다면?’, ‘아동 문학은 어린이들이 읽을 만한 교육적인 바람을 담기 마련이다. 세라는 어떤 점에서 어른들이 바라는 모범적인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혹은, ‘감정을 자제하고 나눔의 미덕을 실천하는 세라의 모범적인 행실은 어떤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이 부분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아이다움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도 있겠다.)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작은 공주 세라>는 굉장한 가치를 지닌다. 아직 걸 클래식 시리즈 중 <작은 공주 세라>밖에 읽지 못했지만, 당장이라도 독서모임에 가입해 , 걸 클래식으로 여성 서사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하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다. 350여 페이지 가량 되는 책에 이렇게 많은 질문거리가 담겨 있으니 배는 두꺼운 <작은 아씨들>에는 얼마나 다채로운 이야깃거리가 숨어 있을지 기대된다. (진심으로, 독서모임과 독서토론 도서로 강력 추천한다.)

 

  글을 마치며, 세라의 정신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독자로서 나는 결말에서 더 나아가 상상하고 싶다. 버넷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 그 이후의 이야기를. 교육을 받고 독립적으로 성장한 베키와 더더욱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갖추고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선사하는 세라가 책 밖에서 살아가고 있으리라 상상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읽은 어린 독자들이 차별하지 않는 마음을 배워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고 있으리라고, 무한한 긍정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꿔나갈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작은 세라의 말처럼, 상상하고 믿는 체하면 진짜처럼 느껴지니까.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니까!

 

 “그렇게 상상하자는 거지.” 세라가 대꾸했다. “상상에 몰두하면 진짜로 볼 수 있거든.”(p.256)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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