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죽어서 참 다행이야
제넷 맥커디 지음, 박미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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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포장지가 벗겨진 자리에 남은 건 아동학대를 일삼은 이기적이고 형편없는 인간 데브라.
제넷이 학대 후유증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아가는 과정이 정말 아름다워요. 읽는 저도 덩달아 용기를 얻는 기분. 그치만 번역본은 데브라의 언어가 많이 순화된 것 같아서 쬐끔 아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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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죽어서 참 다행이야
제넷 맥커디 지음, 박미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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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서평은 객관성을 잃었습니다. 제넷 맥커디의 강인함에 빠져 허우적대기 바쁘네요. 명랑하고 유머러스한 서술을 통해 아동학대로 망가져버린 어린시절과 엄마의 죽음 이후 지난한 회복기를 풀어낸 회고록입니다. 수많은 아마존 베스트셀러 거품 작품들 중 찬란히 빛나는 진주네요. (올해 읽은 에세이 중 최고!)


  원서로 읽고 제넷 맥커디에 매료되어 번역본이 궁금해지던 찰나 운명처럼 위즈덤하우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책을 무료로 제공받은지라 글을 예쁘게 다듬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에 시달리다가... 제넷 맥커디의 용기를 빌려 솔직하게 써봅니다.

 


잠깐! 제넷 맥커디, 그게 누군데?

  일단 우리나라에는 제넷 맥커디를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 같은데, 청소년 시트콤 <아이칼리(iCarly)>에서 샘 퍼켓 역을 맡았다고 소개해도 역시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조금 더 친숙한 배우와 작품으로 비교해보자면, <아이칼리>는 마일리 사이러스 주연 <한나 몬타나(Hannah Montana)>, 셀레나 고메즈 주연 <우리가족 마법사(Wizards of Waverly Place)>와 비슷한 위상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우리나라 청소년 드라마로 치면 <드림하이> 시리즈 정도라고 할까. , 제넷은 2000년대~2010년대에 청소년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던 아역 배우다.


  그러니 이 책은 우리나라로 치면 국민 아역 배우였던 김유정/김소현 등이 성인이 되어 자신이 가정에서 겪은 아동학대와 촬영 현장에서 벌어진 아동착취를 고백하는 책을 낸 것과 다름없는 거다. 그것도 <엄마가 죽어서 참 다행이야>라는 제목을 달고.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용감하고도 아픈, 어떤 사랑에 대한 기록'?

  만일 이 기록이 사랑의 기록이라면 그건 짝사랑의 기록이다. 그것도 아동학대를 일삼은 엄마를 향한 아이의 짝사랑 기록이며, 짝사랑이 그렇듯 이 사랑은 과정도 결말도 모두 비참하다. 하지만 제넷의 인생을 단순히 사랑에 대한 기록이라고 칭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동학대를 비롯해 고난이란 고난은 숨돌릴 틈도 없이 제넷의 인생을 강타하지만 제넷은 무너지지 않는다. 잠시 흔들릴지언정 중심을 잡고 번번이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넷이 보여주는 용기, 그리고 더 나은 삶을 향한 의지는 여느 성장 소설의 주인공 못지않게 찬란하다. 그러니 역시 제넷의 잔인할 정도로 솔직한 고백에는 용감한 성장기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이 책에는 유년기부터 거의 현재 시점까지 제넷의 인생이 담겨 있다. 엄마 데브라가 죽기 전까지 제넷이 얼마나 데브라에게 종속되어 있었는지, 데브라는 또 얼마나 제넷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통제해왔는지 쉴새없이 제시된다. 엄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엄마를 만족시키기 위해, 엄마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그리고 엄마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기 위해 제넷은 어려서부터 매순간 엄마의 기분을 살피고, 엄마가 뭐든 시키는 대로 따르며, 나다움을 억누른 채 엄마와 의견을 일치시킨다. 심지어 좋아하는 색깔도,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 맛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엄마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답한다면 심리적 억압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지겠는가. 제넷은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 대가로 엄마에게 행복을 바친다.


  하지만 엄마 데브라는 다르다. 데브라는 제넷의 기분은커녕 정신적 신체적 건강도, 꿈도, 취향도 그 무엇도 살피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조금만 다른 대답을 하면 눈물을 흘리며 죄책감을 심어주거나,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외면으로 일관한다. 데브라의 꿈은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넷을 배우로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제넷의 의사나 타고난 성향과는 전혀 상관 없이. 어린 제넷이 연기에 대한 스트레스로 틱장애를 보일 때도 이를 외면하며, 열이 39도가 넘어가도 오디션을 보게 한다. 뿐만 아니라 아이 같은 체구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칼로리 제한, 즉 거식을 유도한다. 말라가는 제넷의 모습을 본 또래 학부모도, 병원의 의사도 거식증이 의심된다며 주의를 주지만 데브라는 아무 문제 없다며 묵인한다. 그리고 어린 제넷이 연기를 더는 못하겠다고 고백하자, 운전 도중 운전대를 내리치며 히스테리를 부리기까지 한다.


  이렇듯 데브라는 제넷의 심리와 신체를 비롯해 모든 것을 통제했다. , 취향, 인간관계, 그리고 식습관까지 전부 자기 취향대로. 제넷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숨이 턱 막힌다. 아이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학대를 사랑으로 여기며 데브라의 기준에 부응하려는 제넷의 모습은 순수하고, 또 순수한 만큼 안타깝다. 제넷은 엄마 데브라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데브라는 제넷보다 자기 자신을 훨씬 더 사랑하기 때문에. 제넷은 자신을 희생해 엄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려 아등바등하지만, 데브라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기분과 행복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또한 배우가 되어 엄마의 꿈을 이루어주었음에도 체중을 날씬하게 유지하는 것부터 시작해 자신이 죽으면 매일매일 묘비를 찾아와야 한다는 부탁까지 데브라의 요구는 끝이 나지 않는다. 데브라는 제넷에게 끊임없이 요구하고 기대하고 또 바란다. 제넷에게 헌신적이지만, 그 헌신은 오직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자기 헌신일 뿐이다.

 


  제넷의 삶은 엄마가 죽고 나서 완전한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그간 제넷의 정체성은 엄마 데브라를 근간으로 했기에 엄마가 없는 세상 속에서 제넷의 정체성은 그야말로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린다. 관성처럼 연기를 이어가지만 정신적으로는 점점 죽어가며, 엄마가 바라온 모습대로 살아야 한다는 마음과 그간 억압받은 자아 사이의 충돌은 거식과 폭식이라는 형태로 제넷을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넷이 정말로 빛이 나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아동학대의 여파로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지만, 제넷은 다시 인생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움직인다. 엄마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인생은 무엇인가 질문하며 자기계발서를 찾는 것부터 전문 치료사를 찾아가는 것까지 서툴지만 확실하게 변화를 향해 나아간다. 물론 치료를 거부하거나 거식과 폭식으로 되돌아가는 등 회복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하지만 제넷은 괴로운 인간관계를 끊어내고, 연기를 그만두고, 섭식장애를 극복하며 점차 건강하고 행복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제넷은 엄마가 ‘Yes’라고 답하게 했던 모든 것들에 ‘No’라고 답하기 시작하면서 행복으로 나아간 셈이다. 그것도 엄마가 죽고 나서야 겨우겨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제목이 정말 엄마가 죽어서 참 잘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도발적인 제목의 진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아동학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서 참 다행이야

그리고

  ‘이제 내 삶을 살 수 있어서 참 다행이야

 

  그러니 제넷은 엄마가 죽은 걸 기뻐하는 게 아니다. 엄마가 자신에게 드리운 통제의 그늘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되찾은 것을 아동학대의 생존자로서 위트있게 표현한 것이다. 비로소 인생이 자신만의 궤도에 올라 다행이라고. 더 이상 배우로 살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음식을 먹으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엄마의 삶을 대신 살지 않아도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제넷은 여전히 엄마를 사랑한다. 하지만 더는 엄마의 행동이 사랑이었다 믿지는 않는다. 더 이상은 엄마가 나를 위해 그 모든 일을 해왔다고 애써 합리화하지 않는다. 데브라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타적인 엄마였다고 미화하지 않는다. 그런 건 바보들이나 믿는 것(What a Fool Believes)이니까.


  마지막 장에 와서야 제넷의 짝사랑은 끝이 난다. 그리고 그제야 엄마라는 포장지가 벗겨지고 데브라라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하는 엄마에서 딸의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해야만 했던, 딸에게 평생 자신을 사랑할 것을 종용해온, 이기심 가득했던 데브라. 평생을 사랑하고 우러러봤던 엄마가 실은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고 불안정하고 형편없는 사람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선명해진다. 제넷을 구속하던 엄마라는 환상은 깨지고 냉담한 현실만이 남지만, 제넷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자신의 묘비를 매일 찾아달라던 데브라의 요구에 여기에 다시 올 일 없을 것이다라고 답하며 엄마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자아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제넷의 삶이 데브라로 인해 실시간으로 피폐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교묘한 아동학대로 괴로워하고 있을 아이들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한편으로는 각종 고난이 닥칠 때마다 심리적으로 무너지고 또 무너지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제넷의 모습이 너무나 찬란했다. 데브라는 제넷을 자신의 분신으로 키우고자 했지만, 제넷은 결국 배우에서 작가로 자라났다. 체중에 집착하며 먹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에서 음식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했다.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모습을 꾸며내던 사람에서, 이토록 솔직하게 자신이 겪은 일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이 쓰라린 성장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독자로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비슷한 경험을 한 분들에게도 제넷의 글이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리라.

 


  마지막으로, 제넷이 솔직하게 내보여준 인생만큼 데브라의 학대가 끔찍하게 다가왔기에 책 뒤편의 추천사에 실린 몇몇 표현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바로 데브라를 그저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던 한 인간’(김혜진 소설가), ‘딸을 너무 사랑해서 자신의 꿈을 투영’(오지은 작가)한 엄마라고 표현한 부분이다. 제넷의 입장에서 보면 데브라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다. 식칼을 들고 아이들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고, 아이의 이상행동을 방치하고, 섭식장애를 부추기고, 아이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전혀 돌보지 않으며, 성인이 된 딸을 통제하려 하고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 욕설을 퍼붓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사람에게 나약한 존재라는 표현은 미화에 가깝다.


  데브라만 따로 떼어놓고 봐도 나약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물론 데브라는 암이 재발하면서 신체적으로 쇠약해지기는 하지만, 한창 제넷을 양육할 때는 암을 한번 이겨낸 사람이었고 이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으며, 고된 스케줄을 소화해내며 딸을 할리우드 스타로 만들어냈다. 데브라의 삶만 놓고 보면 오히려 강인하다는 표현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보인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어쩌면 데브라가 심리적으로 나약한 존재였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데브라는 상당히 불안정한 심리 상태의 소유자였으니까. 하지만 데브라와의 애증의 관계, 데브라의 학대로 인해 삶이 한번 완전히 망가져버렸던 사람의 인생 고백을 듣고 데브라의 입장에 서서 데브라를 나약한 존재로 표현하는 것 역시 부적절해 보인다. 무엇보다 묘비 앞에서 제넷이 똑바로 바라본 건 데브라의 나약함이 아니라 어린 자신을 향한 학대였으니까.


  ‘딸을 너무 사랑해서 자신의 꿈을 투영한다는 말도 이해되지 않는다. 딸의 관심사나 꿈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선택지조차 주지 않고 내 꿈을 이뤄달라는 엄마가 정녕 딸을 너무 사랑하는 게 맞는 걸까. 딸을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분신이자 소유물로 대하는 게 정말 사랑이 맞을까. 딸의 건강과 행복과 정체성을 희생해 결국 자신의 꿈을 이룬 엄마가 딸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 표현되는 건 거부하고 싶다. 데브라의 사랑을 제넷의 사랑에 견주어 보면 데브라의 것이 얼마나 허울뿐인 사랑인지, 얼마나 얄팍한 이기심에 불과한지 선명하게 보이기에 더더욱.


  전반적으로 추천사가 제넷의 성장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엄마와의 관계 속에 놓인 제넷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아쉽게 느껴졌다. 어쩌면 추천사는 <엄마가 죽어서 참 다행이야>라는 제목이 주는 패륜의 이미지를 완화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표현으로 가득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저 내가 추천사에 담긴 심오하고도 깊은, 어떤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걸지도. 어쩌면 우리말로 번역된 데브라의 목소리가 다소 순화되어 이런 평이 나온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추천사와는 별개로 제넷의 솔직함이 빛을 발하는 에세이였다. 아무래도 상업적인 재미를 위해 연출된 부분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이 회고록에서 보여주는 솔직함에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누군들 엄마는 늘 나를 사랑했다고, 사랑해서 그랬던 거라고 미화하고 싶지 않으랴. 하지만 그럴수록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그것이 학대임을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최대한 빠르게 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제넷이 오랜 방황 끝에 엄마를 향한 미화를 멈추고 데브라의 명과 암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던 것처럼, 제넷의 인생을 통해 많은 분들이 자신만의 복잡하고 어려운 관계를 풀어갈 힌트를 얻게 되길 바란다.

 


  기나긴 짝사랑을 끝내고 스스로를 사랑하기 시작한 제넷을, 또 이제는 성인이 된 수많은 아동학대 생존자들을 응원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모두 파이팅.

나는 엄마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놀라 바와 데친 채소로 연명하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을 <우먼스 월드>의 다이어트 페이지에 얽매어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는 나아지지 않았지만, 나는 반드시 나아질 것이다. -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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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와 드레스메이커 비룡소 그래픽노블
젠 왕 지음, 김지은 옮김 / 비룡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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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자와 드레스메이커>는 파격적인 소재로 풀어낸 성장담이다.이런 소재를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드레스를 입는 왕자 이야기라니! 하지만 <왕자와 드레스메이커>는 마냥 낯설지만은 않다. 소재는 파격적이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 속에 두려움과 부담감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이 다뤄지기 때문이다. 비록 아직까지는 낯설고 혼란스럽게 다가올 수 있는 소재가 담긴 이야기일지라도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 내가 좋아하는 일을 추구할 수 없을 때 느껴지는 답답함과 같은 일상적인 감정들과 연결지어 본다면 청소년기 아이들이 충분히 공감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로 읽힐 것이다.


  <왕자와 드레스메이커>는 생각해볼 거리를 정말 많이 던져주는 작품이다. 기본적으로는 각자의 목적을 위해 적극적으로 서로를 돕는 소년 소녀의 이야기이지만 크로스드레싱이라는 소재 덕분에 우리가 지닌 통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이들에게 이 책을 선물할 예정이라면, 부모와 함께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성 고정관념, 의복과 성 정체성등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도 있고,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지점에 질문을 던지게 한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부분에 주목하고 그 의미를 고민하도록 이끌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왕자와 드레스메이커>는 막 백화점이 들어서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데, 왕은 '백화점이 열리는 시대에 왕과 왕자는 더 이상 어디에도 어울리는 자리가 없다'고 말하며 왕자의 모습을 지지하고 긍정한다. 왕자에게 장군이 되길 기대하거나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을 독촉하는 시대가 지나가는 것처럼 시대가 변하는 만큼 사람들의 인식도 함께 변해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현 사회가 점점 성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듯이 이 이야기를 현재 우리의 삶과 연결지어 본다면 아이들이 자기만의 관점에서 벗어나 성숙할 수 있게끔 지도할 수 있을 것이다.)


드레스 입는 왕자가 이상하다면 더 생각해보기, ‘남장’과 ‘여장’

  <왕자와 드레스메이커>에는 크로스드레싱이 등장한다.왕자인 세바스찬이 드레스를 입으며 레이디 크리스탈리아로 변신하는 것이다. 남자가 드레스를 입다니,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이상하다는, 그런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장’이 아닌 ‘남장’을 떠올려 보면 글쎄, 크게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우리는 여성이 남성의복을 입고 활약하는 이야기와 친숙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터에 나선 <뮬란>이 있을 테고, 국내 고전으로는 <이춘풍전>이나 <홍계월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서는 여성이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에게 제한되었던 일들을 하고자 ‘남장’을 선택했다. 즉, ‘남장’은 불합리한 사회의 극복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반해 ‘여장’하는 남자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찾아보기 어려울뿐더러 일상적으로는 코미디 요소로 쓰여 왔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간간이 등장하는 ‘여장’이나, 간혹 학교 행사에서 남학생들이 ‘여장’을 하는 것 등 대부분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근래에 드라마 <녹두전>에 ‘여장’ 소재가 쓰이긴 했지만 이 역시 상황에 따른 주인공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니 진지하게 여자 옷이 입고 싶어서 입는 남자의 이야기를 보는 건, 어색하게 느껴지거나 거부감이 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왕자와 드레스메이커>라는 작품이 빛이 나는 건,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여장’이든 ‘남장’이든 여성이 남성의복을 입거나 남성이 여성의복을 입는 이야기들은 주로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 혹은 불가피한 상황에 의한 것이었지 의복 자체가 좋아서, 그것이 나를 나답게 해서 입는 경우는 쉽게 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바스찬은 드레스를 입는 것이 그를 자기답게 만들어준다고 인식한다. 어떤 날은 남자 옷을 입은 왕자이지만, 어떤 날은 여자 옷을 입은 공주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다.


  세바스찬의 이야기에 조금 더 눈이 가긴 하지만, 그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디자이너의 꿈을 지닌 채 세바스찬을 돕는 프랜시스의 이야기는 묵묵히 자신의 목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조용하면서도 큰 존재감을 드러낸다.특히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리기 위해 자신이 만들고 싶지도 않은 옷을 만드는 장면에 담긴 프랜시스의 표정에서 ‘어느 순간 잃어버리게 되는 나다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며, 이후 프랜시스가 보여주는 성장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주제를 드러내게 된다.


  두 사람의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여정. 나는 나다울 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걸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이야기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왜 여자 옷을 입는 거예요?"(재봉사 프랜시스)

"나도 몰라. 가끔 거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이게 나지. 세바스찬 왕자! 나는 남자 옷을 입고 아버지처럼 보여야 해. 하지만 어떤 날은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아. 그런 날은 내가 정말로… 공주인 것 같아."(왕자 세바스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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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공주 세라 - 어린 시절 읽던 소공녀의 현대적 이름 걸 클래식 컬렉션 1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지음, 오현아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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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마냥 좋아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수많은 책들 사이에 마법처럼 눈에 띄는 표지에 이끌려 <작은 공주 세라>를 읽게 되었다.

 

  요즘 나오는 소설에 비하면 대단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부자였던 소녀가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하게 지내다가 다시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 구조는 이제 이미 정형화된 틀인지라 전개 방향이나 결말은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이야기가 아주 낭만적이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모두에게 공주처럼 대접받다가 하루아침에 하녀 신세가 되었는데도, 자신의 고결한 영혼만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는 듯 행동하는 세라의 모습은 당차고 용감하다. 이뿐이랴, 세라는 상상력을 무기로 열악한 주변 환경을 마법처럼 긍정적으로 뒤바꿔버린다. 몰락하기 이전이나 이후에나 공주인 체하며 긍지와 자존감을 포기하지 않는 세라는 하녀 취급을 받을 때조차 진짜 공주처럼 고귀하게 빛이 난다. 자신보다 더 굶주린 아이를 위해 빵 여섯 개 중 다섯 개를 양보하는 모습은 아무나 발휘할 수 없는 극도의 절제와 나눔의 미덕을 보여준다.

  이러한 세라의 여정은 눈물겹고, 폭력과 착취가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최대한의 긍정성을 끌어내고 희망을 놓지 않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정여울 작가의 추천사에 적힌 대로, 차별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상상력과 이야기로 부정적인 상황을 몰아내는 세라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귀감이 되는 인물로 추켜세워지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난 뒤에 반드시 보상이 있으리라는 걸 아는 독자의 입장에서 (특히 늘 고난과 보상이 함께 짝을 맞춰 오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입장에서는) 이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특별히 아주 가슴 뛰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라의 강인함과는 별개로 책을 덮고 난 후 밀려오는 씁쓸함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세라의 입장에 서서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잠시 잊고 있던, 모른 척하던 부분들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공주는 어디서 오는가? <작은 공주 세라>에 드리운 제국주의의 그림자

 

  물론 세라는 부자인데다가 착하고 품위 있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족함이 없는 아이이다. 하지만 세라가 인도에서 온 영국인이고 이후 인도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전보다 더한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세라를 둘러싼 안온함과 풍요로움, 그 막대한 부가 식민지 착취를 통해 쌓아올려졌을 것을 생각해본다면, 식민 지배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등골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비록 세라가 처음부터 균형 잡힌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으되, 태생부터 최상위층에 속해 있었고 이러한 환경에 어릴 적부터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아직 19세기의 아이이기 때문에)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라는 모두에게 친절함을 베풀고,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는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세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시 사히브’(사히브는 식민지 시절 인도에서 유럽 남성을 높여 부르던 말이고 미시가 붙어 '미혼의/여자아이'의 뜻을 더한다.)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타인의 시중을 받는 것이 익숙한 아이에 머무른다


  (람 다스가 자신을 미시 사히브라고 부르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세라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세라는 자신을 라자의 딸처럼 대하는 람 다스를 보며 하인 하녀 등에게 홀대받는 지금과 달리 하인과 노예들이 자신에게 깍듯이 대하던 과거를 향수 어리게 회상한다. 또한, 세라는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포착하지만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텍스트 내에서 람 다스는 신비스러운 동양인이자 충성스러운 하인으로 묘사되는데, 사실 유럽 아이들을 왕의 자식처럼 받드는 식민지 출신 인도인의 이미지를 현실로 가져오면 얼마나 분하고 비굴한 모습이 되는가…….) 결국 세라는 제국주의와 계급 질서를 내면화한 전형적인 지배자의 시각에 입각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가난의 경험은 세라를 겨우 조금 나은 상류층 지도자로 만들어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공주 세라>의 결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다소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낭만성을 한 꺼풀 벗겨내고 보면 제국주의의 질서와 계급 질서가 그대로 유지 및 계승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교훈적인 이야기의 결말은 현대인의 입장에 서서 냉소적으로 생각할 때 이렇게 읽힌다.

 

  인도 식민지 착취를 통해 쌓아올린 막대한 부를 얻어 옆방에서 함께 고난을 견디던 친구베키를 하녀로 구출해가고, 마지막에는 굶주린 백성(아이)’들을 위해 자애롭게 빵을 나눠주는 영국 공주(세라)’. (본문에서도 언급되었던 이 백성과 공주를 다시 식민지와 대영제국으로 치환해보면 또 어떤가.)

 

  계층 간 이동에 대한 욕망도 가능성도 보여주지 않은 채, 하층민은 하층민으로서 자신의 본분에 만족하고, 공주는 공주로 남는다. (특히 자발적으로 세라를 시중들겠다는 베키의 모습, 세라가 그간 서로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아이라고 강조하던 친구를 기쁘게 하녀로 데려가는 모습, 이후 세라의 시중을 들며 행복해하는 베키의 모습은 기득권층이 바라 마지않는 바람직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더더욱 베키를 자신과 같은 학생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세라의 언급 한 마디만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동화에 드리워진 이면의 그림자를 목격하는 건 늘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세라의 상상력과 품위만을 치켜세우기엔 세월은 이미 너무 많이 흘렀고, 많은 가치가 변했다. 순수하게 세라의 낙관적인 능력에 감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씁쓸하기도 하지만, 어렸을 적 축약본으로 읽었던 책을 완역본으로 읽는 묘미는 원래 이런 부분에 있는 것 아닐까. (그때 그 시절의 감동이 퇴색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사족으로, 꼭 제국주의가 아니더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이야깃거리는 이외에도 무궁무진하다세라를 정말 주체적인 주인공으로 볼 수 있을까? 만약 아니라면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작은 공주 세라>에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본받을 만한 어머니 상(Mother Figure)이 부재한다. 실질적인 어머니의 부재(ex. 세라와 로티의 어머니)와 상징적인 어머니의 부재(ex. 민친 교장과 어밀리아)가 아이들, 특히 세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이 질문에서는 아버지의 부재가 여자아이의 몰락과 직결되고, 아버지 상(Father Figure)의 귀환(캐리스포드)이 상승으로 이어지는 점. , 남성의 보호 아래에 놓인 여성이 안락함과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는 모습을 작가의 생애, 시대적 상황 등에 연결지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혹은 세라가 누리는 권력의 근원이 어디인지 다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민친 교장은 <작은 공주 세라>에서 악의 축에 가까울 정도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모든 것에서 긍정적인 것을 끌어내는 세라가 되어 민친 교장의 긍정적인 면모를 찾아본다면?’, ‘아동 문학은 어린이들이 읽을 만한 교육적인 바람을 담기 마련이다. 세라는 어떤 점에서 어른들이 바라는 모범적인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혹은, ‘감정을 자제하고 나눔의 미덕을 실천하는 세라의 모범적인 행실은 어떤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이 부분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아이다움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도 있겠다.)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작은 공주 세라>는 굉장한 가치를 지닌다. 아직 걸 클래식 시리즈 중 <작은 공주 세라>밖에 읽지 못했지만, 당장이라도 독서모임에 가입해 , 걸 클래식으로 여성 서사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하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다. 350여 페이지 가량 되는 책에 이렇게 많은 질문거리가 담겨 있으니 배는 두꺼운 <작은 아씨들>에는 얼마나 다채로운 이야깃거리가 숨어 있을지 기대된다. (진심으로, 독서모임과 독서토론 도서로 강력 추천한다.)

 

  글을 마치며, 세라의 정신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독자로서 나는 결말에서 더 나아가 상상하고 싶다. 버넷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 그 이후의 이야기를. 교육을 받고 독립적으로 성장한 베키와 더더욱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갖추고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선사하는 세라가 책 밖에서 살아가고 있으리라 상상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읽은 어린 독자들이 차별하지 않는 마음을 배워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고 있으리라고, 무한한 긍정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꿔나갈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작은 세라의 말처럼, 상상하고 믿는 체하면 진짜처럼 느껴지니까.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니까!

 

 “그렇게 상상하자는 거지.” 세라가 대꾸했다. “상상에 몰두하면 진짜로 볼 수 있거든.”(p.256)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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