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시는 하나님 - 양장
헨리 나우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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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와우! 하나님께서 춤을 추신다고요? 맞아요! 하나님께서는 못하시는 게 없잖아요. 그러니깐 아마도 하나님께서 춤을 추신다면 춤도 정말 잘 추실 거예요. 그러면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그럼 하나님께서는 어떤 장르의 춤을 추시는데요?” 이렇듯 이 책 제목인 ‘춤추시는 하나님’ 만 본다면 이러한 엉뚱하고 재미있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러한 생각들은 엉뚱한 것이 아니라 한번 쯤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과거가 아닌 현시대에서 하나님께서 춤을 추신다면 어떤 장르의 춤을 추실까? 어른들이 생각하기에는 블루스나 덩실덩실 추는 탈춤이 아닐까 하겠지만 신세대 아이들이 생각할 때는 힙합이나 브레이크 댄스라고 할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혼자만 춤을 추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다윗 왕이 자신의 바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췄고 또한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갈 때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을 때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춤을 추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홀로 춤을 추실 줄 알지만 그것보다 우리 인간을 함께 춤의 향락으로 불러 주시는 것이다. 이제 춤을 추시는 하나님을 통해 현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춤의 향락으로 불러주실지 기대를 해보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크고 작은 상실을 경험 했고 경험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 또한 큰 상실감을 맛 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럴 때 우리는 슬픔 가운데 기쁘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왜 우리는 춤을 추어야 하겠는가? 고통 속에서 견딤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런 물음에 대해 어느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혼자 춤을 추라고 하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춤을 춰보지 못한 초보자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그러기에 이러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친히 스텝 하나하나 조심스레 그리고 천천히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이런 고통을 나에게 주십니까?” 라는 물음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난으로부터의 춤의 초청을 받아 들여 멋지게 춤의 스텝을 밟아 보자.

이 책의 저자 헨리나우웬은 아픈 세상에서 발견하는 우리에게 희망고난에서 춤으로의 초청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인생을 통찰하는 다섯 가지 지혜를 우리에게 제시를 해준다.
그럼, 먼저 헨리나우웬이 제시하고 있는 ‘작은 자아에서 더 넓은 은혜로’의 춤의 세계에 들어가 보자.
몇 달 전에 Harold S. Kushner가 쓴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다들 이 제목에 공감을 할 것이다. ‘왜? 나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데 나에게 불치병에 걸리는 것일까?’, ‘왜? 내 친구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어야만 했는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돈도 많이 벌어서 호화로운 집에서 화려하게 살고 있는데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빛에 시달려야 하는가?’ 이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한 사람들에게 “삶은 공정한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 각자에게 마땅한 것,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신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신앙 고백적 답이 될 만한 어떤 신학자의 고백의 글을 읽어 보자.

오! 하느님, 우리가 전쟁을 끝나게 해 달라고
당신에게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미 인간 스스로 자신과 이웃 가운데에서
평화의 길을 찾아야만 하도록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오! 하느님, 우리가 굶주림을 끝나게 해 달라고
당신에게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선 우리가 현명하게만 이용한다면 전 세계를
먹일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을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 하느님, 우리의 편견을 뿌리 뽑아 달라고
당신에게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선 우리가 바르게만 사용한다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선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 하느님, 우리가 절망을 끝나게 해 달라고
당신에게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선 이미 우리가 스스로의 힘을 의롭게만 사용한다면
빈민가를 청소하고 희망을 줄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오! 하느님, 우리가 질병을 끝나게 해 달라고
당신에게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선 이미 우리에게 건설적으로만 사용한다면
치유와 회복을 추구할 수 있는 위대한 정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 하느님, 그리하여 우리는 대신 이렇게 기도합니다.
단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할 수 있는,
단지 바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는
힘과 결단력과 의지를 허락하소서

이 글을 읽으면서 헨리나우웬이 처음 말하고 있는 작은 자아에서 더 넓은 세계로 나가는 방향을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우리는 이제 더 큰 춤판에 들어가기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좁은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필요 없이 춤동작으로 그 자리를 뛰어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제는 좁은 자리에 벗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의 자리를 내 마음 중심 한 복판에 두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럴 때 왜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곳이 나의 춤판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나는 자유로운 춤의 세계로 들어가 흥겹게 춤을 추기 시작하겠다.
또한 작은 자아에서 더 넓은 은혜로’의 춤을 추기 위한 방법은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감사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며 감사의 대상과의 춤의 향락으로 갈 수 있는 길이다. 이때 우리는 춤의 스텝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낄 수 가 있다.

헨리나우웬이 두 번째로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은 ‘움켜쥠에서 내려놓음으로’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들으면서 주변 환경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성격과 가치관이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적 영향 속에서 자신만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움켜쥠으로 인해 더 큰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수도 있을 것이다. 그 움켜쥠의 강도가 세질수록 움켜짐은 집착으로 변해간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춤의 세계로 초대 하였지만 우리의 움켜쥠으로 인해 춤의 기본 스텝조차 밟지 못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의 춤의 초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움켜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된다. 헨리나우웬은 이러한 움켜쥠에서 내려놓음으로 옮겨갈 때 맞닥뜨리는 큰 장애물은 ‘두려움’이라고 한다. 동물의 경우를 보면 자기가 움켜지고 있는 영역 안에 다른 동물이 침입을 하면 그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그 두려움 속에 침입한 동물을 쫓아내려고 안간 힘을 쓴다. 인간도 동물과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마태복음 가운데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두려움들의 초점을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그 분께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흔히 ‘역시 사람은 겪어 봐야 해’하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생각들로써 다른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는데 막상 자신이 생각했던 그 겉모습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편견을 벗고 이제는 귀를 기울여 보자. 이럴 때 처음에는 아주 작게 그 다음에는 점점 크게 춤을 추고 있는 스텝 소리가 들려 올 것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동일한 마음을 가지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춤추기를 원하신다.

춤을 추기 위한 방법으로 헨리나우웬은 ‘운명론에서 희망으로’를 제시해 준다.
‘난 해봤자 소용없어’, ‘현실을 받아들이자’, ‘우리의 운명이야’ 등 사람들은 이러한 말들을 자주 사용한다. 이 말들은 어쩌면 일시적인 것 속에서 영원한 것을 보는 것을 잊어버리게 하고 우리의 삶을 단정적이고 제한하기도 한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춤을 출 수 있는 가능성을 주셨는데 인간은 춤을 출 수 없다고 스스로를 인정해 버리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며 살기도 한다. 여기서 운명적인 것은 무엇일까?
미리 예정된 만남? 포기할 수 없는 사랑? 우리 인간들은 운명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발휘 하지 못한다면 어떠할까? 어떤 상황 속에서 ‘이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야‘ 라고 말을 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될 것은 운명과 믿음은 구분되어진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가장한 운명은 위험한 것이다. 믿음은 운명처럼 수동적이지가 않는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를 인도하는 희망 찬 의지인 것이다. 운명론을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렇게 운명론을 벗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의 춤을 선사하신다. 다윗과 여인이 하나님과 함께 희망의 춤을 춘 것처럼 나 또한 이제 하나님께서 선물하신 희망의 춤의 스텝을 천천히 밝기 시작해야겠다.

인생을 통찰하는 또 하나의 지혜는 ‘감정의 조정에서 순전한 사랑으로’이다.
상담가들이 상담자들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남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 상담가가 상담자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이렇게 해결하라고 하고 답을 알려준다면 이 상담은 이미 잘못된 상담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 인간 또한 남이 힘들어하는 고민이나 아픔들에 대해서 다가가는 방법에 대해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헨리나우웬은 이에 ‘긍휼’이라는 말을 언급한다. 긍휼의 어원적 의미는 ‘함께 아파한다’ 이다. 이것은 남을 대할 때 진정한 마음으로 나의 내면 안에 있는 사랑을 전해주는 것이다.
현시대에 살고 있는 젊은 사람들의 사랑을 대하는 경향을 보면 서로 조건을 붙여 사랑을 하는 경우가 있다. ‘상대방이 무엇을 해준다면’,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조건적인 사랑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성경을 통해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는 넘치는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앞에서 말한 긍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감정의 조종을 이제 주님께 내어 드릴 때 우리는 좀 자신에 대해 투명해 질수가 있다. 이러한 투명성을 가질 때 내 자신은 남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한번 말씀하신다.
슬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마음에 고통을 지닌 사람 또한 같이 춤추기를 원하신다고....
너희들은 혼자가 아니라 같이 춤을 출 때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기쁨과 평안이 너희 안에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믿어라.

인생을 통찰하기 위한 마지막 지혜는 ‘두려운 죽음에서 환희의 삶으로’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춤을 추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춤을 추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어느 정도 춤의 스텝을 밟으며 기쁨의 춤을 출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가 춤을 추는 것만으로 만족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더욱 기쁜 마음으로 춤을 잘 출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시기 원하신다.
기쁨의 마음을 가지고 춤을 잘 출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서 희망의 아침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우리 삶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즉, 미래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전혀 예측 할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춤을 잘 추는 방법을 알려 주시는 것처럼 또한 우리에게 죽음의 공포와 회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믿음을 주신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현재의 삶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이제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노력을 망쳐놓고, 삶의 모든 시도를 조롱거리로 만들 수가 없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의 슬픔과 죽음의 그늘 가운데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걷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과 손을 잡고 멋진 춤의 향락을 즐겨보자.

이 책은 나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 남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 그리고 내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가져 온 것이다.
책을 통하여 내 안에 춤을 추고자 하는 열정을 발견하게 되었고, 또한 그 춤을 남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 춤은 단지 기분을 좋게 하는 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선물인 것이다. 이 춤을 추는 대상은 제한이 없다. 어린아이, 젊은이, 늙은이, 또한 가난한 자, 부자가 함께 어우러진다.
하나님께선 지금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내 아들 딸들아 함께 춤추자” 하나님께선 오늘도 춤을 추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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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친 유럽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
조셉 폰타나 지음, 김원중 옮김 / 새물결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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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펼치는 순간 만만치 않은 책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한 번쯤 읽어 봤을 법 한데 나는 거기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무뇌한 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책장을 얼마 넘기지 않았는데 대부분의 이야기가 신화로부터 진행되는 것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숙제가 아니라면 별로 읽고 싶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유럽’이라는 책의 필자는 재미있게도 거울을 통해 시대별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래서 먼저 거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았다. 거울이란 어떠한 사물을 비춰준다. 그냥 비춰주는 것이 아니라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만을 비춰주는 것이다. 이런 거울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이 책은 10개의 소주제를 통하여 유럽의 역사를 비춰주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는 내가 지금까지 서양사를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였는가 이다. 서양사를 공부하면서 그것이 정말 진실인지에 대하여서 생각해 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또환 서양의 힘에 눌린 우리사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서양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무조건 우리의 역사보다도 우월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며 살아왔다. 그러면서 “우리는 아직 멀었어”라고 혀를 찰때까 너무 많았다.

   이런 나에게 이 책은 내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었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듯이 과거의 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 할 수 없는 것이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모습을 생각하지 못한 체 살아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역사도 그렇게 감춰져 있는 모습을 엿 볼 수가 있다. 지금까지 모두 알고 있는 유럽의 역사에 대하여 이 책은 다시한번 짚고 넘어가자고 외치고 있다.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어느 누구도 비판 받아야 할 역사적 진실들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하여 그러한 부분들에 대하여 드러내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우리에게 많은 역사적 사실 외에도 많은 도전과 교훈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관점의 변화를 가져다 준다. 우리는 한면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지만 이 책은 다른 관점으로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유럽의 문명은 우리와 비교해 볼때 엄청나게 발전된 곳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유럽의 문명이 발전된 것은 아니었다. 이 책이 말하는 대로 유럽은 야만의 거울이라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것을 통하여 고도의 문영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며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가장 잘 하는 것이있다. 바로 모방이다. 모방하는 것은 다른 어떠한 나라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잘한다. 물론 모방도 중요한 것이지만 이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색깔을 찾는 것이다. 유럽이 야만이라는 거울을 통하여 세계문명에 우뚝 선 것처럼 우리나라도 지금 거울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면서 현실을 인정하고 반성하여서 우리나라만의 거울의 색깔을 찾아야 할것이다.

거울에 비춰진 잘 못된 모습을 보기가 두려워서 보지 않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하루 빨리 우리의 역사를 거울을 통하여서 바로보고 잘 못된 것은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외치며 끄집어 내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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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세계의 치유
정태기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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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세계의 치유 




  흔히 사람들은 어렸을 때 자라 온 환경이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어릴 적 자라 온 환경이 좋지 않았다면 많은 상처와 인격 형성에 있어서 장애를 가질 수 있는 확률이 높고, 그 반대로 자라 온 환경이 좋다면 그 사람의 인격이 잘 형성되구 남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원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릴 적 환경은 우리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선택되어지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럼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이 영향을 받은 성품, 인격 그리고 상처등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정태기 교수님이 쓰신 ‘내면세계의 치유’를 읽고 나를 발견하고, 내 안에 있는 상처를 치유하며 더 나아가 나의 내면세계를 성장시켜보자.

  이 책을 통하여 내 자신에게 한 번 물어 봤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 의지대로 삶을 살고 있는가?’, ‘내 삶을 내가 주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부터 끌려 다니는 객체의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너의 삶이 행복하느냐?”, “너가 가지고 있는 상처가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면 나는 당당하게 “난 행복하다. 그리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서 내 안에 있는 상처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내면세계의 치유’라는 책을 읽고 내 안의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어떤 일이든지 완벽하게 하고 싶어하는 나의 완벽증, 나의 생활 중에 남을 의식하는 의식증이다. 어릴적으로 내려가 보면 나는 어떠한 그룹안에 항상 중심이였다. 그래서 자라면서 내가 중심에 있지 아니하면 내 자신에게 화를 내고 때론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우연히 상황이 그렸게 만들었다고 위로하며 합리화 시키는 버릇이 생겼다. 이런한 모습들이 지금의 ‘나’의 한 모습이 되었다. 이 책의 2부에서는 ‘만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만남에서 상처를 받는 반면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리고 3부에서는 ‘하나님 체험을 통한 내면세계 성창’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만남에 대해서 말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대학교 초년 때 무기력증에 시달렸을 때이다. 하나님을 뜨겁게 믿고 싶고 더욱 하나님에 대해 깊히 공부하고 싶어서 신학교에 진학했는데 갈수록 내 자신의 영성이 피폐해지는 걸 느꼈다. 심지어 예수는 없다라고 생각을 했고 자퇴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그 때 영적 체험을 하고 되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뤄졌고 이러한 만남을 통해 내 마음의 무거웠던 짐들이 가벼워지며 마음의 상처들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

  이처럼 누군가와의 만남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그 만남의 대상이 신이됐든, 아니면 살아있지 았는 무생물이든 간의 자신의 처한 상황을 변화시켜줄 수 있고 어쩌면 인생을 180° 뒤바꿀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통해 용기를 얻고 고백하는 것은 이제 나에게 어떠한 상황이 닥쳐오더라도 그 상황을 두려워하며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즐기며 이겨내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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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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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영혼의 연금술

세상 속의 나와 책속의 산티아고

서로 꿈을 꾸고 살아가는 아이

산티아고의 여행을 통하여 흥미진진한 생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산티아고의 여행을 통하여 우린 꿈을 꾼다.

바로 몇 시간 후에 일상 생활로의 귀환을 잊은 채...

산티아고처럼 나 또한 보물을 찾아 떠난다.

그것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아 다니는 목마른 영혼의 괴수처럼 말이다.

단순하게 사는 법은 잊은 현대인에게 이 영혼의 연금술은 우주적인 해법을 던져준다.

아무리 내 자신의 초라해 보일지라도 내 중심에서 역사는 쓰여진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 가는 늙어가는 괴수는 어떠한 진정한 보물과

도같은 삶의 지혜를 추구하며 따뜻하지만 차가운 내 영혼의 알 수 없는 색을 칠해간다.

'산티아고 처럼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것이 자유이던....억압이던지간에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것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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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아 다니는 목마른 영혼의 괴수처럼 말이다.

단순하게 사는 법은 잊은 현대인에게 이 영혼의 연금술은 우주적인 해법을 던져준다.

아무리 내 자신의 초라해 보일지라도 내 중심에서 역사는 쓰여진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 가는 늙어가는 괴수는 어떠한 진정한 보물과

도같은 삶의 지혜를 추구하며 따뜻하지만 차가운 내 영혼의 알 수 없는 색을 칠해간다.

'산티아고 처럼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것이 자유이던....억압이던지간에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것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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