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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ㅣ 마이클 돕스의 냉전 3부작
마이클 돕스 지음, 허승철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20년 3월
평점 :
품절

소련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다
(마이클 돕스, <1991> 서평)
1991년, 소련은 무너졌다.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손바닥 아래에서 힘없이 부서져버린 제국의 잔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 옐친이 권력을 꿰찼다.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대부분의 옛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경제적 몰락과 정부의 몰락이 겹치며 대혼란이 찾아왔다. 그러나 혼란에 빠진 모든 국가들에서도 한 가지 공통점은 발견할 수 있었다. 예전의 우울한 '소련'이란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통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누가 소련을 망가뜨렸나? 소련 사람들의 삶을 칙칙한 관료제의 틀에 가두고, 모든 도시의 광장에서 활기를 찾아볼 수 없게 만들고, 핵무기는 만들 수 있지만 면도날은 만들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를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마이클 돕스는 그의 저서 <1991>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유별나게 소련을 망친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없이도 소련은 이미 망해가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것일까? <1991>은 소련이 붕괴되기 약 10여 년 전인 1979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결정한 그 해이다. 얼마 안 가 폴란드 그단스크 조선소에서는 파업의 물결이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두 사건 모두 소련 체제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반대하는 군 전문가들은 '당의 명령'이라는 은근한 협박 앞에 "충성"을 외쳐야만 했다. 폴란드 인민들은 당국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는 영혼 없는 기계가 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소련은 명분도 이득도 없는 전쟁에 깊이 빠져버렸고, 노동자들을 위한 국가라는 존재가 노동자들을 얼마나 적으로 돌렸는지 증명해 버렸다.
이 책은 두 사건 이후로도 계속된 정치적 격변들을 천천히 따라간다. 브레즈네프의 노쇠한 몸뚱이가 움직이는 곳을 따라가기도 하고, 서기장이 되기 전의 고르바초프가 이 나라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며 친구에게 은밀히 속삭이는 말들을 전하기도 한다. 사할린 섬 위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비행체 – 훗날 대한항공 007편으로 밝혀진다 –를 '적기'로 판단하던 소련 방공기지의 급박한 순간을 묘사하기도 하고, 옐친과 고르바초프가 갈라지는 과정을 영화처럼 그려내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 모든 묘사와 동시에 소련 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도 서술해 놓았다.
잠시 저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저자는 원료 생산에서 완제품 완성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비효율로 가득 찼다고 말한다. 계획경제체제가 만든 기묘한 수요공급체제 아래에서 원자재는 거의 공짜에 가까운 가격으로 공장에 쏟아져 들어왔다. 공장 관리자들은 무한하게 공급되는 원료들을 대충 쓰고 버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원료 생산 목표는 중앙에서 설정했고, 중앙이 생산 목표를 할당하면 실무자들은 어떻게든 중앙의 요구를 충족해야 했다. 목표량이 점차 상향되자 작업절차와 안전수칙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부산물들을 재활용하기 위한 귀찮은 절차도 생략되었다. 그렇게 소련의 공장은 "미국 공장보다 2~3배 많은 원료를 사용하고도 훨씬 질이 떨어지는 물건들을 만들었"고, 시베리아의 원유 책임자들은 "매일 유럽 여러 도시를 따뜻하게 하기 충분한 양의 천연가스가 니즈네바르톱스크 주변 유전에서 불태"웠다.
정치구조도 기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소련의 정치국 회의가 공개 토론의 장이 아니라 공산당 엘리트 그룹의 충성 의식에 가까웠다고 설명한다. 당의 노선은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회의의 순서도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소장파는 원로들에게 발언권을 양보하고, 그들의 의견에 맞장구를 치고, 의례적인 지지를 표명하며 기계적인 책임을 지는 식이다.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앞서 말한 사람만큼 강경한 발언을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리하여 "의견 불일치는 공개적 논쟁보다는 뉘앙스와 강조점의 미묘한 차이로 표현"되는 정중한 회의방식이 완성되었다. 충성의식은 조직의 말단까지 계속 반복되어 소련 공산당원 1800만명이 모두 지지의사를 밝히기 전까지 끝나지 않았다. 소련 체제 아래에서 모든 사람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재미있는 문체로 다루고 있는데, 그에 더불어 사회구조의 내밀한 면을 들춰주기도 하니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워싱턴 포스트의 전 모스크바 지국장으로서 사건의 한가운데에 실제로 서 있었던 저자의 체험담이 종종 추가되기도 한다. "신랄한 아이러니, 투지 넘치는 주인공, 의미심장한 대립이 가득한 러시아 소설을 닮은 휴먼 드라마"라는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서평은 빈말이 아니다. 이 책은 등장인물들의 상호관계가 이어지며 대립과 출세와 비극이 끝없이 이어지는 한 편의 드라마다. 그것도 '감독의 해설'이 친절하게 곁들여져 있는 '(소련 멸망)30주년 에디션'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600페이지의 압박이 주던 부담감은 어느새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그만큼 쌓여 있다는 즐거운 기분으로 바뀌었다. HBO의 <체르노빌>을 보고 소련에 흥미를 가진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붉은 10월>을 보고 냉전시대의 무시무시함에 흥미를 가진 밀덕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의 원인을 탐구하려고 하는 항공기 매니아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냥 재미있는 소설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도 적당히 만족할 수 있는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다만 이 책의 주제 자체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이곳저곳을 넘나드는 책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다. 스탈린이 중국의 지도자였는지 소련의 지도자였는지, 냉전이 대충 100년쯤 전 이야기인지 50년쯤 전 이야기인지는 알고 시작하는 게 좋겠다. 드라마 <체르노빌>이나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같은 영상이 이 책의 낯선 주제에 대한 불안감을 낮춰줄 것이다. 스탈린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고 냉전이 몇 년쯤 전 이야기인지 안다고? 그럼 그냥 읽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