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이웃
서수진 지음 / 읻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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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덮자마자 “다정한 이웃”이라는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과 함께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나름으로 불행하다.”가 떠올랐다. 사랑이 많은 남편과 귀여운 아이와 함께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매일 다른 드레스를 입으며 이웃에게 많은 걸 베푸는 애슐리. 몇 개의 쌀국수 체인점을 보유한 남편이 있으며 성실히 교회에 나가고 믿음이 강한 도은.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모시고 있지만 누구보다 명랑하고 주위 이웃에게 사려 깊은 한나. 자신의 남편과 남편의 어머니를 끔찍이 챙기는 미아. 이 넷의 관계성은 멀리서 보기엔 단단하고 다정해서 서로에게 서로가 꼭 필요한 존재인 것처럼 보였다. 또,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오는 외로움을 버텨내는데 힘이 되어주는 관계인 듯했다. 그러나 각자의 충격적인 사정이 하나둘 밝혀질 땐, 과연 이들은 다정한 이웃이 맞는지부터, 이들이 정의하는 ‘다정’은 대체 무엇인지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의심은 아래와 같은 질문들로 이어졌다.
각기 다른 중독에 걸린 4명의 남자들은 어쩌다 저런 인생밖에 못 사는가. 그럼에도 나는 떳떳하다고. 남들과 같이 평범하다고 말하는 저 남자들의 심리는 무엇인가.
이지경이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잘못된 믿음을 고치지 못한 4명의 여자들은 왜 다 다른 방식으로 불행을 감내하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원래 그들의 모습대로 되돌릴 수 있는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데도 계속 기도를 하는 주인공 한나처럼 나도 작게나마 희망을 품게 돼버렸다.

그런데 왜 나는 남자가 사고를 치고 여자가 뒷수습을 하는 모습에 기시감을 느끼고, ‘환멸’이라는 감정을 여기서도 경험하고 있는가. 왜 또 부부관계면 남자가 바람을 피우고, 사실혼 관계면 남자는 결혼을 원하지 않는데 임신은 시키는 건가. 이런 이야기를 계속 읽다 보면 여자들이 바보 같아서 화가 난다. 실은 남자들이 쓰레기인 건데도. 서수진 작가님은 그들을 한심하게 느끼다 문득 ‘하. 지금 잘못한 게 누군데.’ 이런 깨달음을 스스로 얻을 것을 노린 건지 궁금해졌다. 동시에 희망은 참 잔인하다고 느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애슐리를 정말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던 남편 레오는 알고 보니 그저 섹스 중독이었고 애슐리에게 오픈 메리지까지 강요했다. 거기다 도은의 남편, 후이는 스토킹하는데 숨겨진 가정이 있는 것까지 모자라 애슐리를 스토킹하고 있었다. (한나의 남편 경한은 도박 중독, 미아의 남편은 마약 중독이다.) 이렇듯 제각각의 방식으로 네 커플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4명의 여자들은 자신이 속한 ‘교민 커뮤니티’에서 배척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한나는 안 좋은 일을 당한 건 너의 죗값이고 신의 심판이라고 얘기하는 구절이 잔인하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저 기도를 간절히, 계속해서 반복했고 애슐리를 배신한다. 미아는 더 이상 길을 잃지 않기로 결심하며 남편을 버리고, 한나를 고발한다. 도은은 자신의 방법대로 후이를 처리하고, 애슐리는 남편의 모든 만행을 그의 회사 동료에게 말한다. 표면으로는 이웃을 위하는 척하면서 결국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교민 사회에 소문이 안 나는 게 좋지만, 만약 난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기 위해 말이다.

그렇게 노력한 것은, 그들이 말하는 다정은 ‘위선’이었다.
시작이 유일하게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것임에도, 그들은 창대해질 미래를 그리며 미약한 시작을 애써 무시했다.

소설의 끝엔 명확하게 해결된 것도 없고, 이들의 위태로움이 괜찮아지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넷의 관계성은 더욱 모호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꼭 문학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는 없지만 『다정한 이웃』이 선사하는 가치는 견고하다. 벗어나고 싶었던 자신의 밑바닥, 드러낼 수 없었던 치부를 끝까지 숨기기 위해 일삼았던 위선은 주변인보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 우리는 앞으로 때론 이런 관계와 상황에 처해질 것인데 어쩌면 최악의 선택만 할 수 있다는 것. 순간의 선택에 따른 결과는 뒤집어진 와인잔처럼 손쓸 수 없다는 것. 겉에서 보면 역시나 한 사람의 모든 것에 대해선 알 수 없다는 것, 우린 어쩔 수 없이, 나름대로 각자의 아픔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잘못된 연대가 더욱 아픔을 극대화한다는 것. …

삶은 단번에 무너질 수 없다. 이미 나고 있던 균열을 계속해서 놓치거나 그저 믿음만 있으면 해결되리라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인생을 서서히 파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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