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이미 뭔가를 예감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앞으로 내가 그와 비슷한 남자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자신의 진짜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들. 어쩔 수 없이 부당한 현실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들,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제대로 해낼 수 있다고 믿는 남자들, 그들과 헤어질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보니 겨우 이 정도 얄팍함에 자신을 갖는 남자들만 만난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에는 이런 남자들만 있는 것일까. 결국 나는 그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들 중 누구도 달라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가원 - P69
비숍은 침착한 표정으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내게 어떻게 도와주기를 바라는지 물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아무도 내가 원하는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만들어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문득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지, 아버지로서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초특급 도피처인 셈이다. 로이 역시 아버지가 가는 곳마다 따라붙는 절망의 일부였다.
울음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울음은 자체의 의지를 지녔다.
슬픔을 견디는 무기는 오로지 어리석음 뿐이다
박완서의 글에는 부족한 인간, 약한 인간, 비겁한 인간, 삶의 무거움 앞에서 쪼그라든 인간들이 그모습 그대로 나온다. 그것을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극복해내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정교하게 또 냉철하게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은 용기를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