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은 영화 먼저 봐서는 안 되고 소설을 읽고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소설을 읽은 사람은 영화를 봐도 괜찮다.
이 영화가 소설보다 더 걸작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소설과 별개로 걸작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소설에 충실하게 영화화했다면 이 영화의 수준 이상을 바랄 수가 없는 정도로 괜찮은 작품? 그 정도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 괜찮다.
활자 매체가 영상 매체보다 위대한 까닭은 그 무엇도 우리의 머릿속에서 상상한 것만큼 근사할 수가 없기 때문인데 그런 점에서 소설 <더 로드>는 진심으로 위대했다. 그러나 추상적으로만 존재했던 머릿 속의 이미지들이 확실한 영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본 순간 영상 매체가 활자 매체를 (부분적으로는) 이길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 중요한 것은 소설 <더 로드>의 맥락이다.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가, 하는 문학적인 부분의 핵심들이 영화화하면서 생략되어 버린다면 이 영화가 재현해 놓은 영상은 표면적인 형식으로만 그칠 뿐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소모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영화 <더 로드>는 세기말의 지구 위에서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바다를 찾아 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설에서 말하고자 했던 인간을 인간이고자 하는 그 무엇에 대해 묻고 있다. 도대체 왜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는가.
의식의 흐름 수법이 공공연하게 등장하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악몽처럼 지구의 종말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악몽처럼 행복했던 평범한 날들의 꿈을 꾸는 아버지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잘 이어주고 있다. 행복했던 날들부터 시작해서 갑작스럽게 지구의 종말이 오고 아기를 낳는 것이 행복이 아닌 악몽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 꿈에서 깨면 더 악몽같은 현실을 견뎌내게 하는 유일한 존재인 아들이 아버지의 곁에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신이 아들을 준 게 아니라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아들은 단순히 피붙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그 모든 순간을 자신과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는 이유 하나로 버틸 수 있었고 아들은 그에게 희망이었다. 아버지는 희망의 문을 스스로 닫을 수가 없었고 그런 점에서 죽음을 선택하지 못해 죽음이 자신을 선택하기를 바라며 떠나간 아내조차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 인간이 인간을 먹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사람이기를 선택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들은 이기적인 아버지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하고 그를 꾸짖고 질책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인간 이하의 인간으로 하락할 수가 없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우리는 가슴 속의 불을 옮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미쳐가고 있는 세상에서, 아버지가 들려줄 수 있는 유일한 동화같은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로 인해 꿈을 꾸고 아버지는 아들로 인해 인간일 수가 있다. 그런 그들의 애정은 배타적인가? 아니다. 진정한 애정은 배타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코멕 맥카시는 말한다. 끝부분에서 나는 수능시험 때문에 열심히 읽었던 단편소설 <화수분>이 생각났다. 얼어죽은 아비와 어미의 시체 발밑에서 놀던 아기를 지나가던 사람이 달구지에 태워 가는 그 결말 말이다. 절망적인 회색빛 지구에서, 나무가 쓰러지고 시체를 파먹는 이 땅에서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불씨를 옮기는 사람이 있어 다행입니다, 라고 말하는 영화다.